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5화 (36/65)
  • “영지에서 기다리고 계실 부모님께 전달해 드리면 아주 좋아하실 거예요!”

    상인의 말에 나와 레오는 잠시 서로를 바라보다가 깔깔대며 웃었다. 아마 나와 레오를 보고 건국제를 구경하러 온 남매라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고급스러운 옷을 입고 있지만 수도에서 얼굴을 처음 보이는 귀족이라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안 그래도 거리마다 지방에서 올라온 어린 귀족들이 신나게 쇼핑을 하고 있었으니까.

    “네! 저희 공작님은 언제나 가문을 생각하시니까 하나 선물해 드리고 싶어요.”

    레오가 신나서 상인에게 다가갔다. 나 역시 흥미롭다는 듯 레오의 옆에 섰다. 확실히 반질거리는 조약돌에 작게 글씨를 새겨서 색깔을 입히니 정말 신기하고 예쁘기는 했다.

    “자, 그럼 뭐라고 새겨 드릴까요?”

    상인의 말에 레오가 곧바로 대답했다.

    “책임을 다하라, 모든 것을 걸고.”

    대중들에게 유명하지는 않지만, 나 역시 베이든에게 배워서 이미 알고 있는 가언이었다.

    단테 노아비크가 북쪽에 터를 잡으며 지정한 것으로, 악령을 불러들인 자신의 책임을 대대로 이어 가며 지키겠다는 의지의 표현이기도 했다.

    사실 단테 노아비크는 실험의 주도자였기 때문에 그가 마음만 먹었으면 악령을 불러들인 것을 숨길 수 있었다고 했다. 그저 자신과 상관이 없는 일이었다고 발뺌하면 그만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자기 자신에게 떳떳하지 않은 상태로 그럴듯하게 사는 삶을 경멸하여, 자신이 저지른 일을 책임지지 않는 것은 귀족이 아니라 단언하고는 스스로 가장 척박한 북쪽 땅으로 떠났다.

    자신이 벌인 일에 대해서는 반드시 끝을 맺어야 한다는 초대 가주의 명언은 노아비크 가문에 대대로 내려오는 삶의 태도였다.

    “공작님이 좋아하실 것 같죠?”

    레오는 조약돌에 새겨지는 가언을 보며 기대에 차서 속삭였다.

    “공작님은 노아비크의 이능을 정말 짙게 타고나셔서… 아마 가치관이 저 가언에 종속되어 있다시피 할 거거든요.”

    “글쎄. 적어도 ‘푸른 루비’ 포획 기원, 이런 걸 새기는 것보다는 낫겠지.”

    “아하하하하, 너무 재밌어요, 엘로이즈 님.”

    “…나 농담 아니었는데? 대체 어디가 웃긴 거야?”

    나와 레오가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며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가언을 새기고 있던 좌판 주인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아… 부모님께 드리는 선물이 아니었군요.”

    아무래도 상인은 레오가 ‘아버지’라고 하지 않고 ‘공작님’이라고 한 것을 두고 그렇게 말한 것 같았다.

    순간 레오의 어깨가 흠칫했다. 나는 부드럽게 그 어깨를 감싸며 물었다.

    “설마 받는 대상에 따라서 질이 달라지나요? 부모님이라면 좀 더 잘해 주시는 건가?”

    내 질문에 상인이 화들짝 놀라서 고개를 휘휘 저었다. 그러고는 기겁하며 황급히 말했다.

    “아뇨! 받는 대상이 누구든 최선을 다하지요! 허허허….”

    나는 부모가 없었기 때문에 진심으로 몰라서 물어본 건데 결과적으로는 상인의 입을 다물게 한 셈이 되었다.

    더 이상 물어봐도 제대로 된 답이 나올 것 같지는 않았다. 정말로 부모님께 해 드리는 거라고 하면 좀 더 잘해 주는 건지 혼자서 좀 궁금해하고 있는데 레오가 살그머니 귓속말을 했다.

    “혹시 엘로이즈 님도 제가 공작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지 않는 걸 이상하다고 생각하세요?”

    레오가 내게 이런 말을 한 것은 처음이었다. 떨리는 레오의 눈동자를 보니 혼자서 수많은 생각을 하고 있는 듯했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솔직히 대답했다.

