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0화 (31/65)

문득 나는 그의 눈이 조금 서글퍼 보인다고 생각했다. 헤아릴 수 없는 감정들이 우리 주변을 맴도는 기분이었다.

당신이 평생 죄책감을 지니고 살아가는 그 소녀가 바로 나라고, 그런데 당신이 열심히 쫓고 있는 상대도 나라고 말할 수 없었다.

그리고 이미 시간의 소용돌이 속에서 사라진, 나만이 기억하는 우리의 과거가 있다고도 말할 수 없었다. 당신은 나를 한 번 구해 주었고, 나는 당신의 호의를 기회 삼아 얼떨결에 회귀했다고.

레오가 죽은 미래에서 살고 있는 당신의 표정은 퍽 쓸쓸해 보였기 때문에 나는 레오를 살리기 위해 최선을 다할 거라고. 만일 내가 이 짧은 두 번째 삶에서 살아남을 방법을 찾지 못한다 해도.

할 수 없는 말이 너무 많았다. 그러니 내 온전한 진심은 그에게 전달되지 못할 것이다.

그에게도 내게 끝내 전하지 못할 깊고 비밀스러운 마음이 있을까.

그마저 묻지 못하고 나는 싱긋 웃었다.

“떠나긴 뭘 떠나요. 당신이 쫓아낸다고 했어도 끝까지 붙어 있던 사람이 난데.”

내가 빤히 그를 바라보고 있는데 그의 손이 다시 한번 다가와 내 머리카락을 쓸었다.

“엘로이즈.”

“…네.”

“내가 겁이 나.”

어린애나 할 법한 대사에는 어울리지 않는 선득한 표정이었다. 나는 그 괴리가 오히려 소름 끼쳐서 살짝 몸을 움츠리며 그를 바라보며 멍청하게 반문했다.

“…네?”

“악령 군단을 이끌고 나타날지도 모르는 적 앞에서는 겁이 하나도 안 나는데.”

“…….”

“다른 게 겁이 나네. 어이없게.”

겁을 먹고 있다기에는 지나치게 위압적인 눈빛이었다. 어딘가 화가 나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슬퍼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항상 속을 알 수 없는 사람이었기에 나는 이해를 포기했다.

대신 그의 손을 잡아끌어, 레오에게 배운 것처럼 새끼손가락을 걸었다. 순순히 따라와 주는 커다란 새끼손가락에 내 손가락을 걸면서 나는 차분하게 말했다.

“겁내지 마요. 당신이 나를 사랑해 준다면 난 절대 내 발로 떠나지는 않을 거예요.”

요하네스는 가만히 나를 바라보다가 안 되겠는지 한 번 더 다가와 내 이마에 살짝 입을 맞췄다. 그 충동에 못 이긴 듯한 작은 입맞춤이 이상하게 전율로 다가왔다.

“그럼 르노아로 자작과 엘리어트 남작에게 잠시 간다고 해도….”

그의 입술이 몇 번 더 내 볼에 다가와 자잘스러운 입맞춤을 흩뿌렸다.

가볍게 입술이 닿을 때마다 심장이 울컥울컥 죄어들었다. 살짝 멀어지는 것 같아 이제 끝났나 싶으면 또다시 참지 못하고 다가오는 충동적인 접촉이 이어졌다. 그 반복적인 입맞춤의 끝에서, 그는 절박하기까지 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얼른 돌아와야 해.”

잔뜩 긴장하고 있었던 나였지만 그 말에는 깔깔거리며 웃어 버릴 수밖에 없었다.

“점심 먹기 전에 돌아올게요. 됐죠?”

나는 장난스럽게 그를 밀어내며 대답했다.

“안 그래도 저택 내에서 할 일이 많거든요.”

“할 일?”

요하네스의 눈에 의외라는 빛이 스쳤다. 그도 그럴 것이, 처음 결혼을 논의할 때 합의되었던 것처럼 나는 노아비크 가문의 공작 부인으로서 해야 할 일들을 하나도 안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네. 아주 수도 사교계에서 제게 관심이 많으신지 서신이 막 쌓이고 있어요.”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얼마나 궁금하겠어요. 결혼식도 제대로 안 치르고 북부로 떠난 노아비크 공작 부인에 대해서 말이에요.”

