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8화 (29/65)

건국제는 매년 이맘때 즈음에 열리는 연례행사였다.

대귀족가 수장들이 돌아가며 대신전에 기도를 올리면서 제국의 안녕을 기원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절차였다. 물론 평민들에게도 건국제는 커다란 행사여서, 거리마다 볼거리, 먹을거리, 즐길 거리가 넘쳐나고 밤늦도록 경쾌한 음악 소리가 울려 퍼진다고 했다.

물론 그것도 8년 전까지의 이야기지만.

오베딘 황태자를 북부 전쟁에서 잃은 황제가 슬픔에 의식을 잃은 이후, 건국제의 각종 행사들은 그대로 취소되었다. 대신전의 기도 역시 디에고 황태자가 홀로 치르는 것으로 간소화했다.

하지만 올해, 황태자인 디에고는 연회와 함께 건국제 역시 평소대로 치르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므로 8년 만에 대신전이 고위 귀족들을 맞게 되는 셈이었다.

“고위 귀족일수록 날짜 배정이 늦지. 그러니 우리는 건국제 폐회식 전날 오후 즈음에야 대신전에 들어가게 될 거야.”

노아비크는 수도의 대귀족이라고 할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상징성만큼은 벨리아나스에 맞먹는 가문이었다. 어쨌든 제국에서 둘뿐인 이능을 지닌 가문이었으니까.

노아비크 다음이 황족일 테고, 그다음 날은 폐회식을 마지막으로 건국제가 완전히 끝나겠지. 그리고 건국제가 끝나는 날의 바로 다음 날이 내 스물다섯 번째 생일이었다.

“대신전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나와 그대, 레오뿐이야.”

연회와는 달리 기사들조차 대동할 수 없다는 뜻이었다. 나와 요하네스는 괜찮은데, 거기 레오가 끼어 있다는 것이 상당히 불안했다.

건국제가 끝나면 별일 없는 이상 레오는 북부로 돌아간다. 그러므로 디에고는 그 전에 반드시 레오를 없애려고 할 것이다.

“레오를 꼭 데려가야 할까요?”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굳이 동행시키기에는 위험하지 않을까 싶은데….”

“그건 천천히 고려해 봐야지.”

내가 ‘천천히’라는 말에 반박하려고 하는데 베이든이 끼어들었다.

“아, 그리고 대신전에 출입하시는 날까지 관계를 가지시면 안 됩니다. 대신전에서 출입 조건으로 건국제 기간의 금욕을 요구하고 있으니까요.”

베이든이 말하는 ‘관계’가 무엇인지 순간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아서 눈을 깜빡이고 있는데 요하네스가 태연하게 대답했다.

“알고 있어. 그래서 참고 있고.”

나는 베이든의 말보다 요하네스의 천연덕스러운 대답이 더 경악스러워 입을 떡 벌렸다.

참고 있다니, 정말 누가 들으면 평소에 자주 관계를 갖는 부부라고 해도 믿을 것 같은 반응이었다.

그리고 그건 별일도 아니라는 듯 요하네스가 바로 화제를 돌렸다.

“어쨌든 그때 20년 전에 내가 신전에 기부했던 최상급 악령의 심장을 가져오려고 해.”

“아.”

결국 나는 ‘관계’니 ‘금욕’이니 하는 단어에 대해서는 별 반응도 하지 못하고 곧바로 싱긋 웃으며 대꾸했다.

“그 과정에서 ‘푸른 루비’를 핑계 삼겠다는 거군요.”

“그래. 대신전은 내가 ‘푸른 루비’에 관해서라면 눈이 좀 돌아 있는 걸 잘 알고 있거든.”

뭐, 비이성적인 집착이라는 걸 스스로도 알긴 아는 모양이었다.

“그래서 그에 관련된 일이라면 협조를 잘해 주지.”

“와. 대단하다. 정말 열성적으로 쫓아다닌 보람이 있네요. 대신전의 오랜 신뢰를 이런 데에 쓰다니.”

나는 영혼 없이 감탄했다.

“근데 평생 파트너라고 생각했던 대신전에 거짓말을 해도 되겠어요?”

“원하는 바가 있다면 그쯤이야.”

요하네스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뭘 그런 걸 신경 쓰느냐는 듯한 눈빛이었다. 그의 퉁명스러운 말이 이어졌다.

“신전도 내게 거짓말을 열심히 하는데.”

“…그래요?”

