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4화 (35/65)
  • 저절로 올려다볼 수밖에 없는 거대한 탑 위, 붉게 물든 꽃, 화려한 옷을 입은 황태자 그리고 그 뒤를 가득히 메운 제복 차림의 황실 기사단….

    가만히 보고만 있어도 압도당할 것 같은 모습이었다. 디에고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원래 건국제의 시작은 황제 폐하께서 직접 알려야 하는 것이지만, 모두 알다시피 황제 폐하께서 병환이 깊어 내가 이 자리에 서게 되었다.”

    또렷하고 크게 들리는 목소리였다. 내가 놀라서 요하네스에게 물었다.

    “아니, 저 높이에서 어쩜 저렇게 목소리가 크게 전달될 수 있죠? 소리를 지르고 있는 것 같지도 않은데요.”

    “목소리를 증폭하는 마정석이 탑 꼭대기에 있어.”

    요하네스는 담담한 표정으로 차를 마시며 낮게 설명했다.

    “마정석은 특수한 힘을 받아서 다른 힘으로 바꾸는 식으로 작동하지. 예를 들어 황궁에 있는 가장 큰 마정석은 달빛을 받아서 빛을 만들어 내.”

    “아아, 네.”

    “탑 꼭대기에 있는 마정석은 벨리아나스의 기운을 받아 소리를 증폭해 준다고 해. 그래서 벨리아나스 황족이 탑에 올라 마정석을 작동시키면 광장 사람들에게 그 목소리가 들리지.”

    “그렇군요.”

    나는 눈을 깜빡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부루퉁한 목소리로 말했다.

    “벨리아나스의 이능은 겉보기에 엄청 화려하네요. 모든 것이 비밀리에 이루어지는 노아비크와는 다르게.”

    요하네스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빛과 그림자의 관계이니 어쩔 수 없지. 그건 신께서 정해 두신 거야. 벨리아나스는 빛, 노아비크는 그림자.”

    “듣는 그림자 되게 기분 나쁘겠네요.”

    “글쎄.”

    나는 툴툴거리고 있는데, 정작 디에고를 올려다보는 요하네스의 얼굴에는 별다른 감정이 실리지 않았다.

    “아직 책임이 남아 있으니 어쩔 수 없지.”

    요하네스가 말하는 ‘책임’이란 악령을 이 세계로부터 다시 없애는 것이었다. 사실 오랜 시간이 흐르면서 그 누구도 기대하고 있지 않지만, 오히려 악령이 나타나는 이 세계에 이미 모두 적응하고 있지만… 어쨌든 노아비크는 그 사명을 잊지 않고 있었다.

    그들이 제국의 최북부에서 악령을 막을 동안, 부디 벨리아나스와 신전이 힘을 합쳐 악령을 이 세계에서 몰아내 주기를.

    ‘정반대의 결과가 나오고 있는 것 같기는 하지만….’

    내가 속으로 혀를 차며 생각할 동안 디에고의 연설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제국이 자리 잡은 이후 항상 벨리아나스는 제국민을 위해 왔으며, 그건 악령의 출현 이후에도 변함없다고…. 유려한 목소리가 광장에 울려 퍼질 동안 사람들은 정신없이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어쨌든 에드먼드 3세의 통찰력은 아주 훌륭했지.”

    요하네스가 담담하게 말했다.

    “그 뒤로 오랜 시간이 흐르는 내내, 벨리아나스는 손쉽게 권위를 세우고 사랑을 받게 되었으니 말이야.”

    그 말은 정확히 맞아서, 디에고가 연설을 끝내자마자 다시 한번 수도는 환호성으로 물들었다.

    “‘꽃의 탑’은 누구나 평상시에 출입이 가능하지. 당분간 건국제를 구경 온 지방 사람들도 열심히 ‘꽃의 탑’을 오르겠군.”

    “아.”

    나는 요하네스의 말을 이해하고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수많은 사람들이 ‘꽃의 탑’에 오르고 색깔이 변하지 않는 ‘벨리아나스의 꽃’을 직접 보며 황족에 대한 경외심을 다시 한번 키울 것이다.

