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6화 (37/65)
  • “공작님!”

    레오가 반갑다는 듯이 요하네스에게 안기는 바람에 나는 왜 끼어드냐고 말할 타이밍조차 놓쳐 버렸다.

    아마 일을 마치고 우리를 찾으러 거리로 온 듯했다. 그는 이렇게 중간중간 우리와 함께 축제를 즐기곤 했다. 그래도 갑작스러운 출현에 조금 놀랄 수밖에 없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주변 사람들이 그제야 힐끔힐끔 우리를 바라보며 ‘노아비크 공작….’ 같은 소리를 중얼거렸다. 그만큼 다른 사람들보다 훌쩍 키가 큰 그는 한순간에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

    순식간에 레오를 들쳐 안은 요하네스를 올려다보며 내가 부루퉁하게 말했다.

    “깜짝 놀랐잖아요. 이상한 사람인 줄 알고.”

    “글쎄, 내가 더 놀랐을걸.”

    레오는 여덟 살치고 키가 큰 아이였지만 요하네스에게 안기니 아직도 작아 보였다. 레오를 안아 든 요하네스가 느긋하게 내 말을 받아쳤다.

    “다른 여자라니. 내가 그대 오라비 같은 사람처럼 보이나?”

    내가 피식 웃는데 레오가 그때를 놓치지 않고 요하네스의 목을 끌어안으며 툴툴거렸다.

    “엘로이즈 님께 더 잘해 주세요, 공작님. 그렇게 빈정거리다가 이웃집 남자들한테 빼앗긴다고요.”

    “둘이 있을 땐 잘해.”

    그 뻔뻔한 말에 나는 어이가 없어서 요하네스를 빤히 노려보았다. 연회가 끝나고 난 이후 둘이 있을 때 벌어지는 일들에 대해서는 정말 남사스러워서 누군가에게 말하지도 못할 지경이었다.

    염치가 없어도 유분수지, 내가 보란 듯이 목에 감은 스카프를 만지작거리자 요하네스가 장난스럽게 웃었다.

    “더 잘해야겠군.”

    요 며칠, 밤마다 요하네스는 내 방으로 들어왔다. 그러고는 내 침대에 주인처럼 누워 내가 잠들 때까지 옆에 있어 주곤 했는데 그게 몹시 민망하면서도 꽤 좋았다.

    “왜 밤마다 오는 거예요?”

    “그러게.”

    그는 내 질문에 성의 없게 대답하면서도 내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었다. 그러고는 오늘 검은 고양이가 창가에 왔다 갔다거나, 오리고기가 아주 맛있었다거나 하는 내 사소한 일상 이야기들을 가만히 들어 주었다.

    그러다가 자연스럽게 입술이 마주치고 또 살결이 얽혔다. 솔직히 회상하는 것만으로도 몸이 공중에 붕 뜰 것만 같은 달콤한 시간들이었다. 나는 왠지 모를 죄책감에 몸을 움츠리다가 결국에는 거부하지 못해 온몸에 힘을 빼곤 했다.

    동침만 하지 않았다 뿐이지 연회 이후 한번 시작한 스킨십은 점점 단계가 깊어지고 있었다. 내 살결에 그의 흔적을 짙게 남긴 후에야 그는 아쉬운 듯 숨을 흩어 내며 속삭였다.

    “얼른 대신전 방문이 끝났으면 좋겠군.”

    잔뜩 잠긴 목소리에 열기가 어린 걸 느끼며 나는 그의 품에 파고들곤 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끝나면요?”

    “금욕 기간도 끝이겠지.”

    건국제가 끝난다는 건 여러 가지 의미를 내포했다. 어쨌든 대신전에 들어갈 수 있는 시기는 건국제 때밖에 없었고 어찌 되었든 그때 계획의 성공 여부가 결정될 것이다.

    계획대로만 잘된다면, 혼수상태에 빠진 황제를 다시 일으켜 세우고 디에고를 처단할 수 있었다. 한낱 ‘금욕 기간의 끝’으로만 수식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나를 당장 주고 싶어 미치겠는데 대의가 막는군.”

    그러나 그는 그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처럼 장난스럽게 말했고 나는 그를 달라고 애걸했던 연회에서의 밤이 민망해서 아무 반박도 하지 못했다. 내가 침묵을 지키자 요하네스가 천천히 말했다.

