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7화 (28/65)

“패, 패륜….”

나는 손에 느껴지는 단단한 체온에 당황해서 눈을 굴렸고, 조금 지나서야 페이건으로부터 제대로 된 상황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그러니까 내가 의도적으로 마정석을 넘어트려 잠시 황태자의 눈을 가린 순간, 요하네스와 베이든은 빠르게 움직여 목적을 이뤄 낸 것이었다.

다만 황태자로부터 분명한 증거를 찾은 게 아니라, 오히려 쓰러져 있다던 황제의 비밀을 알아챈 셈이지만….

처음부터 잘 좀 설명해 주지, 대뜸 결과만 말해서 사람을 놀라게 하다니 요하네스는 어떻게 보면 상당한 악취미를 갖고 있었다.

내가 그를 향해 눈을 흘기자 그가 장난스럽게 웃었다.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며 페이건이 목을 가다듬고 말했다.

“어쨌든 여러 가지 다른 정보로 조합해 본 결과는 이렇습니다.”

사실 내가 알 수 있는 정보는 한계가 있었지만 유능한 노아비크 기사단이라면 달랐다. 분명히 어제 얻어 낸 실마리를 토대로 다른 자료들과 조합하여 가장 진실에 가까운 결론을 이끌어 냈을 것이다.

직접 움직이지 않아도 알아서 정리된 결과를 들을 수 있다는 건 꽤 매력적인 일이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페이건이 진지한 눈으로 말을 이었다.

“황태자 전하께서는 오래전부터 신전과 함께 이계의 문을 열어 악령을 지배하는 법을 연구해 왔으며… 아마 벨리아나스의 피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황제 폐하의 의식을 잃게 한 뒤 그 피를 사용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어떻게 보면 많은 것들이 맞아떨어지는 설명이었다.

솔직히 형을 죽이고 황태자 자리에 앉은 디에고가 제 아비라고 죽이지 못할 리가 없었다. 심지어 두 사람은 정치적 노선이 달랐다.

게다가 디에고는 단 하나 남은 황족이었고 이미 모든 실권을 쥐고 있는 상태였다. 지금이라도 황제가 서거한다면 쉽게 황위에 오를 수 있었다. 그러므로 황제가 저렇게 오랫동안 목숨을 부지하고 있는 것이 신기하다고 생각했는데… 다 쓸모가 있어서 죽이지 않은 것뿐이었다.

“벨리아나스의 피를 이용하면 악령과 더 가까워진다는 고서의 기록과 관계가 있는 것 같고요.”

다르게 말하면 악령을 조종하는 데에는 한 사람의 기력을 모두 쇠하게 할 정도의 이능이 필요하고…. 그러므로 디에고는 자기 자신의 이능을 쓰지 않기로 결정한 셈이었다.

어떻게 보면 상당히 영리한 전략이었다.

형을 죽임으로써 아버지가 쓰러졌다는 핑계를 만들고, 쓰러진 아버지의 힘을 악령을 조종하는데 이용하고….

“그럼 8년 전에 폐하께서 병환이 드신 것도… 다 계획된 일이겠군요. 오베딘 황태자 전하께서 돌아가셨을 때를 기회 삼아서 말이에요.”

내 말에 세예나와 페이건이 놀랍다는 듯 눈을 크게 떠 보였다. 내 추측이 대단해서라기보다는 내가 이런 식의 분석을 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놀랍다는 표정이었다.

“어쨌든, 하지만 아시다시피 악령을 지배하는 것은 쉽지 않고… 여러 가지 변수가 있는지라 디에고 황태자 전하의 입장에서는 일단 실험을 해 보고 싶었을 겁니다. 그래서 북부를 그 타깃을 잡은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페이건은 물 흐르듯 설명을 계속했다.

“아무래도 북부에는 악령이 자주 나타나기도 하고, 수도에서 멀어서 부담도 없고, 또… 아무래도 전하께서는 노아비크 가문에 대한 반감이 계시는 분이니까요.”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저들은 결정적인 것을 모르고 있었다.

디에고가 북부를 대상으로 악령을 실험해 보고 있는 건 맞지만, 단순히 그것만이 목적은 아니었다. 실험하는 김에 레오를 죽이고 싶었겠지.