    “아… 이상해해야 하는 거야? 사실 난 어릴 때부터 부모님이 안 계셔서 몰라….”

    레오가 나를 빤히 바라보다가 살짝 웃었다. 그러고는 상인이 건넨 완성된 조약돌을 소중히 받아 들었다.

    값은 우리를 따라 나온 기사가 치렀다. 나는 더 좋은 대답을 해 주지 못한 것에 대해 미안해하며 마주 웃어 보였다.

    “엘로이즈 님, 사실 비밀인데요….”

    그리고 내 웃음을 보며, 꽤 오랫동안 갈등하던 눈빛을 하고 있던 레오가 단숨에 내 귓가에 대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전 공작님의 아들이 아니에요.”

    심장이 쿵 떨어졌다. 요즈음 심해지고 있는 통증과는 별개로, 진심으로 당혹스러워서 몸이 반응한 것이었다.

    여기서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내가 잠시 얼어 있는데 레오가 이어 말했다.

    “그러니까 저랑 엘로이즈 님하고 공통점이 있는 셈이네요.”

    아까 내가 부모님이 없다고 한 것을 두고 하는 말인 듯했다. 나는 할 말을 고르다가 결국 바보 같은 질문을 하고 말았다.

    “어떻게… 어떻게 알았어?”

    다행히 레오는 내가 그 사실을 이미 알고 있다는 건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었다. 아마 뒤에 따라오는 기사들 때문에 표정을 관리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레오가 살짝 웃으며 대답했다.

    “공작님하고 함께 원로원을 속여야 하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저도 알아야 했어요.”

    나는 가만히 웃고 있는 여덟 살 소년을 바라보았다. 아마 원로원에서 이능을 시험받을 때 내가 알지 못하는 과정이 하나 더 있는 듯했다. 하긴, 노아비크는 벨리나아스처럼 요란하게 혈통을 증명하지 않으니 그 과정에 대해 내가 다 알 수 있을 리 없었다. 레오가 조용히 덧붙였다.

    “비밀이에요…. 공작님께서 아무한테도 말하면 안 된다고 했는데. 진짜 이 세상에서 나랑 공작님밖에 모르는 사실이에요.”

    나는 한숨을 쉬며 책망하듯 대답했다.

    “…그럼 나한테도 얘기하지 말았어야지. 사람을 그렇게 막 믿으면 안 돼. 페이건이나 세예나한테도 얘기 안 한 걸 왜 나한테 했어?”

    잠시 망설이던 레오가 조약돌을 만지작거리면서 말했다.

    “가족이잖아요, 엘로이즈 님은.”

    당연하다는 듯한 그 말에 나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가족’이라는 말이 또다시 심장을 세차게 두들겼다.

    “나랑 공작님만 아는 비밀을 가지고 있으면서, 이웃집 가족들보다 우리를 더 가깝게 여겨 달라는 건 불공평해요.”

    나름대로 논리 정연해서 뭐라고 대답하기도 어려웠다. 레오는 씩 웃으며 덧붙였다.

    “전 엘로이즈 님 믿어요. 엘로이즈 님이 절 살려 주시기도 했잖아요.”

    마음이 찡하고 울렸다. 난생처음 느껴보는 감각이었다.

    나를 믿어 달라고 하는 건 사치인 것을 알고 있었다. 실제로 나는 그들을 속이고 있었다.

    파랗고 맑은 하늘 아래, 그 누구에게도 의심받지 않고 레오와 함께 다른 사람들처럼 축제를 구경하고 있지만 사실 나는 떳떳하지 않았다. 나는 아직도 1급 현상범인 ‘푸른 루비’이고, 정말 나 자신으로 존재한다면 당장 체포될 운명이었다. 결혼 전 내가 가진 신분증은 위조였고 ‘엘로이즈 르노아로’라는 이름 자체도 가짜였다.

    본질적으로 나는 아무 생각 없이 축제를 즐기는 저 평범한 사람들이 될 수 없다. 하다못해 시온과 빈센트의 등장에도 ‘혹시나 무언가 들키지는 않을까.’ 하며 불안해해야 하는 처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오는 아무렇지도 않게 나를 믿는다는 말을 하며 비밀을 속삭여 주었다.

    이상하게 울컥하는 기분이 들었다. 레오에게 절대로 이래서는 안 된다고, 다른 누구에게도 그 사실을 말하면 안 된다고 더 다짐을 해야 하는데도 알 수 없이 목이 메어 왔다.

