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2화 (33/65)

“뭐….”

정말 거지 같은 조언이라며 화를 내려고 했었는데 결과적으로는 성공한 것 같았다. 요하네스는 오늘 아침 ‘네 뜻대로 모두 되었다’를 내게 확실히 알려 준 셈이니까.

“…대충? 어쨌든 앞으로 함께 행동하자는 제안을 받았으니까.”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뿌듯함을 감추지 못하고 자랑스럽게 말했다.

“오늘은 집무실에서 측근들이랑 함께 작전도 짰어. 건국제 행사에 나와 요하네스가 대신전에 방문하거든.”

시온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가 턱을 괴고 있는 자신의 긴 손가락으로 볼을 툭툭 두드리면서 못마땅하다는 듯이 말했다.

“글쎄, 유혹에 성공했다면 굳이 그런 일까지 열심히 하지 않아도 되는데.”

“아냐, 열심히 하고 싶어.”

얼른 ‘에이스’의 뒤에 디에고가 있었다는 말을 하고 싶었지만 이 말은 빈센트가 있을 때 하고 싶었다. 우리 모두 피해자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디에고가 하는 일들을 진심으로 막고 싶거든. 세상에… 그 인간이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지 알면 기절할걸. 이따 빈센트가 오면 말해 줄게.”

“흠, 엘로이즈.”

시온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네가 단단히 유혹당한 건 아니겠지, 설마.”

그리고 내가 대답하기도 전에 진지한 눈으로 경고했다.

“잊지 마. 상대를 유혹해서 원하는 것을 얻고자 하는 전략은 우리만 세울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걸.”

시온이 무엇을 걱정하는지는 알 것 같았다. 하지만 만일 요하네스가 나를 이용한다면 나는 이용당해 줄 의향이 충분히 있었다. 그는… 그는 나를 이용하더라도 꼭 대가를 치를 사람이었으니까.

어린 날 한 번 마주친 여자애를 못 잊어서 평생을 죄책감에 산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을 믿지 않으면 누구를 믿는단 말인가.

“엘로이즈, 빈센트가 오기 전에 내 말 잘 들어.”

시온은 내게 몸을 기울이며 미간을 찌푸렸다. 왜 ‘빈센트가 오기 전에’라는 조건이 붙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가 냉담하기까지 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비밀을 감춘 사랑은 아무리 불타오르더라도 끝이 있을 수밖에 없어.”

“뭐야.”

나는 어이없다는 눈으로 시온을 바라보았다.

“불타오르면 언젠가는 끝이 있겠지, 무슨 당연한 소리를….”

순간적으로 시선이 부딪혔다. 시온은 잠시 눈을 깜빡거리더니 혼자서 깔깔거리며 웃었다. 순간 조용한 응접실에 시온의 웃음소리가 커다랗게 울렸다.

내가 팔짱을 끼고 고요히 그 모습을 보고 있는데 시온이 천천히 웃음을 그치며 말했다.

“그래, 내가… 내가 괜한 소리를 했다.”

“조언을 할 거면 똑바로 해. 추상적인 말 너무 섞으면 이해하기 힘드니까.”

내가 짧게 빈정대자 시온이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명심하지. 앞으로는 꼭 구체적으로 말해 줄게. 아, 말 나온 김에….”

시온은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벌떡 일어나 응접실 구석에서 커다란 상자를 꺼냈다.

“결혼 선물이야.”

“어머.”

예상도 안 했던 선물이라 나는 진심으로 깜짝 놀랐다. 상자를 열어 보니 고급스러운 찻잔 두 개가 들어 있었다. 얼핏 보기만 해도 남부 특유의 화려한 색채가 돋보였다.

“아니, 뭐 이런 걸….”

시온이 내 결혼을 진심으로 축하할 일은 없다는 걸 뻔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내 얼굴에는 거짓 웃음조차 걸리지 못했다. 심지어 찻잔이라니, 나와는 정말 어울리지 않는 선물이었다. 나는 차에 전혀 취미가 없었기 때문이다.

