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1화 (32/65)

그 말에 반응한 사람은 페이건이었다. 페이건이 눈을 가늘게 뜨고 미심쩍다는 듯이 반문했다.

“뜬소문?”

“뭐….”

제프는 눈을 굴리며 자신 없다는 듯 빠르게 중얼거렸다.

“‘에이스’도 사람 사는 곳이었는데, 핍박당하고 있다고 해서 아무 말도 안 하고 사는 건 아니니까요. 그럼 더 불행해지지 않습니까.”

요하네스는 가만히 그를 바라보았다. 문득 생각나는 장면이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이 집무실에서 청혼한다며 갑자기 들이닥쳤던 여자가 했던 말이었다.

“그럼 북부 사람들은 아예 안 웃나요? 환경이 삭막하다고 해서 웃지도 않으면 더 우울해질 텐데. 그럴 때일수록 더 긍정적이고 즐겁게 하루하루를 살아야 돼요.”

처음에는 아무 고생 안 하고 자란 남부의 귀족 영애나 할 법한 소리라고 생각했는데, 사실 인생의 진리를 담고 있었던 말이었던 것 같기도 했다. 하기야, 엘로이즈의 말들은 묘하게 허술하면서도 늘 무언가의 본질을 꿰뚫곤 했었다.

“음… 그런 건 정보로 쳐주시지 않는다면 어쩔 수 없습니다만….”

제프가 시무룩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자 요하네스는 옅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한번 말해 봐. 뜬소문이라도.”

“그게….”

마른침을 한 번 삼킨 제프는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금화가 욕심나서 일단은 말을 꺼냈지만, 요하네스가 만만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다시 한번 상기했는지 잔뜩 주눅 든 모습이었다.

“일단 ‘푸른 루비’는 아름다운 여인이라는 소문이 있었습니다. 그 아름다움에 간부들의 눈이 멀어 버릴까 봐 라르딘 님께서 제한된 사람들만 접촉하게 했다고 합니다.”

‘아름다운 여인’이라는 말에 페이건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동안 항상 ‘푸른 루비’는 근육질의 중년 사내일 것이라고 언제나 생각해 온 탓이었다.

그러나 오히려 요하네스는 ‘여인’이라는 말이 그다지 놀랍지 않은지 눈을 더 날카롭게 빛내고 있을 뿐이었다. 진지한 요하네스의 얼굴을 흘끗 보며 제프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그런데 그 불꽃놀이가 예정되어 있던 그날 자정… 주방에서는 파티 음식을 만드느라 정신이 없었는데….”

“잠시.”

요하네스가 미간을 찌푸리며 끼어들었다.

“불꽃놀이?”

“예. 그날이 원래 라르딘 님의 생신이라서… 화려한 불꽃놀이가 예정되어 있었습니다. 화약이 폭발하는 바람에 모두 무산되었지만요.”

불꽃놀이는 처음 듣는 정보였다. 그동안 만났던 생존자들은 거의 모두 다 ‘그냥 있었는데 갑자기 본부가 폭발했습니다.’ 같은 소리만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주방 노예를 잡아 온 것은 제프가 처음이었다. 다른 곳들의 노예에게는 굳이 간부들의 행사를 알릴 필요가 없어도, 파티에 필요한 음식을 만드는 주방에서는 불꽃놀이를 즐기는 시간에 맞추어 음식을 내어 가야 했으니 사전 정보가 있었을 것이다.

“불꽃놀이가… 뭐 잘못된 일일까요?”

제프는 눈치를 보며 물었고 요하네스가 천천히 중얼거렸다.

“아니, 황궁 연회에서도 불꽃놀이 때문에 비슷한 사고가 일어나서….”

페이건이 흥미롭다는 듯이 눈을 크게 떴다. 요하네스는 대충 말꼬리를 흐린 뒤 계속 말하라는 듯이 고개를 까닥였다. 제프가 즉시 말을 이었다.

“그 난리 통에서 같은 후드를 덮어쓰고 손을 잡은 채 도망가는 두 사람을 본 이가 있다고 합니다.”

“…두 사람?”