    신께서 내리신 이능으로 끝끝내 악령을 이 땅에서 물리쳐 줄 위대한 황족에 대한 정당성을 마음 깊이 새기며.

    “어쨌든 멋있어요.”

    디에고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레오가 순진하게 말했다.

    “저 꽃을 붉게 물들일 수 있는 벨리아나스의 직계는 이제 이 세상에서 디에고 황태자 전하 한 분뿐이잖아요.”

    요하네스는 레오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살짝 웃으며 레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저기 올라가고 싶다는 말은 하지 마라. 건국제 내내 저 탑은 사람들로 북적일 테고, 네 다리로는 중간도 못 가서 지칠 테니까. 그렇게 되면 중간에 밑으로 내려오지도 못해.”

    물론 아이들은 하지 말라고 하면 더 하고 싶어 하는 법이었다. 특히나 ‘넌 중간도 못 가서 지친다’라는 말에 레오의 눈이 호승심으로 번쩍였다.

    “레오, 난 죽어도 저기 못 올라가. 진짜야.”

    나는 황급히 레오의 손을 붙잡으며 말했다.

    “근데 레오는 건국제 내내 나랑 함께 구경해 줄 거지? 이런 큰 축제는 처음이라 난 매일같이 구경할 건데. 어차피 공작님은 바빠서 나랑 놀아 주지도 못할 거라고.”

    급히 뱉은 말이지만 나름대로 상당히 합리적인 제안이었다. 요하네스가 바쁜 건 누구나 아는 사실이었고, 나는 진심으로 열심히 건국제를 구경할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연회에 다녀오니 다들 왜 그렇게 행사를 좋아하는지 알 것 같았다. 볼 것도 많고 화려해서 재미있었다. 얼마 후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니 남들이 즐기는 건 다 경험해 보고 싶기도 했다.

    “매일 바쁜 건 사실이지만.”

    요하네스는 조용히 웃으며 말했다.

    “그래도 짬을 내어 가능한 시간마다 함께하도록 하지.”

    레오가 함박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꽃의 탑’ 같은 것은 이미 모두 잊었다는 얼굴이었다.

    밝게 웃는 레오의 뒤로 연설을 마친 디에고가 ‘꽃의 탑’을 내려오고 있었다. 디에고가 탑에서 멀어지면서 ‘벨리아나스의 꽃’은 다시 흰색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 ⚜ ⚜

    그렇게 건국제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대신전에서는 시간에 맞추어 대귀족들을 받았고, 거리마다 즐거운 기운이 넘쳐났다.

    한낮에도 삼삼오오 모여서 술을 마시는 사람들이 온갖 축사를 퍼부어 댔다. 나는 건국제 첫날 레오와 약속한 대로 둘이서 함께 종종 거리에 나가서 이것저것 열심히 구경했다. 어차피 노아비크가 신전에 방문하는 날은 폐회식의 바로 전날이었던 것이다.

    ‘꽃의 탑’은 ‘벨리아나스의 꽃’을 한 번 만져 보고 싶어 하는 사람들로 인해 나선형 계단이 꽉 차 있었지만, 디에고가 탑에서 내려간 뒤 단 한 번도 ‘벨리아나스의 꽃’은 붉게 변하지 않았다. 그리고 모두가 ‘꽃의 탑’을 보면서 벨리아나스가 악령에게서부터 제국민들을 보호해 주겠다는 디에고의 연설 내용을 다시 한번 되새겼다.

    ‘뭐, 높아서 다행이지. 어쨌든 레오가 쉽게 저 탑을 올라갈 수는 없을 테니까.’

    나는 하늘을 찌를 듯이 높은 탑을 올려다보며 혼자 생각했다. 탑 꼭대기에도 사람들이 이미 꽤 많았다.

    레오가 저 탑에 오르면 벨리아나스의 혈통을 증명할 수 있겠지만… 디에고가 황실을 다 장악한 지금, 그 사실을 밝혀 봤자 레오에게 좋을 건 하나도 없었다.