내가 미심쩍다는 표정으로 상자 안을 들여다보고 있는데 시온이 조심스럽게 찻잔 중 하나를 직접 들어 보였다.

“자, 여기 암사자가 그려져 있는 것이 신부의 찻잔. 그리고 수사자가 그려져 있는 것이 신랑의 찻잔.”

시온이 든 찻잔에는 암사자가 그려져 있었다. 나는 그제야 무늬를 자세히 보며 신기하다는 어조로 물었다.

“아… 부부가 쓰는 전용 찻잔이야?”

“어. 요즈음 남부에서 결혼 선물로 유행하고 있는 거야.”

또 그렇게 보니 왠지 의미가 있어 보여서, 나는 홀린 듯 상자에 아직 남아 있던 수사자가 그려진 찻잔을 꺼내 들었다. 찻잔 바깥쪽에서 수사자의 갈기가 귀엽게 흩날리고 있었다. 시온이 씩 웃으며 말을 이었다.

“부부가 여기에 차를 나누어 마시면 영원히 함께 행복할 거라는….”

“…전설이라도 있어?”

내 순진한 질문에 시온이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아니. 상술이 있지.”

하긴, 남부는 그런 전설이 오래도록 남아 있을 정도로 근본 있는 동네가 아니었다. 기본적으로 남부 사람들은 거의 다 뜨내기들이었기에 한곳에 정착하기보다는 돈을 쓰면서 여기저기 유람하는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어때, 그래도 재미있었어?”

시온은 실실 웃으며 들고 있던 찻잔을 다시 상자 속에 조심스럽게 넣었고, 나는 괜히 수사자 그림을 만지작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뭐… 나름대로 괜찮네.”

생각해 보면 딱히 대단한 이야기도 아닌데, 그래도 요하네스와 내가 나눠 가진 첫 번째 물건이라 생각하니 이상하게 재미있는 것 같기도 했다. 내가 계속 찻잔을 들고 있는 것을 한동안 바라보고 있던 시온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만일 요하네스에게서 도망쳐야 할 시기가 온다면 너도 이렇게 말해. 흥미롭잖아.”

순간적으로 대화의 분위기가 완전히 바뀌어 있었다. 나는 찻잔을 쥔 채로 눈을 깜빡였다.

“…어?”

“그 수사자가 그려진 찻잔 안에는 비상이 발라져 있거든.”

순간 그 찻잔을 떨어트릴 뻔했지만 간신히 평정심을 찾았다. 그러고는 긴장해서 물었다.

“비상… 그렇다면 독 말하는 거야?”

내가 충격받은 얼굴로 시온을 바라보는데 그가 느긋하게 말을 이었다.

“따뜻한 물을 부으면 사람을 즉사시킬 수 있는 독이 되고, 차가운 물을 부으면 몇 시간은 쓰러트릴 수 있는 수면제가 되지.”

그러니까 독과 수면제 중 내가 선택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요하네스가 내가 어떻게 차를 타든 얌전히 마셔 준다면 말이다.

“뭘 선택할지는 네 맘이지만 어쨌든 요하네스에게서 벗어날 수 있는 기회를 만들 수 있다는 얘기야. 그걸 쓰고 넌 여기로 도망쳐 오면 돼. 네 은신처 봤지?”

“…….”

“당연히… 정말 최악의 상황에 닥쳤을 때 쓰라고 주는 거야.”

그건 당연했다.

시온이 건네준 찻잔은 누가 봐도 남부에서 온 물건이었으며, 다시 말하면 공작저 사람들에게 ‘내가 바로 외부에서 온 수상한 찻잔입니다’라고 크게 외치는 듯 보일 터였다.

시온은 바로 그 허점을 노린 것이었다. ‘수상한 짓을 해 봤자 바로 들킬 물건’을 줌으로써 일단은 별일 없을 때 의심을 거두게 만들고, 들켜도 좋으니 일단은 도망쳐야 할 때가 오면 그때 쓰라는 의미였다.