“예. 후드로 몸을 가렸지만… 누가 봐도 젊은 남녀였다고 합니다. 후드가 준비되어 있었던 것을 보면 당연히 폭발 정보를 미리 알고 있었던 것 같았고요.”

젊은 남녀라는 말에 요하네스의 얼굴이 더 굳었다. 제프가 진지하게 말을 계속했다.

“심지어 그 폭발 사건에서 간부들은 모두 죽었는데, ‘푸른 루비’는 죽지 않았잖아요? ‘에이스’ 폭발 이후에도 활동을 재개했으니 말입니다.”

“…그렇지.”

“그래서 저희는 나름대로… ‘푸른 루비’와 비밀 연인이 라르딘 님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어서 그 테러를 일으키고 도주한 것 아닌가 하는 추측을 하고 있었습니다.”

제프는 눈을 굴리며 작게 덧붙였다.

“둘 다 ‘에이스’의 간부급이었을 텐데 그렇게 치면 정말이지 대단한 사랑이지요….”

페이건이 마음에 드는 이야기라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베이든이 있었으면 감동받아 울었겠네.’ 같은 소리를 중얼거렸다. 물론 요하네스의 표정은 아주 좋지 않아 보였다. 오히려 몹시 못마땅한 것 같기도 했다.

즐겁게 추임새를 넣었던 페이건은 요하네스의 잔뜩 굳은 얼굴을 보며 곧바로 태세를 전환하여 덧붙였다.

“뭐, 증거 없는 뜬소문이지만.”

제프 역시 그래서 뜬소문이라고 먼저 운을 띄운 거라며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요하네스가 근거 없는 헛소문을 한심하게 여겨 저런 표정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 페이건은 빠르게 제프에게 금화 하나를 더 쥐여 주며 말했다.

“즐거웠으니 값을 쳐 주지. 그럼 이만 가 봐.”

제프는 허리 숙여 인사하고 빠르게 집무실에서 나갔다. 문이 닫히고 제프가 나간 뒤 둘만 남자, 페이건이 어설프게 웃으며 말했다.

“‘푸른 루비’가 아름다운 여자라니… 확실히 뜬소문답게 자극적이네요.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지 않습니까.”

요하네스는 별말 하지 않고 우아하게 다리를 꼬았다. 표정의 변화는 없었지만 오랫동안 요하네스를 모셔 왔던 페이건은 그의 기분이 명백히 저조한 것을 눈치챘다.

“뭐, 몇 번이고 말씀드렸던 거지만… 굳이 ‘푸른 루비’를 이렇게 열심히 쫓을 이유가 있나 싶습니다. 정말 질 나쁜 악당들은 따로 있는데요. 아니, 사실 진짜 제 마음 같아선….”

하지만 요하네스는 부하에게 분풀이를 하는 주군이 아니었기 때문에 페이건은 요하네스의 기분이 어떻든 대체로 하고 싶은 말을 다 하는 편이었다.

“…제국이 어떻게 되든 말든, 그냥 다 같이 북부로 올라가고 싶은 마음뿐입니다. 솔직히 북부에 머무는 동안 다들 행복했잖아요. ‘푸른 루비’도 지금 내내 잠잠하고요.”

보통 페이건이 이런 식으로 말하면 요하네스는 일관적으로 무시하곤 했다. 항상 ‘푸른 루비’를 잡는 것만이 인생의 목적인 것처럼 이 사안에 대해서는 꽉 막힌 벽처럼 굴었다.

페이건의 칭얼거리는 말에 요하네스가 옅은 한숨을 쉬며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이 모든 사안을 뒤로하고 북부로 떠나면 결국 우리가 위험해진다. 악령을 완벽하게 다루기 시작한 디에고가 어디부터 쓸어 버릴 것 같나.”

“음… 뭐, 그렇죠.”

“북부에 머무는 것이 행복했다는 건 결과론적인 이야기야. 인명 피해는 없었어도 우리가 머무는 동안 악령이 아주 이상하게 행동했다는 것을 잊지 마. 이대로라면 앞으로 더 위험한 상황이 닥칠 확률이 높고.”

“네… 뭐, 그렇죠.”

“그런 상황이 오면, 네가 그토록 좋다고 노래를 부르는 엘로이즈부터 남부로 먼저 보내야 될 거야. 그건 싫잖아. 네 말대로, 다 같이 가야지.”