“…대체 뭐가 궁금하지?”

“왜 결혼했는지부터 정상적인 결혼은 맞는지… 그 사람들 입장에서야 궁금하겠죠, 뭐. 저는 그 탓에 좀 성가시지만.”

안 그래도 연회 때 내게 말을 걸고 싶어 하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는데 어쩌다 보니 바빠서 사교계의 마당발 부인들과는 대화조차도 나누지 못했다.

“딱히 초청에 응할 생각은 없지만 그래도 답은 해 드려야죠. 이럴 줄 알았으면 제국민들 다 보는 앞에서 성대하게 프러포즈라도 시킬 걸 그랬어요. 아무도 우리의 결혼에 대해 궁금해하지 않도록 말이에요.”

“어쩌나. 이미 결혼을 했는데.”

요하네스가 여유 있게 웃으면서 받아쳤다.

“쉽게 결혼해서 다행이군. 사실 내 인생에 쉬운 건 별로 없었는데 말이야.”

“그것 참 아쉽네요. 생각해 보니 프러포즈도 내가 먼저 했네? 진짜 결혼 쉽게 했다.”

나는 농담처럼 짓궂게 대꾸한 뒤 씩 웃으며 그를 지나쳐 시온의 집으로 향했다.

⚜ ⚜ ⚜

엘로이즈는 종종걸음으로 멀어졌다. 길게 늘어뜨린 금발에 햇빛이 부서져 반짝거렸다.

“나 참.”

요하네스는 피식 웃으며 중얼거렸다.

“누가 들으면 정말 쉽게 결혼한 줄 알겠군.”

집무실에 앉을 때마다 싱글거리는 얼굴로 어느 날 갑자기 들이닥친 그녀가 떠올랐다. 한때 여관이었던 이 저택에서 받은 그 프러포즈는 요하네스의 인생에서 단연코 가장 어려운 난제였었다. 사실 그 난제는 여전히 풀리지 않았다.

요하네스는 이웃집으로 향하는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천천히 뒤를 돌아 다시 공작저 안으로 들어갔다.

어느새 아까 엘로이즈와 함께 걸었을 때의 다채로웠던 표정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평상시의 나른하면서도 담담한 얼굴이 되어 있었다.

그녀와 물리적으로 거리를 두면 이상하게 그의 삶에서도 그녀가 멀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조금 더 현명해지고, 조금 더 영리해지는 것 같은 기분. 바꾸어 말하면 그녀의 앞에서 그는 한없이 멍청해지는 것만 같았다.

집무실에 들어갔을 때, 페이건은 정자세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요하네스가 그를 지나쳐 들어오자 페이건이 씩 웃으며 말했다.

“이제야 진정한 노아비크를 모시는 것 같네요. 원래 노아비크 공작가는 항상 공작 내외분이 함께 중대사를 처리하지 않았습니까.”

요하네스는 별말 없이 자리에 앉았다. 그러고는 태연하게 물었다.

“연회 중 베이든의 말은 잘 들어주었나?”

아까 베이든이 있을 때에는 언급하지 않던 화제였다. 페이건이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마님은 자신이 잘 보고 있을 테니 레오 공자님께 가 보라고 하더군요. 그리고 곧 그 난리가 났었습니다.”

‘그 난리’라면 마정석의 테이블이 무너져 마법 아티팩트들이 빛을 잃었던 사건을 뜻했다.

사실 페이건 역시 이 일련의 과정들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다. 그저 요하네스가 스쳐 지나듯 페이건에게 연회 전날 ‘베이든의 제안은 무조건 다 들어줘. 내게 허락받지 않아도 돼.’라고 지시해서 그 말을 따른 것뿐이었다.

