소설리스트

38화 (39/65)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다. 손가락에 느껴지는 방아쇠가 낯설었다.

언제나 습관처럼 잡았던 총인데도 불구하고 그 어느 때보다도 잔뜩 긴장되는 것은 온몸이 그에게 결박되다시피 닿아 있기 때문이다. 요하네스는 ‘자신이 다 한다’는 말을 지키려는 듯 정확히 과녁까지 조준해 주었다.

“자.”

단단히 나를 잡은 그가 속삭이듯 말했다.

“당기기만 하면 돼.”

그의 제안이 말도 안 된다는 것은 내가 제일 잘 알고 있었다.

솔직히 이렇게 해서 초보자가 목표물을 맞힐 수 있다면 그 누구나 명사수가 될 것이다. 사격은 이런 식으로 해서 제대로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나는 조금 고민하다가 기대에 찬 레오의 얼굴을 떠올렸다.

내게 비밀이라며 자신의 출생에 대해 속삭여 준 소년의 긴장된 목소리를 상기했다.

…요하네스는 총을 잘 다루지만, 그래도 아주 예전에 다뤄 본 게 다라고 했으니 무기 자체에 대한 이해도는 떨어질 것이다. 여기 있는 모든 사람들도 다 그렇고.

혹시나 함정이 아닐까 하는 의심을 깊이 품기에는 너무 많은 시선이 쏠려 있었다. 생각은 느렸고 합리화는 빨랐다.

숨을 멈추고 과녁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탕.

방아쇠를 당김과 동시에 명중임을 알았다.

나는 이상하게 덜덜 떨리는 손에서 재빨리 총을 놓아 버렸다. 그 어느 때보다 총이 낯설었다.

이럴 땐 무슨 표정을 지어야 하는 거지. 일단 기쁜 표정을 지어야 하는 건가. 활짝 웃어 보이며 팔짝팔짝 뛰기라도 해 볼까.

얼떨떨하게 서 있는데 레오가 달려와 안겼다.

“우와! 진짜 됐어요, 엘로이즈 님! 우와!”

요하네스는 피식 웃으면서 천천히 나를 끌어안다시피 했던 팔을 풀었다. 순간 현실감이 없었다. 예상하지 못한 상대 앞에서 사격 솜씨를 보여 준 건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조금 멍한 상태로 ‘나는 진짜 방아쇠만 당겼어…. 요하네스가 정말 대단해.’ 같은 소리를 하고 있는데 요하네스가 큰 곰 인형을 상인에게서 받아 들고 왔다.

“돌아가면 사격도 전문적으로 배워 보는 게 어때. 재능이 있는데.”

커다란 곰 인형을 레오에게 안겨 주며 요하네스가 내 머리카락을 살짝 쓰다듬었다.

“야영 때 늑대 떼가 나와도 괜찮을 것 같군.”

나는 마음을 가다듬고 요하네스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눈이 여느 때와 같이 다정했다. 뭐라고 대꾸해야 하는데 마땅한 말이 떠오르지 않아 이상하게 갈라진 목소리로 물었다.

“…그래요?”

“그래.”

요하네스가 천천히 내 손을 잡았다. 그리고 아직도 살짝 떨고 있는 손에 천천히 깍지를 껴 단단히 고정했다.

“그 정도로 충분한 재능이야.”

가만히 그를 바라보다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딱 그 정도면 되는 재능이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북부에서 늑대 사냥이나 할 수 있는 딱 그 정도. 성력 따위는 없고, 악령 같은 것을 노리지 않아도 되고, 그래서 이 모든 복잡한 일에 얽히지 않아도 되고.

요하네스의 대답은 나조차 몰랐던 내 소망을 품고 있는 것이라, 순간적으로 마음이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만일 아까 이 순간이 함정임을 확신했어도, 기꺼이 빠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 이미 지나간 과거는 어쩔 수 없었고, 그렇다면 혹시 모를 미래를 대비할 때였다. 나는 언제 당황했냐는 듯, 밝게 대답했다.

“고마워요! 그럼 저 이 총 사 주시면 안 될까요? 연습이라도 해 보고 싶어서요.”