“아… 뭐, 그렇죠.”

결국 페이건은 머쓱하게 뒤통수를 긁었다. 그러다가 화들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다 같이요?”

당연히 그저 그런 상식적이고 꽉 막힌 대답만 반복할 줄 알았는데 완전히 상상하지도 못한 말이 나와서였다. 페이건이 흥분해서 빠르게 물었다.

“그럼 공작님까지요? 설마 이 일이 모두 해결되면… 더 이상 ‘푸른 루비’ 때문에 수도에 남지 않으시겠다는 말씀이세요? 정말, 정말 북부로 모두 다 함께 돌아가는 거예요?”

요하네스는 희미하게 웃을 뿐 대답하지 않았다. 늘 북부로 돌아가자며 졸라 댔지만 워낙에 철옹성 같은 주군이었던지라 상상하지도 못했던 결말이었다. 페이건은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놀라서 비틀거리며 말했다.

“뭐, 그, 그렇죠! ‘푸른 루비’는 활동을 안 하고 있잖아요. 이제 영원히 은퇴할 건가 봐요! 전 언제나 제가 ‘푸른 루비’라면 이미 남부로 튀어서 신분 세탁하고 유유자적 지낼 거라고 생각했어요.”

“가 봐.”

요하네스는 더 이상 말하지 않고 귀찮다는 듯이 손을 내저었다. 페이건은 혹시라도 자신의 주군이 마음을 바꿀까 봐 얼른 집무실을 나왔다.

그리고 조금 시간이 흐른 뒤에서야 요하네스가 ‘푸른 루비’에 대해서 지금껏 자신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음을 뒤늦게 깨달았다.

⚜ ⚜ ⚜

시온의 저택에 도착했을 때, 나는 태연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두근거리는 심장을 애써 진정시키고 있었다.

집무실에서 공작저의 정문까지 가는 그 짧은 길 동안 요하네스는 확연하게 ‘이제 우리의 관계는 정말로 달라질 것’을 명시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레오를 포함한 공작저 사람들이야 원래 어느 순간부터 우리의 사이가 좋았다고 생각했겠지만, 사실은 어느 정도 합의된 연기였다. 순간순간 우리가 합의했다는 것을 잊어버렸다고 해도.

그런데 방금은… 이제 연기가 아니라 ‘진짜’로 부부처럼 굴겠다는 의미인 듯했다.

자신을 준다느니, 원하는 대로 하라느니 하는 달콤하면서도 퇴폐적인 말들 역시 사람을 홀렸지만 가장 가슴속에 남는 것은 말이 아니라 행동이었다.

순간 못 참겠다는 듯한 눈빛, 다급하면서도 경건한 입맞춤, 많은 것을 참고 있는 듯떨리는 숨결, 끝났나 싶으면 다시 다가와 가볍게 눌러 오던 입술.

마치 배 속에 나비가 날아다니는 것처럼 마음이 부산스러웠다. 어느 때보다도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할 때라는 걸 알면서도 마치 꿈을 꾸는 것처럼 발이 붕 떠 있는 것 같았다.

“엘로이즈, 왔어?”

내가 올 줄 알고 있었다는 듯이, 시온은 이미 편안하게 응접실에 앉아 있는 상태였다. 나는 그의 앞에 털썩 주저앉으며 투정 부리듯 말했다.

“배고픈데 뭐 좀 줘.”

“요하네스 노아비크가 생각보다 가난한가 보지? 부인도 굶기고 말이야.”

시온은 종을 울리려고 했으나 입구를 한 번 바라본 뒤 어깨를 으쓱했다. 어느새 다가온 빈센트가 미간을 찌푸린 채 서 있었기 때문이다.

“배고프다고?”

“어. 아침 식사 안 했거든.”

“…기다려.”

사용인을 시켜도 되는데 빈센트는 빠르게 뒤를 돌았다. 시온은 어깨를 으쓱하며 그냥 두라는 몸짓을 해 보였고 나 역시 별 관심이 없었기에 말리지 않았다.

“흠, 그래.”

시온은 나를 보며 조용히 말했다.

“어제는 성공적이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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