심지어 요즈음 페이건은 베이든과 예전처럼 가깝게 지내지 않았는데, 에멘타의 주술사 힘을 받은 이후 사람이 좀 이상해졌기 때문이다. 자꾸 찻물 점을 쳐 준다고 따라다니면서 ‘그 사랑은 이루어지지 않아….’ 같은 말을 하는 것은 물론이고 ‘건실한 청년이 순정 때문에 동정이군.’ 같은 아주 추행적인 발언을 하기까지 했다.

그러므로 페이건은 ‘3개월 동안만 조금 멀리하겠습니다.’라는 마음가짐으로 최대한 그를 피하고 있는 중이었다. 심지어 세예나에게도 ‘그대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네.’ 같은 헛소리를 할까 봐 ‘베이든을 좀 멀리해.’라고 운을 띄워 놓은 상태였다.

따라서 페이건은 베이든의 이상 행동에 대해 많은 정보가 없었고, 요하네스의 지시에도 별생각 없이 복종했다. 요하네스는 많은 것을 꼼꼼하게 보는 사람이니 자신이 알지 못하는 무언가를 눈치채고 있는가 보다 할 뿐이었다.

“어쨌든 그 난리가 벌어진 덕분에 중요한 단서를 얻을 수 있었네요. 운이 따랐습니다.”

“운….”

요하네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동의하는 듯한 표정이 다소 인위적이었다.

“…그렇지. 운이 좋았지.”

나른한 분위기로 중얼거린 그는 깃펜을 들며 지시했다.

“이제 다시 제프를 불러와. 생각할 시간은 그동안 충분히 준 것 같으니.”

“예.”

페이건은 공손하게 예를 갖춘 뒤 집무실을 나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며칠 전 잡아 왔던 ‘에이스’ 폭발 사건의 생존자, 제프를 데리고 왔다.

제프는 공작저 지하에 갇혀 있던 그 며칠 사이 나름대로 살이 올라 있었다. 공작저에서 균형 잡힌 영양식을 제공했기 때문이다.

사실 오래도록 ‘에이스’에 있었기 때문에 신분증조차 없었던 제프는 불법 일용직을 전전하며 살아왔고 아무리 지하에 갇혀 있다고 해도 이런 대우가 처음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동안 잘 지냈나.”

딱 봐도 잘 지낸 것 같은 얼굴을 보며 요하네스가 느긋하게 말했다. 지금 네 만족감을 모두 안다는 듯한, 베푸는 자의 오만한 표정이었다.

“예, 덕분에….”

맨 처음 주눅이 들어서 덜덜 떨었던 제프는 눈치를 보면서도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보다 요하네스가 신사적으로 대해 준다는 생각이 들어서 마음이 많이 유해진 듯했다. 요하네스가 턱을 치켜들며 부드럽게 말했다.

“지금부터 그대는 자유야. 이건 며칠 전의 정보값이고.”

그 말에 페이건이 빠르게 금화 하나를 건넸다. 금화를 받아 든 제프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금화 하나라면 아껴서 생활하면 1년 동안은 일을 하지 않아도 될 정도의 금액이었다. 제프는 곧바로 허리를 깊게 숙이며 소리쳤다.

“가, 가, 감사합니다!”

“그동안 더 떠오른 정보가 있으면 지금 말해 둬.”

요하네스는 눈썹을 치켜올리며 유혹하듯 속삭였다.

“그대가 날 만날 수 있는 기회도, 내가 그대에게 값을 치를 수 있는 기회도 지금이 마지막이니.”

“예, 예?”

“난 아주 바쁜 사람이고 굳이 너 같은 이를 두 번 만나지는 않는다.”

제프의 눈이 흔들렸다. 요하네스가 바쁘다는 건 길거리의 개도 아는 사실이었고 당연히 그를 만나는 기회는 일반인에게 거의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런 횡재를 다시 할 수 없으리라는 자각은 사람을 다급하게 하는 데에는 효과가 좋았다. 요하네스는 그 다급함을 다루는 데에 천부적으로 능숙한 사람이었다.

역시 제프는 금화 하나를 쥐고 마른침을 삼키더니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 음… 사실 확인이 안 된… 뜬소문도 정보로 쳐주시는 겁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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