    “또 건국제가 끝나면… 그대가 그토록 노래를 부르는 북부로 갈 수 있겠지. 건국제 이후에도 여기 남아 있으면 수도 사교계 모임이란 모임은 다 그대를 불러 댈걸.”

    “아… 얼른 떠나야겠어요. 남부 같은 생활은 질색이라. 안 그래도 우리 결혼에 대해 궁금한 것이 많은지 똑같은 내용의 편지가 자꾸 와요.”

    “공작성에 돌아가면 방부터 바꿔. 밤마다 내가 찾아가는 걸 베이든에게 또 들키고 싶지 않으면.”

    그 말은 좀 놀라웠기에 나는 고개를 들어 요하네스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가 부드럽게 웃었다.

    “왜, 여기 나만 두고 가려고?”

    “…당신은 당연히 수도에 남으실 줄 알았어요. 저희들만 돌아가고요.”

    차마 내 입으로 ‘푸른 루비’를 추적해야 되지 않느냐는 말은 꺼내진 못했다. 요하네스는 내 볼을 매만지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이미 네 것인데, 네가 가는 곳에 따라가야지.”

    “어… 음….”

    “수도에 있어 봤자 그 낑낑거리는 개새끼 꼴밖에 더 되겠어?”

    조금 시간이 흐른 뒤에서야 나는 그 ‘낑낑거리는 개새끼’가 북부에 남아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요한을 뜻한다는 걸 알았다.

    하지만 그가 북부에 온다는 것은 ‘푸른 루비’의 추적을 중단한다는 말이나 똑같았다. 늑대에게 쫓기던 밤, 내가 ‘당신을 가지면 푸른 루비의 추적을 그만둘 수 있겠느냐.’라고 물었을 때와는 완연히 다른 답이었다.

    분명히 그때, 그는 ‘푸른 루비’를 쫓지 않는 자신은 더 이상 요하네스 노아비크가 아닐 거라고 단언했었는데.

    “더 추워지기 전에 야영을 떠나야겠군. 운이 좋으면 오로라를 볼 수 있는 지역이 있지.”

    내가 더 묻지 못했던 것은 그의 말이 마치 꿈결 같았기 때문이다.

    “초상화도 그려야겠어. 마담 에비나트에게는 미안하지만 조금 더 세련된 드레스를 입는 게 좋을 것 같은데. 나중에 후손들이 볼 때 그 시대 유행에도 맞지 않는 옷을 아내에게 입혔다는 평가를 듣고 싶지는 않아서.”

    “네… 네크라인에 비즈가 많이 달렸으면 좋겠어요. 드레스 따위 아무거나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수도의 드레스를 보니 예쁘긴 하더라고요. 역시 비싼 데에는 이유가 있었어….”

    나는 그의 단단한 팔에 기대어 살짝 미소 지었다.

    “북부에 돌아가면 가장 먼저 그대의 승마부터 내가 직접 가르쳐야겠어. 늘 내가 함께 다녀 주고 싶기는 하지만 그건 아무래도 힘드니까. 북부에서 승마는 기본 소양이야.”

    “와, 비싼 말 사 주세요. 이제는 절대 드레스를 입는 것 같은 실수는 하지 않겠어요.”

    “북부에서는 보지 못한 상당히 속물 같은 모습인데.”

    “수도에 와서 세상에 대한 이해도가 좀 더 높아졌다고 표현해 주시면 안 될까요?”

    조곤조곤 대화를 나누는 그 순간순간을 어딘가에 저장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몇 번을 생각했다.

    열기에 차 있으면서도 다정한 눈빛, 느릿하면서도 낮은 목소리, 따뜻한 숨결과 체온, 미래를 말하는 대화 사이에 차 있던 온기 모두 다 사물로 존재했으면. 이 순간이 지나도 몇 번이고 꺼내어 볼 수 있게, 단 하나도 잊지 않을 수 있게.

    그리고 그런 소망이 짙어질수록 나는 간절해졌다.

    “제가 잘할게요, 정말요.”

    “…….”

    “공작님 옆에서 꼭 쓸모 있는 사람이 될게요.”