    디에고 역시 그 사실을 알아서 레오를 수도로 부른 것이리라. 완벽히 중앙을 통제하고 있다는 자신감의 발로였다.

    ‘요하네스가 레오를 어떻게든 보호할 거라는 걸 아는 거지…. 레오의 혈통이 우리의 유일한 약점이라는 것도 알고 있고.’

    그 내막을 모두 알고 있는 나는 거리에서 디에고 벨리아나스를 찬양하는 목소리를 들을 때마다 구역질이 날 것 같았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건 없어서, 그냥 최선을 다해 ‘꽃의 탑’을 바라보지 않으며 무심하게 굴었다.

    어쨌든 그것만 빼면 건국제는 꽤 재미있었다.

    길거리에서 파는 장신구들은 거의 모두가 다 조악했고 음식들은 비위생적이었으나 그 나름대로의 재미가 있었다.

    요하네스도 그때 말한 것처럼 바쁜 와중에 동행해 주곤 했지만 그건 아주 가끔이었다. 그는 알 수 없는 일들을 항상 처리 중이었으니까.

    어느 날 요하네스가 없는 사이 그의 집무실에 들렀다가 우연히 서류 앞부분을 본 적이 있었는데, 그것만 해도 곧 들어온 페이건이 화들짝 놀라면서 세상이 멸망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으앗, 하필 왜 제가 화장실에 아주 잠깐 다녀온 사이에! 마, 마, 마님, 혹시 이 서류를 본 건 아니시지요? 예?”

    “응, 한 글자도 못 봤어. 정말로.”

    “예…. 사실 별 건 아닌데요, 음, 정말 못 보신 것 맞죠? 네?”

    “못 봤다니까.”

    “정말요? 정말이십니까? 저희에게는 정말 중요한 문제입니다.”

    “내 오빠인 시온 르노아로의 명예를 걸고, 단 한 글자도 못 봤어.”

    대놓고 요하네스가 나를 회의에 참석시켰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신뢰가 완전하지 않은지, 페이건은 심각한 표정을 지어 보이면서 몇 번이나 확인했다.

    페이건에게 못 봤다고 하기는 했지만 사실 보고서의 제목은 보았었다. 시온 르노아로에게 명예랄 건 없으니 그걸 거는 거야 내게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다만 대체 왜 그런 보고서를 뽑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뭐, 봐도 아무것도 모르겠던데…. 수도의 유명한 의상실 목록은 대체 왜 뽑아 놓은 거지?’

    여하튼 그 일화 외에도 아직 요하네스와 그 측근들은 내게 숨기는 것들이 많았다.

    상식적으로 요하네스가 여자들이 옷을 맞추는 그런 의상실에 관심이 있을 리가 없었다. 눈에 띄게 당황하는 페이건을 볼 때 분명 무언가의 눈속임인 것 같은데.

    ‘…뭐… 그래도 이번 일이 잘 해결되면 그땐 정말 내 편이 되어 주겠지.’

    그래 봤자 ‘시간의 돌’을 얻는 과정 중 일부이지만 그래도 그들이 나를 믿어 주었으면 했다. 정체를 숨기고 있는 주제에 과한 바람인 건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나를 완벽하게 믿지 못해도 서운하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내가 쓸모를 확실히 보여 주면 돼. 에이스마저도 내가 쓸모가 있다고 판단하니 어떻게든 데리고 있었잖아.’

    어쨌든 노아비크 공작가가 대신전에 들어가는 날이 계획의 시작이었으므로, 매일같이 이어지고 있는 건국제는 내 마지막 여유이기도 했다. 그리고 역설적이게도 그 뒤로 이틀만 흐르면 내 스물다섯 번째 생일이었다.

    “귀족 나리들! 여기 오십시오! 가언을 아주 멋있게 써 드립니다!”

    레오와 함께 거리를 걷고 있는데 우리가 귀족인 것을 알아챘는지 누군가 곁에 다가와 잽싸게 호객 행위를 했다. 보아하니 돌에다가 예쁘게 가훈을 새겨 주는 좌판의 상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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