하기야, 요하네스는 주고받는 게 명확하지 않은 것을 싫어한다고 했었다. 대체 신전에서 무슨 거짓말을 했기에 ‘푸른 루비’까지 거는 건지 궁금하기는 했다. 내가 궁금해하는 게 티가 났는지 페이건이 부드럽게 끼어들었다.

“지난 몇 년간, 황태자 전하의 사재가 급격히 불었습니다. 그중 많은 양이 신전에 기부금 형식으로 돌아갔는데… 모든 정황을 살펴보면 악령을 이용한 실험에 드는 비용을 지원한 것이지요.”

“그렇게 치면 신전은 충실한 신도인 요하네스에게 그 실험을 숨긴 거네요.”

뭐 이렇게 보나 저렇게 보나 서로 신뢰를 쌓을 관계가 아니기는 했다.

회귀 전에는 몰랐는데 요하네스와 신전의 관계는 멀리서 보던 것처럼 그렇게 끈끈하지 않았다. 보아하니 요하네스는 신전에서 신수랍시고 요한을 보냈을 때부터 요한이 그저 평범한 개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던 것 같았다.

그러니까 요한이 악령을 퇴치했다는 걸 믿지 못해 곧바로 북부로 쫓아온 거고… 어떻게 보면 회귀 직후 내가 요하네스를 잘 알지 못해서 생긴 패착이었다.

하지만 패착은 맞는 건가. 이제는 그게 별로 아쉽지도 않았다.

덕분에 요하네스와 가까워지고 또 이렇게 자연스럽게 함께 있을 수 있게 되었으니 오히려 다행처럼 느껴졌다. 새삼스럽지만 이미 초심은 다 잃은 셈이었다.

“서로 막, ‘푸른 루비’를 함께 잡자고 으쌰으쌰 응원했으면서 말이에요.”

내가 야무지게 말하는데 페이건이 고개를 저었다.

“아뇨, 마님. 그게 본질이 아닙니다. 저희에게 중요한 건 그 몇 년간 어떻게 황태자 전하의 사재가 그토록 불었냐는 건데….”

페이건은 요하네스에게 허락을 구하듯 눈을 한 번 굴렸고 요하네스가 무성의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발언 허가를 받은 페이건이 냉큼 덧붙였다.

“아마 황자 시절에 ‘에이스’에서 뒷돈을 받으신 듯합니다.”

어?

…여기서 ‘에이스’가 왜 나오지?

늘 태연했던 나는 그 말에 갑자기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것처럼 놀랐다. 생각하지도 못한 화제였기 때문이다. 페이건의 말이 친절하게 이어졌다.

“사실 ‘에이스’에서는 보육원의 아이들을 데려다가 노예로 썼거든요? 모든 보육원 관리는 제국의 일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사라지는 아이들이 한 번도 논란이 되지 않았다….”

그건 그러네. 생각해 보니 맞는 말이었다.

내가 있던 보육원에서도 어느 날 갑자기 나와 빈센트가 사라진 셈이었는데, 함께 있던 보육원 친구들이 제국의 감시원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을까? 물론 원장이 무섭다고는 하지만 제국의 수많은 보육원에서 단 한 차례도 제보가 없었을까?

“당연히 황실의 침묵이 있었던 거죠. 그리고 신전도 황태자의 돈을 받으며 그 사실을 짐작하고 있었을 겁니다. 다만 ‘푸른 루비’가 신전의 권위를 추락시킨 것도 사실이니 열심히 쫓기도 하고요. 신전 나름대로는 중립을 지켰다고 생각하겠죠.”

머리가 차갑게 식는 것 같았다.

나를 못마땅한 눈으로 바라보던 디에고를 떠올리자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제국의 어버이’라며 사람들 앞에서 손을 흔들던 그의 모습이 떠오르자 토할 것만 같았다.

그건 그동안 ‘노아비크의 적’이라고 생각하면서 경계해 왔던 것과는 확연히 다른 감정이었다. 오롯이 한 명의 국민으로서 갖는 배신감이었다.

보육원에서 클 때 질리도록 들었던, ‘나라의 높으신 분들께서 지원금을 하사하셔서 너희 같은 것들도 빌어먹지 않고 편안히 살 수 있는 거야.’라는 원장의 말이 모두 무색해지는 순간이었다.

“아무래도… 그 당시에는 오베딘 전하께서 계셨으니까 2황자셨던 디에고 님은 그런 식으로 자금을 마련할 수밖에요.”

“아니, 그래도….”