“대신전에서마저 네가 그에게 도움이 된다면, 아마 요하네스는 네가 건네주는 차를 마실 거야. 널 완전한 네 편이라고 생각하거나, 아니면 널 유혹하는 데 성공했다고 생각할 테니까.”

“…….”

“미신을 믿는 순진한 남부 아가씨라고 생각해서 귀엽게 여겨 한 모금 정도는 마셔 주겠지. 안 마셔 주더라도 어쩔 수 없어.”

시온은 잔잔하게 미소 짓고 있었지만 눈이 어느 때보다도 차갑게 빛났다.

“이걸 쓴다는 건, 어차피 네가 극한으로 몰렸다는 이야기니까.”

나는 조심스럽게 내가 들고 있던 찻잔을 상자 속에 내려놓았다. 손잡이가 유려하게 맞물리며 찻잔 두 개가 상자 속에서도 영롱하게 빛났다.

가만히 찻잔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말했다.

“…잘 쓸게, 고마워.”

내 짧은 감사 인사에 시온이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역시 이 선물을 쓸 일이 생기지 않기를 바라는 눈치였다. 하기야, 이 찻잔을 쓴다는 건 그의 말대로 최악의 상황이 닥쳤다는 뜻이니까.

“정말… 고마워.”

나는 조용히 상자를 덮고 옆에 두었다. 내 볼에 닿았던 입술의 감각과 그때의 두근거림이 여전히 선연한데, 그를 죽일 수 있는 물건을 곁에 두는 심정이 묘했다. 심장이 따끔거렸다.

어쨌든 시온이 이런 걸 준비했다는 건 나를 많이 걱정한다는 뜻이었으니 감사를 표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회귀 전 삶에서도 시온은 어쨌든 끝까지 내 옆에 있어 주었다. 굳이 수도에 있을 필요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어떻게든 마지막을 지켜 주겠다고. 시간을 돌리고 환경을 바꾸어도 어쨌든 시온은 똑같이 행동하고 있었다.

“엘로이즈.”

그가 약간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넌… 뭐, ‘에이스’에서 계속 갇혀 있어서 몰랐겠지만 나와 빈센트는 아주 오래전부터 널 동료로 생각했어.”

“동료?”

“그래. 사실 우리 계획은 네가 아니면 실현될 수 없는 거였고…. 뭐, 네게는 너무 쉬운 총 한 발이었겠지만 우리는 그게 되게… 그러니까, 기적 같았단 말이야.”

시온은 그답지 않게 말을 뚝뚝 끊었다. 언제나 능글맞게 대화를 주도했던 것과는 달리 조금 긴장한 것 같기도 했다.

“당연히 우리는… 널 끝까지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젠장, 근데 네게 받기만 하고….”

‘에이스’에서 나온 뒤 내가 악령 몇을 처치해서 보석을 쥐여 준 것에 대해 말하는 듯했다. 내가 뭘 그런 것 가지고 그러냐는 듯이 헛웃음을 치자 시온이 옅은 한숨을 쉬었다.

“사실 네가 그 이후에 악령을 몇 마리 죽이지만 않았어도… 넌 그냥 ‘에이스’가 폭발할 때 같이 죽었다고 생각될 수도 있었잖아. 빌어먹을 요하네스 노아비크도 널 포기하고 말이야.”

나도 그 생각을 안 한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래도 나는 후회하지 않았다. 시온과 빈센트에게 나름대로 빚을 졌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순수한 호의로 그들이 처음부터 부유하게 시작할 수 있는 시초를 만들어 주고 싶었다. 그러므로 ‘에이스’ 몰락 이후 악령을 죽인 것에 대해서는 여전히 잘한 결정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니 난 그냥… 네가 꼭 오래 살았으면 좋겠고, 어떻게든 도와주고 싶은 거야.”

시온이 머리카락을 헤집으며 덧붙였다.

“요하네스 노아비크를 유혹하라는 거지 같은 말을 내 입으로 내뱉으면서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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