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9화 (30/65)
  • 몇 마디의 말을 더 얹은 뒤 회의가 끝났다.

    페이건만 남고, 베이든과 세예나는 예를 갖춘 뒤 곧바로 집무실을 나섰다. 나 역시 눈을 굴리다가 타이밍 잘 맞춰서 조심스럽게 일어났다.

    그런데 요하네스가 내 손을 놓지 않았다.

    “아침 식사해야지, 엘로이즈. 같이할까?”

    나는 어설프게 웃으며 대답했다.

    “아니에요. 괜찮아요.”

    실제로는 배가 좀 고프긴 했지만 지금 요하네스와 함께 얼굴을 마주 보고 아침을 먹으면 꼭 체할 것 같았다.

    다른 사람들에 둘러싸여서 평온한 척 대화를 이어 가고 있었지만 어젯밤의 기억이 선명했기 때문이다.

    입 안을 헤집던 생경한 느낌과 살갗에 아직 남아 있는 야릇한 감각을 떠올리면 순식간에 귀가 달아올랐다.

    어쩌면 오늘 처음 그를 마주친 것이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는 자리라서 다행이었다. 단둘뿐이었다면 대체 어떻게 대해야 할지 머릿속이 하얘졌을 것 같으니까.

    “왜, 속이 안 좋아?”

    물론 모든 것이 어색한 나와는 달리 요하네스는 평소와도 같이 태연하면서도 느긋한 얼굴이었다. 매사 무감하면서도 한 발짝 떨어져 있는 듯한 분위기 역시 여전했다. 어젯밤 테라스에서 본 남자와는 아예 다른 사람 같았다.

    “그건 아니고 딱히 입맛이 없어서….”

    어제 그는 정말이지 나를 한계까지 몰아붙였다. 처음 느껴보는 아찔한 어지러움에 아무런 대응을 하지 못할 정도로 굶주린 짐승처럼 달려들었다. 속절없이 몸을 비틀어 대던 기억이 선명한데 그 혼자 단정해 보여서 얄미울 정도였다.

    나는 어설프게 웃으며 말했다.

    “시온한테나 갔다 올게요. 어제 인사도 못 하고 와서요.”

    지금만큼은 시온과 빈센트가 옆집에 산다는 게 이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심지어 얼른 디에고와 ‘에이스’의 연결 고리를 말해 주고 싶어 입이 간질거리기까지 했다. 나는 눈을 굴리며 빠르게 덧붙였다.

    “안 그래도 발목 때문에 유난을 떨어 대서… 여기 와서 민폐 끼치는 꼴 보느니 제가 먼저 가는 게 낫겠어요.”

    “그래?”

    요하네스는 시온과 빈센트를 썩 달가워하는 것 같지 않았는데, 사실 그쪽에서도 요하네스를 싫어하는 건 마찬가지였으니 억울할 건 없었다. 요하네스는 살짝 못마땅한 내색을 보이다가 느릿하게 일어났다.

    “그럼 내가 데려다주지.”

    “…네? 바로 옆집인데요?”

    “페이건, 기다리고 있어. 바로 옆이니 금방 올 거야.”

    페이건은 ‘예!’ 하고 짧게 대답하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요하네스는 우아하게 나를 에스코트하며 집무실을 나섰다.

    제발 이런 상황만은 오지 않았으면 했는데 복도에 나가자마자 단둘이었다. 내가 어색하게 바닥에 시선을 떨어트리며 말꼬리를 흐렸다.

    “진짜… 혼자 가도 되는데….”

    “왜.”

    그 낮은 반문에 나는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아까의 단정하고 평온한 목소리와 전혀 결이 다른 목소리였기 때문이다.

    나도 모르게 눈이 마주쳤다. 그의 황금빛 눈이 나를 뚫어질 듯 바라보고 있었다. 순식간에 몸이 흠칫 움츠러들면서 발끝이 움찔했다. 아무도 없는 긴 복도에 선 채, 그가 낮게 웃으며 내 귀에 속삭였다.

    “어젯밤의 미친놈처럼 굴 까 봐 겁나?”

    아까 집무실에 있었을 때와 온도차가 너무 심했다. 나는 배신감마저 느껴지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며 부루퉁하게 대꾸했다.

    “제정신 아니었던 건 기억나세요?”

    “글쎄, 난 지극히 제정신이었는데.”