요하네스는 놀란 눈으로 잠시 나를 보다가 크게 소리 내어 웃었다. 그런 말을 할 줄은 몰랐다는 얼굴이었다. 나는 뻔뻔한 얼굴로 덧붙였다.

“재능 있다면서요. 그럼 투자를 해 주셔야죠. 안 그래요?”

나를 보며 꽤 오랫동안 유쾌하게 웃어 보이던 요하네스는 그 자리에서 상인에게 값을 치르겠다며 그 장난감 총과 조악한 총알을 구매했다.

솔직히 말하면 시세의 몇 배는 되는 가격 같아 보였지만 요하네스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그 자리에서 내게 장난감 총을 건네주었다.

“감사합니다.”

그렇게 나는 장난감 총을, 그리고 레오는 큰 곰 인형을 들고 그 좌판을 떠나게 되었다. 이제 어디를 갈까 고민하던 우리는 일단 광장 중앙으로 가기로 했다.

⚜ ⚜ ⚜

건국제에는 이런저런 조잡한 좌판이 많았기 때문에, 길거리를 지나다니는 사람마다 이것저것 들고 있었다. 엘로이즈는 콧노래를 부르며 장난감 총을 들고 있었고, 레오는 자신의 몸집만 한 곰 인형을 끌어안은 채였다.

“공작님, 이건 선물이에요.”

광장의 중앙으로 이동하는 중에 혼자만 빈손인 요하네스가 신경 쓰여서, 레오는 주머니를 뒤적거리더니 바로 아까 구매했던 조약돌을 건넸다.

“예뻐서… 샀어요.”

레오에게서 조약돌을 건네받은 요하네스의 눈이 커졌다. 그의 눈이 조약돌에 새겨진 가언을 훑었다.

‘책임을 다하라, 모든 것을 걸고.’

당연히 좋아할 줄 알았던 요하네스의 얼굴은 뜻밖에 고요했다. 레오가 살짝 눈치를 보며 말했다.

“어… 공작님은, 노아비크의 이능을 엄청 짙게 타고 태어나신 분이니까 가언에 대한 충성심도 엄청 높으시죠?”

요하네스는 천천히 레오에게 시선을 옮긴 뒤 살짝 웃었다.

“고맙다, 레오.”

미소를 지은 채로 감사를 표현하고 있지만, 그 표정이 어딘지 모르게 굳어 보여서 레오는 환히 웃지 못했다. 엘로이즈가 옆에서 서 있다가 레오에게 상냥히 말했다.

“이능을 짙게 타고 태어나서가 아니라, 레오에게 선물을 받은 것 자체가 좋으실 거야. 사람은 가문과 이능으로만 결정되는 게 아니잖아.”

그런 거였나, 레오는 조금 놀란 표정을 지어 보이더니 곧바로 사과했다.

“아… 그렇게 느끼셨다면 죄송해요, 공작님. 그냥 예뻐서 드리고 싶었던 거예요. 하긴, 뭐… 이능 자체도 악령이 이계에서 오면서 신께서 두 가문에 주신 거라고 하니까요.”

“그래.”

요하네스는 조약돌을 옷 속에 집어넣으며 말했다.

“뭐, 사람이 이능보다 먼저라는 건 누구나 다 아는 당연한 사실이지. 이론적으로, 악령들이 이 세계에서 사라지면 신께서는 이능 또한 두 가문에게서 거둬들일 테니까. 그래도….”

요하네스가 엘로이즈에게 시선을 옮긴 채로 희미하게 웃으며 속삭였다.

“…그렇게 말해 줘서 고마워.”

엘로이즈는 가만히 그를 바라보다가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한동안 그들 사이에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다소 어색한 침묵을 먼저 깬 사람은 역시 레오였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혹시 재미있는 것이 없을까 찾고 있던 레오가 또 한 번 흥분해서 말했다.

“우와, 저기 보세요!”

레오의 손가락이 향하는 곳은 바로 한 야외 결혼식장이었다.

“저 사람들, 결혼하나 봐요!”

