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3화 (34/65)

나는 그를 빤히 바라보다가 피식 웃었다. 그래, 시온의 입장에서는 정말이지 거지 같은 말일 것이다. 요하네스 노아비크는 어쨌든 ‘푸른 루비’의 숙적이니까.

분위기가 조금 무거워지자, 갑자기 시온이 발랄한 목소리로 바꾸어 장난스럽게 웃었다.

“…내가 여자로 태어났으면 더 쉬웠을 텐데 말이야.”

“응?”

“사실 내가 너보다 더 예쁘고 귀엽잖아. 키도 크고.”

시온의 진지한 말에 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곧바로 대답했다.

“예쁜 건 인정하지만 귀여운 건 내가 좀 더 귀엽지 않아? 넌 너무 능글맞아.”

우리는 기가 막히다는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다가 피식 웃고 말았다. 진심이야 이미 전해진 것이고, 나는 그저 최선을 다할 뿐이었다.

때마침 빈센트가 들어왔다. 빈센트는 트레이에 온갖 음식을 다 차려 왔는데 시온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을 정도로 많은 양이었다. 우리의 질린 표정을 보며 빈센트가 어깨를 으쓱했다.

“너 배고프다며.”

배고프다는 게 굶주려 있다는 뜻은 아니었는데, 마치 그 한마디로 모든 것이 설명된다는 어조였다.

나는 킬킬 웃으면서 소시지 하나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그들에게 긴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연회에서 있었던 일과, 요하네스의 최측근들과 함께 세운 계획이며, 또 ‘에이스’의 뒤에 디에고가 있었다는 것까지.

놀랍게도 시온과 빈센트 모두 디에고가 ‘에이스’의 후원을 받았다는 사실에 딱히 충격을 받지 않았다. 황족에게 로비하고 있는 건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이었다. 그 사람이 황태자 자리까지 올라갔다는 건 좀 환멸스럽지만 말이다.

나는 모든 것을 설명하고 나서 나 자신을 다독이듯 말했다.

“어쨌든 대신전에 들어갔을 때 잘하기만 하면 돼. 그때 잘 해내면 정말로 모든 게 끝나고, 요하네스는 내 부탁을 들어줄 수밖에 없을 거야.”

그가 정말로 건국제 동안 사랑에 빠져서 내게 ‘시간의 돌’을 주거나, 아니면 내 활약에 답해야 한다는 책임감으로 주거나.

둘 중 하나는 어쨌든 이루어질 것이다. 나는 그만큼 나를 믿고 또 요하네스를 믿었다.

물론 계획을 성공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당연한 일이었다. 내 회귀의 일차적인 목표는 레오를 살려 내는 것이었다. 요하네스의 ‘시간의 돌’을 빼앗아 내가 회귀한 셈이었으니까.

그러니 내가 혹시나 스물다섯에 죽는다고 해도, 그 이후까지 레오가 건강히 잘살 수 있도록 모든 위험 요소를 제거해 주고 싶었다. 심지어 디에고가 악령을 지배하는 세상은 내가 죽더라도 오게 하고 싶지 않았고.

“그러니까 난….”

나는 손가락을 꼬물거리며 천천히 다짐하듯 말했다.

“난 정말로 잘 해낼 거야. 어떻게든.”

그리고 싱긋 웃으며 덧붙였다.

“시온, 빈센트. 나 소원이 있는데 하나 들어주면 안 돼?”

내 부탁이라면 제국이라도 줄 것 같은 표정의 그들을 보면서 가볍게 이어 간 말은 나름대로 간절한 것이었다.

“1년 뒤에 나 스물여섯 번째 생일상 좀 차려 주라. 이것보다 더 소박해도 되는데, 꽃이랑 케이크는 꼭 포함해서.”

말하고 나니 꼭 그렇게 될 것만 같았다.

그를 주겠다고 약속했고, 또 사랑해 주면 안 되겠느냐는 내 말에 키스로 화답했으니 아마 그도 나를 사랑하려고 노력해 볼 것이다.

그게 결국 안 된다고 하더라도, 대신전에서 20년 전 요하네스가 죽였던 최상급 악령의 심장만 다시 찾아오면 될 일이었다. 결국 요하네스의 계획에서 나는 꽤 중요한 역할이었으니까.

시온과 빈센트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고, 나는 결연한 표정으로 시온이 준 찻잔 세트를 들고 다시 공작저로 돌아갔다.

방에 도착한 뒤 찻잔 세트를 선반 위에 올려 두었다.

그러면서도 이 찻잔을 쓸 일은 없을 것이라고 몇 번이나 되뇌었다. 나는 무조건 성공할 거고, 요하네스는 약속을 지킬 거니까.

따끔하게 죄어드는 심장의 통증은 회귀 전 딱 이맘때 그랬던 것처럼 잦았다. 익숙해진 통증이라 밖으로는 전혀 내색하지 않을 수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무렇지 않은 건 아니었다.

이제는 이 통증이 내게 언제까지나 요하네스의 곁에서 순진한 아내로 남아 있을 수 없다는 것을 경고하는 듯했다. 어쨌든, 끝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리고 내 사정과는 상관없이 시간은 고요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푸른 루비’는 공식적으로 아주 오랫동안 활동하지 않았다. 그리고 ‘푸른 루비’가 없는 세상은 평화롭기 그지없었다. 요하네스를 제외한 아무도 ‘푸른 루비’를 찾지 않았고 궁금해하지도 않았다.

결국 ‘푸른 루비’가 죽더라도 그에 의미를 두는 사람은 요하네스 노아비크밖에 없으려나.

이상하게 씁쓸해서 피식 웃다가 무심코 책상에 시선을 돌린 나는 약간 질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역시….”

이전에 요하네스에게 언급한 대로, 내가 자리를 비운 새에 내 책상에는 수도 귀족들의 초대장이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연회 때 나와 제대로 친분을 쌓은 귀족들이 없었기 때문에 더더욱 사람들의 호기심이 커진 듯했다.

아무래도 대귀족들은 건국제 기간 중 한 번은 신전에 불려 가야 했기 때문에, 대다수 티 파티 초대장은 건국제 뒤쪽 날짜로 잡혀 있었다.

“…천천히 답장해도 되겠네. 괜히 요하네스에게 투정 부렸나?”

이런 건 영원히 못 갈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애써 무시하며 일부러 발랄하게 혼잣말을 했다.

“그동안 건국제나 즐겨야지.”

요하네스는 일을 보는지 집무실에 있는 것 같았고, 나는 천천히 창가에 혼자 앉았다. 건국제 준비로 수도 전체가 부산스러웠다.

오랜만에 열린 축제에 사람들이 벌써부터 행복한 표정으로 길거리를 돌아다녔다. 회귀 전에는 볼 수 없었던 풍경이었다.

본격적인 작전은 건국제 끝에서나 이루어질 예정이었으므로, 남은 건국제의 며칠 동안은 나 역시 그저 즐기면 되는 셈이었다. 저 사람들 속에 섞여서, 평범하고 특징 없게. 요하네스는 아까처럼 내게 한없이 달콤하게 굴어 줄 테고 레오는 뿌듯하게 웃고 있겠지.

나는 한참 동안이나 가족 혹은 연인들과 함께 기대감에 차서 깔깔 웃는 사람들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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