    요하네스는 내 귓불을 살짝 깨물고 나서 상체를 살짝 들었다. 더운 숨이 그대로 전달되어 온몸의 솜털이 비쭉 섰다. 내가 살짝 몸을 떨자 그가 장난스럽게 덧붙였다.

    “제정신 아니었던 건 그대 같고.”

    하기야 끝끝내 제 마음대로 밀어붙였던 그와는 달리 나는 제대로 눈도 못 뜨며 칭얼댔으니 제정신 못 차린 건 나인 것 같기도 했다. 온순하게 받아들이는 내 표정을 보며 요하네스가 짓궂게 웃었다.

    “물론 하고 싶었던 걸 다 했다는 건 아니지만.”

    “…수도는 참 덥네요.”

    나는 괜히 딴청을 부리며 먼저 발걸음을 옮겼다. 어쨌든 시온과 빈센트에게 가는 길이었고 괜히 여기서 시간을 낭비할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누구 덕분에 이렇게 꽁꽁 싸매는 옷밖에 못 입고….”

    그의 입술 자국이 선연히 남아 있는 쇄골 부근을 드러내고 다닐 수는 없었기에, 나는 목까지 오는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그가 장난스럽게 웃었다.

    “억울해?”

    “뭐, 딱히 뿌듯하지는 않죠.”

    “그럼 내게도 남기든가.”

    농담이 아니라는 듯, 요하네스가 태연스럽게 단추를 풀기 시작해서 나는 기겁하여 발걸음을 멈추고 그의 손목을 덥썩 잡았다.

    “아, 남겨도 여기서는 안 남길 거예요!”

    전혀 위협적이지 않은 자세를 취한 내가 위협적으로 눈을 부라리자 그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래? 그럼 오늘 밤에 준비하고 있으면 되나.”

    “무, 무슨….”

    “어제 합의했잖아.”

    그는 내게 잡히지 않은 다른 손으로 내 머리카락을 쓸며 짙게 웃었다.

    “나를 주기로.”

    순간 소름이 돋았다. 하기야, 그가 순식간에 주도권을 가진 짐승처럼 달려들었기에 잊히긴 했지만 사실 처음 시작은 그 말이었다.

    “당신을 줘요, 내게. 제발.”

    지금 떠올려도 불쌍하기까지 한 발언이었다. 내 볼이 서서히 달아오르는데 그가 느긋하게 말했다.

    “그러니 내 부인이 원하시는 대로 해야지.”

    순간 우리가 상당히 붙어 있다는 것을 의식했다. 워낙에 체격 차이가 많이 나서 덮치듯 그의 손을 붙잡았는데도 마치 내가 매달려 있는 것 같은 모양새였다.

    그가 내 눈을 가만히 바라보더니 씩 웃으며 콧잔등에 입을 맞추었다. 그러고는 변명하듯 속삭였다.

    “당황하는 얼굴이 귀여워서. 참기가 어렵군.”

    나는 진심으로 당황해서 눈을 몇 번 깜빡이고 그의 손목을 바로 놓아주었다. 홱 돌아서 멈췄던 걸음을 다시 걷기 시작하는데 속에서부터 열이 올랐다. 더한 짓들도 했으니 이 정도야 아무것도 아니겠지만 솔직히 너무 자연스러워서 놀랐던 것이다.

    심장이 두근두근 뛰었다. 이상하게 발이 붕 떠 있는 느낌이었다. 내가 무슨 표정을 하고 있을지 잘 상상이 되지 않았다.

    “…정말이에요?”

    나는 잰걸음으로 묵묵히 발걸음을 옮기다가, 어느새 내 옆으로 따라붙어 느긋하게 걷는 요하네스에게 툭 물었다.

    “정말로 그 말 지킬 거예요?”

    내 의심쩍다는 얼굴에 요하네스는 당연한 걸 묻는다는 듯한 어조로 대답했다.

    “이미 성사된 거래 아니었나? 늑대에게 쫓기던 그날 밤하고는 모든 게 달랐는데.”

    하긴, 그의 말마따나 이미 성사된 거래였기에 집무실까지 불러 향후 계획까지 의논한 것이겠지. 게다가 내게 큰 역할까지 맡기지 않았는가.

    계속해서 종종걸음을 옮기면서도 나는 슬쩍 내 옆에서 걷고 있는 그를 올려다보았다. 어제의 기억이 선연하게 떠올랐다.