하얗게 빛나는 웨딩드레스를 입은 신부가 막 마차에서 내리고 있었다.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이 그 모습을 보면서 휘파람을 불고 박수를 쳐 주었다.

보아하니 당연히 귀족은 아니고, 꽤 살림살이가 괜찮은 평민 집안의 결혼식인 듯했다. 턱시도를 입은 신랑이 헤벌쭉 웃으며 신부에게 달려가 급히 에스코트를 했다. 또다시 주변에서 박수가 쏟아졌다.

건국제가 진행되는 한복판에서 결혼식을 올리다니, 어떻게 보면 정신이 없었고 또 어떻게 보면 활기찬 결혼식이었다.

“그렇군.”

요하네스는 심드렁하게 대답한 뒤 그 붐비는 곳을 벗어나기 위해 몸을 틀려고 하다가, 자신의 옆에서 걷고 있던 엘로이즈의 발걸음이 어느새 멈춘 것을 눈치챘다.

“아….”

엘로이즈의 파란 눈이 그 평범하면서도 소박한 결혼식에 못 박혀 있었다. 요하네스는 자신도 모르게 엘로이즈의 옆에 멈춰 서서 그녀 쪽으로 다가오는 인파를 막아 주었다.

“보고 싶어요, 엘로이즈 님?”

레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엘로이즈가 눈을 깜빡이며 자신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우리가 봐도 …되는 거야?”

요하네스는 이럴 때마다 엘로이즈가 아주 낯설었다.

그에게 거침없이 청혼하며 ‘초면이지만 어쨌든 언젠가는 한 번 봐야 되는 사이인 건 맞잖아요?’ 같은 이야기를 할 때에는 언제고, 가끔 너무나 평범한 상황에서 이렇게 주눅 든 모습을 보여 준다.

북부에서 악령을 떼로 만난 다음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던 그 밝은 여자가 가끔씩 이렇게 자신 없는 모습을 보일 때마다 요하네스는 기분이 이상해졌다.

“어차피 아무나 구경하라고 이 건국제 기간에 야외에서 하는 것 같은데.”

요하네스는 무심하게 툭 던지듯 말했고, 그 말을 들은 엘로이즈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마치 대단한 선물이라도 받은 것 같은 얼굴이었다.

“그럼 좀 구경해도 될까요? 멀리서라도….”

“엘로이즈, 우리 곁에 서 있는 이 많은 사람들이 지금 뭘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엘로이즈는 주변을 한 번 두리번거리고 나서야 자신 말고도 이 결혼식을 구경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깨닫고 머쓱하다는 듯이 웃었다. 레오가 흥분한 목소리로 그녀의 편을 들었다.

“저는 수도의 결혼식을 처음 봐요! 북부의 결혼식이랑 많이 다를지 궁금해요.”

“그렇지? 사실 나도 결혼식은 처음 보는….”

신나서 레오에게 대답하던 엘로이즈가 눈을 한 번 굴리고 밝게 말했다.

“아니, 남부의 결혼식은 물론 몇 번 봤지만 어쨌든 그거랑 다를 수도 있으니까!”

“아마 별다른 건 없을 거야.”

요하네스는 기대에 찬 두 사람을 바라보며 달래듯 설명했다.

“기본적인 절차는 제국법으로 정해진 바를 따르니까.”

그 말에도 레오와 엘로이즈는 여전히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어 보이고 있었다. 하긴, 이 밝고 명랑한 축제 분위기 가운데에서 감정이 고양되지 않으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었다.

요하네스는 레오와 엘로이즈를 데리고 조금 더 구경꾼들의 앞으로 비집고 나갔다. 잘 안 보인다고 폴짝폴짝 뛰고 있는 레오를 수행 기사가 번쩍 안아 주었다.

물론 엘로이즈라고 해서 레오와 사정이 다른 것 같지는 않았다. 다른 사람들보다 키가 작은 편인 엘로이즈 역시 열심히 까치발을 들고 고개를 뺀 상태였다.

요하네스는 망설이지 않고, 엘로이즈의 허리를 뒤에서 안아 번쩍 들어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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