    “…하지만.”

    나는 어렵게 말문을 열었으나 결국 할 말을 찾지 못해 입을 다시 다물어 버렸다. 상대가 어리기 때문에 더 말하기 어려운 것들도 있는 법이었다.

    상식적이고 올바른 대답을 해 주고 싶은데 그걸 알지 못해 더 답답했다.

    특히나 이런 가족 문제에 대해서는 내가 아는 것이 별로 없어서, 괜히 이상한 소리를 하는 바람에 레오에게 상처가 될까 봐 더 조심스러웠다. 내가 눈만 굴리고 있는데 레오가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근데 제가 노아비크 가문의 사람은 맞는 것 같아요. 어쨌든 이능이 측정되기도 했고, ‘보물의 방’도 들어갈 수 있거든요. 그리고 ‘최상급 악령’도 느낄 수 있는 걸 봐서… 아마 노아비크 직계는 직계일 거예요.”

    “아… 그래?”

    “공작님은 절대 말씀 안 해 주시지만… 제가 선대 공작님의 사생아가 아닐까 싶긴 해요. 떳떳한 공작님의 동생이라면 왜 저를 자식으로 숨기시겠어요.”

    “아하하….”

    “그래도 제가 성인이 되면 말씀해 주시기로 약속했어요.”

    레오는 자신의 부모가 레이나와 오베딘일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 하고 있는 듯했다. 하기야, 약혼도 하지 않고 사망한 선대 공녀보다는 선대 공작님의 사생아가 조금 더 가능성 있는 이야기기는 했다.

    ‘디에고가 자신을 노리고 있다는 것을 모르니까…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구나.’

    그리고 선대 노아비크 공작님의 명예에는 조금 죄송스럽지만, 내가 레오에게 친부모를 알려 줄 수는 없었다. 모든 일이 다 끝나고 안전해지게 된다면 모를까. 그런 의미에서 요하네스가 ‘성인’이라고 기한을 못 박아 준 것은 꽤 합리적인 방안이었다.

    여덟 살 아이는 아무리 조숙하다고 해도 아이다. 요하네스와 그토록 ‘단둘만 아는 비밀’이라고 약속을 했는데도 시온과 빈센트의 등장에 경쟁심을 느끼고 내게 비밀을 말해 버린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그러므로 미래를 위해 최대한 위험한 요소는 막아 두고 싶었다.

    “어쨌든 나한테 말한 건 별로 좋지 않은 선택이야, 레오.”

    나는 그래서 걱정스러운 눈으로 레오의 머리카락을 쓸어 주며 말했다.

    “앞으로 나 말고 가족으로 두고 싶은 다른 사람이 나타난다고 해도, 그 사람에게도 말하지 마. 알겠지?”

    내 말에 레오가 미간을 찌푸리며 단박에 대답했다.

    “…그런 사람 없는데요.”

    “응?”

    “엘로이즈 님 말고, 가족으로 두고 싶은 사람 없다고요. 그런 사람이 생길 이유가 어디 있겠어요.”

    나는 그 완강함을 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누가 삼촌과 조카 아니랄까 봐 이럴 때에 순간적으로 선득한 표정을 짓는 게 꼭 요하네스 같았다.

    하지만 스물다섯 살 생일이 얼마 남지 않은 입장에서, 나는 ‘언제나 내가 너와 영원히 함께.’ 같은 말을 더 이상은 할 수가 없었다.

    오히려 아무 생각 없이 북부로 간 초창기에는 그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할 수 있었는데, 주변 사람들이 소중해지면 소중해질수록 더더욱 모든 미래를 보장하는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진심을 준 상대에게는 어쩔 수 없이 거짓말을 하기가 어려워지는 법이었다. 그건 나 스스로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나는 레오가 싫어할 것을 뻔히 알면서도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그래도 사람 일은 모르는 거고, 요하네스가 나 외에 다른 여자를 데려올 수도 있….”

    “이런.”

    그러나 내 말은 그대로 끊겨 버렸다. 어느새 나타난 요하네스가 퉁명스럽게 끼어들었기 때문이다.

    “부인께서 나를 불한당으로 만들고 계시는군. 이러니 바쁜 와중에도 틈만 나면 쫓아올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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