“어쨌든 황족이니까 그 정도 은폐는 어렵지 않았을 겁니다.”

나는 화가 솟구치는 것을 느끼며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이것은 라르딘이나 바바라에게 품었던 ‘에이스’에 대한 1차원적인 앙심과는 또 다른 성격의 분노였다.

그딴 황족을 모시기 위해 제국민으로 존재하는 게 아니었다. 어떻게든 가장 낮고 천한 우리를 지켜 주어야 할 지도자가 가장 먼저 못된 인간들에게 팔아먹다니.

원래 아이는 힘이 없다. 그중에서도 부모가 없는 아이들은 제국에서 가장 약한 존재라고 볼 수 있었다. 디에고는 그 점을 이용해 우리를 최악의 인생으로 밀어 넣은 셈이었다.

하기야, 악령을 조종해 제국민들 위에 군림하려던 이에게 그만한 도덕성을 바라는 것 자체가 역설적인 일이었다.

결과적으로 내가 ‘에이스’에서 혹사당하며 얻어 냈던 보석들은 결국 디에고에게 가고 있었던 셈이다. 디에고는 그 보석으로 악령에 대한 실험을 주도해서 레오를 죽이려 했던 것이고.

모든 일들이 마치 하나의 원처럼 연결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시작이 되는 단 하나의 악당이 아직 멀쩡히 숨 쉬고 살아 있다는 게 비탄스러울 뿐이었다. 내 개인적인 복수는 ‘에이스’가 폭발할 때 모두 끝났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던 것이다.

“그래서 ‘에이스’가 갑자기 몰락한 이후 자금줄을 다시 찾고 있을 겁니다. 아마 비슷한 암흑 조직을 직접 운영하고 싶어 할 수도 있고요.”

황태자가 살아 있는 한 제2, 제3의 ‘에이스’가 계속 만들어질 수 있다는 의미였다. 나는 머리가 어지러운 것을 꾹 참으며 환멸 난다는 듯이 대답했다.

“정말 제국 꼴이 대단하네.”

빈정거리지 않으려고 해도 헛웃음을 멈출 수 없었다.

“그런 사람이 차기 황제라니. 아, 이미 모든 권력은 다 쥐고 있나?”

이제는 시한부인 내 목숨을 떠나서, 내가 만일 죽는다고 해도 그 인간과 함께 지옥으로 떨어지고 싶었다. 나 같은 피해자를 더 이상 만들고 싶지 않았다.

이제 정말 스물다섯 번째 생일이 가까워져서 심장의 통증이 선명하게 잦아지고 있었는데, 그동안은 아무렇지도 않게 참아 냈지만 지금 느껴지는 통증만큼은 어딘가 서러웠다.

게다가 결국 그 실험에 쓰인 돈들이 내게서 온 것이라면… 내가 마무리 짓는 것이 마땅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의는 아니었으나 분명 나는 그들에게 도움이 되었으므로.

내가 솟구치는 분노를 가라앉히려고 애쓰는데 세예나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마님, 너무 화내지 마세요. 어차피 공작님이 이 일의 전말을 다 알게 된 이상 잘 해결될 테니까요.”

“…그, 그런가.”

내가 어설프게 웃어 보이자 페이건이 재빠르게 거들었다.

“그럼요. 마님께서 잘 몰라서 그러시는데… 저희 공작님은 정말 유능하십니다. 아주 작은 단서라도 놓치지 않으시고 인내심도 대단하시거든요. 절대 승산이 없지 않아요. ‘푸른 루비’도 언젠가는 꼭 잡으실 거고 말이에요.”

뭔가 마지막에 아주 찝찝한 문장이 따라붙었으나, 어쨌든 요하네스가 유능하다는 건 최측근들이 모두 인정하고 있는 바인지 베이든도 세예나도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기계적으로 한 번 웃어 주고 난 뒤 요하네스에게 고개를 돌려 물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제가 뭘 어떻게 도울 수 있을까요?”

“일단은 그대가….”

요하네스가 긴 손가락으로 내 손을 가볍게 쓸었다. 그리고 아주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푸른 루비’를 알고 있다고 해.”

“제, 제가요? ‘푸른 루비’를요?”

“어. 그거면 대신관은 아주 흥미를 보일 거야. 아주 잘 아는 사람이라고 해.”

이상하게 등 뒤로 소름이 돋았다. 다정한 눈빛으로, 그가 천천히 덧붙였다.

“잘할 수 있지? 엘로이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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