    “당신을 줘요, 요하네스. 하지만 껍데기 말고, 다 줘요. 네?”

    “…….”

    “당신, 아무도 사랑할 수 없을 거라고 했지만… 그래도 해 봐요.”

    늑대에게 쫓기던 그날 밤, 그는 아무도 사랑할 수 없을 것이라고 단언했었다. 모든 게 다르다면 그 또한 다르다는 걸까? 정말로 나를 사랑하려고 노력해 보기라도 할까?

    “네가 내 모든 것을 망치고 날 엉망으로 만들 것만 같았지.”

    그의 모든 것을 망가트리는 대상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 오히려 어떻게 해서든 그의 삶을 지켜 주고 싶은데.

    내가 생각에 잠겨 있는 동안 그는 조용히 내 옆에서 걸었다. 아무리 시선을 먼 곳에 두어도 바로 옆에 있는 그의 존재감이 상당했다. 정문까지 가면서 마주치는 공작저의 사용인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다가도 우리를 보고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눈을 돌렸다.

    정문에 이르러서, 나는 눈을 깜빡이며 그를 바라보았다.

    “설마 시온의 집까지 들어오려는 건 아니죠? 여기면 충분해요.”

    “뭐, 원하신다면.”

    요하네스는 내 손등을 들어 살짝 입 맞추었다. 부드러운 입술의 감촉과 함께 선연한 욕망에 찬 눈이 나를 빤히 내려다보았다.

    “어쨌든 난 어젯밤, 단단히 제정신이었어. 오해는 하지 마.”

    “…네?”

    “네 유혹에 넘어가 내 손으로 내 인생을 진창에 밀어 넣었다는 뜻이야.”

    그걸 유혹이라고 부를 수 있었을까. 차라리 구걸에 가까웠는데. 순간 심장이 쿵, 하고 떨어졌지만 자신 있게 대답했다.

    “최선을 다해 당신의 편이 된다니까요. 진창은 무슨….”

    그는 대답하지 않고 살짝 웃었는데 숨결이 손등에 부서지는 느낌이라 간지러웠다. 어제와는 비교도 안 되는 작은 접촉임에도 불구하고 순식간에 머리가 몽롱해졌다.

    “어제 카이트에게 서신이 왔는데.”

    천천히 입술이 떨어졌다. 요하네스가 담담하게 화제를 돌렸다.

    “요한이 매일 낑낑거리며 운다는군.”

    신전에서 신수라며 보내 준 작은 요크셔테리어, 요한은 북부에 남겨 두고 왔다.

    나 역시 요한이 많이 보고 싶었지만 데려올 수는 없었다. 수도에 요한을 데려왔다가는 대신전이 ‘신수를 잠시 보겠다’라며 나설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아무 능력도 없는 강아지를 보냈는데 악령이 퇴치되었으니 당연히 데려가서 없앨 가능성이 컸다. 신수는 기본적으로 신전의 소유니 언제든 데려갈 수 있었고… 그러니까 요한의 목숨까지 걸면서 수도에 데려올 수는 없었던 것이다.

    살짝 그리운 표정을 하고 있는 나를 보며 요하네스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악령 퇴치 능력도 없어졌는지 하급 악령을 보고 꼬리를 말고 도망가더래.”

    그건 당연한 거였다. 애초에 요한은 악령 퇴치 능력이 없었으니까.

    “모든 것에 의욕을 잃고, 대문 앞에서 계속 서성이고 있다고 해.”

    “…산책도 안 나가고 간식도 잘 안 먹는대요? 어머, 어떡해.”

    그러나 의욕을 잃은 건 또 별개였다. 대문 앞에 서 있을 요한을 생각하니 심장이 쿵 내려앉아서 나는 걱정스럽게 물었고 요하네스가 천천히 대답했다.

    “그대가 떠났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지.”

    “…….”

    “그러니 엘로이즈.”

    그가 고개를 살짝 비스듬히 기울이며 말했다. 뚜렷한 음영이 진 얼굴이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웠다.

    “나를 진창에 밀어 넣어도 되니….”

    짙은 시선 속에서 잡혔던 손이 멀어졌다.

    “약속해. 떠나지 않겠다고.”

    저택의 대문 앞에서 한 발짝 뒤로 물러서며, 그가 말했다.

    “그게 주인의 미덕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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