    디에고의 야심을 막고, 악령의 습격에서도 자유로워지고, 그 이후 이유는 말할 수 없지만 ‘시간의 돌’을 달라고 말해서 마법진을 지우고, 그러면 모든 일이 끝날 것이다.

    “그러니까… 옆에 둬 주세요.”

    그렇게만 된다면 평생 ‘푸른 루비’인 것을 숨긴 채 요하네스와 북부에서 꼭 꿈꾸던 나날들을 지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물론 그가 많은 것을 궁금해하겠지만, 그래도 내가 쓸모 있다고 판단하면 내 사정을 묻지 않고 나를 받아 줄 수 있지 않을까.

    요하네스에게 끝까지 말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나는 성력을 가졌으니 북부에서 몰래 악령을 꽤 많이 죽여줄 수도 있을 텐데. 끝까지, 정말 끝까지 그에게 쓸모를 다할 수 있을 텐데.

    그렇게 되면 끝까지 나를 놓아주지 않았던 ‘에이스’처럼 요하네스도 나에게 집착하지 않을까.

    항상 스물다섯 살 이후의 삶이 흐릿했다. 필사적으로 살아남는다고 해도 뭘 하며 살아가야 할지 모르겠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요즈음은 살아남은 뒤 하고 싶은 일들이 아주 명확했다. 그게 기쁜 건지 슬픈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렇게 내가 지난밤들의 대화를 다시 한번 상기하고 있는데 요하네스에게 안겨 있던 레오가 꽃의 탑을 올려다보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와, 아직도 사람 진짜 많다…. 건국제 내내 저럴 건가 봐요.”

    여전히 꽃의 탑에 오르는 계단마다 사람들이 줄을 서 있었다. 나는 괜한 반발감에 툴툴거렸다.

    “꽃 색깔 하나 변하게 하는 게 다 뭐라고…. 실제로 악령이랑 열심히 싸우고 있는 사람들이 누군데….”

    “영광이군. 벨리아나스보다 노아비크를 높게 평가해 주는 사람이 있었다니.”

    “물론 단테 노아비크가 잘못하긴 했지만, 그래도 그게 벨리아나스가 저렇게 칭송받을 일은 아니잖아요. 물론 악령이 오는 이계의 문을 닫겠다며 연구 진행을 하고 있다는 명분이 있기는 하지만….”

    그 명분의 정반대가 되는 일을 하고 있는 황태자와 신전을 생각하자니 속이 다 터졌다.

    “뭔가 억울하지 않아요?”

    “안 억울한데.”

    내 짜증스러운 말에 요하네스는 전혀 기분이 상하지 않았다는 듯 천연덕스럽게 대답했다.

    “노아비크라서 어느 날 갑자기 청혼한 초면의 여자와 결혼할 수 있었겠지. 황족이었다면 그게 어디 가능한 일인가.”

    “어휴, 정말 다행이네요. 노아비크라서 약식으로 결혼식도 올릴 수 있고 말이에요.”

    여기서 갑자기 왜 나의 청혼 이야기가 나오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나 역시 지지 않고 받아쳤다.

    “듣자 하니까 황족은 저 탑 위에서 결혼식을 올린다면서요? 광장 모든 사람들 앞에서 간질거리는 프러포즈라도 하고 ‘나 결혼합니다’ 하고 알려야 한다면 당신 성격에 참 재미있을 텐데 말이에요.”

    “아, 그런 결혼식을 바랐어? 다음 생애에는 그렇게 해 주도록 하지.”

    다음 생애에서는 내가 황족으로 태어날 거라고 쏘아붙이려고 했을 때였다. 우리가 티격태격하는 것을 귓등으로 흘리면서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던 레오가 소리쳤다.

    “와, 저거 봐요!”

    레오가 가리킨 곳에는 사람들이 잔뜩 모여 있었기 때문에 나름대로 꽤 재미있는 구경거리가 있나 싶어 나 역시 퍼뜩 정신을 차리고 발돋움을 했다. 나보다 더 높은 곳에 있던 레오가 씩 웃으며 말했다.

    “총이에요, 총! 장난감 총으로 과녁을 맞추면 상품을 주나 봐요! 우리 저기 가 봐요!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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