디에고는 아직 미혼이었는데, 황제 폐하가 저렇게 병환에 계신데 차마 경사스러운 행사를 열 수 없다는 말로 결혼을 미루고 있었다. 말이 그렇지, 비어 있는 황태자비의 자리는 귀족들을 홀리기에 너무나 쉬웠다.

그가 황태자 자리를 쉽게 차지하고 실권을 금세 쥘 수 있었던 것도 ‘혹시 내 딸이 황태자비가 될 수도 있다’라는 희망을 가진 귀족들의 욕망을 영리하게 이용했기 때문이다.

레오는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는 유일한 다른 벨리아나스였다. 위험 요소를 남겨 두지 않는 디에고는 아마 그 사실을 견디지 못했을 것이다.

요하네스가 아무리 레오를 자기 자식으로 속여 키우고 있다고 해도, 직접 오베딘의 살인을 사주한 디에고는 무언가 찝찝함을 느꼈을 것이다. 그러니 굳이 오베딘의 유품에까지 데려가 무언가를 확인하려고 했겠지.

“어쨌든….”

하지만 어쨌든 레오는 멀쩡했고, 여기서 요하네스가 비밀로 하고 있는 사실을 공개할 수도 없었기에 나는 천천히 대답했다.

“…정말 끔찍한 일이네요. 악령을 제대로 다룰 수 있다면 온 대륙이 디에고 황태자 전하와 신전의 밑에 무릎을 꿇겠어요.”

일반인은 도저히 악령을 이길 수 없다. 요하네스 같은 대단한 사람도 악령이 떼로 달려오면 고전을 면치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악령이 인간의 통제하에 들어가게 된다면 모두 다 디에고와 성력을 가진 신전에게 빌빌 기어야 했다. 제국민 모두가 노예가 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 의미에서 디에고와 신전은 이해관계가 일치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니 그동안 아무도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실험을 강행하고 있는 것이고.

당연히 그 실험은 아직 완벽하지 않았다. 악령들은 레오를 공격하라는 명령을 받았어도 본능을 못 이기고 먼저 자신을 공격한 대상인 나로 타깃을 틀어 버리는 등, 어쨌든 완벽하게 통제당하는 모습을 보여 주지는 않았으니까.

인간은 항상 악령을 퇴치하기 위해 노력해 왔다. 단테 노아비크는 악령을 불러왔다는 죄책감으로 가문의 후손들에게까지 그 책임을 지웠다. 그런데 제국의 어버이라고 불리는 황족이 악령을 이용해 제국민들을 복속시키려 하다니.

악질 조직 출신인 내가 이런 말을 하기는 좀 그랬지만 정말 라르딘보다도 더한 악당이었다.

“그럼 해결책은 어떻게 되겠나, 부인.”

요하네스는 마치 나를 시험하는 듯이 물었고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대답했다.

“제일 좋은 방법은 폐하께서 깨어나시는 거겠죠. 그러면 알아서 모든 것을 바로잡으실 수 있을 테니까요. 하지만 어렵겠군요….”

“왜지?”

“이 방법을 당신이 아직까지 생각해 내지 못했을 리가 없으니까요. 그런데 다들 표정이 어두운 걸 보면 안 되는 이유가 있겠죠.”

내 대답에 세예나가 입을 떡 벌리며 작게 박수를 쳤다. 내가 고개를 갸웃하자 세예나가 속삭이듯 말했다.

“마님, 좀 멋있어요!”

“…이게? 나 지금 아무런 도움이 못 됐는데?”

“그게… 설명하기 좀 그렇긴 한데….”

세예나는 눈을 굴리다가 머쓱한 듯 중얼거렸다.

“너무 기대 이상의 역량을 보이시니….”

‘기대 이상’이라는 건 결국 내게 아무런 기대가 없었다는 걸 뜻했다. 본인도 그걸 아는지 말꼬리를 흐렸고 나는 괜찮다는 듯 싱긋 웃어 주었다.

나 역시 설명하기 어렵지만… 조금 엉뚱한, 마냥 해맑은 남부 귀족 영애처럼 대우받는 것이 나쁘지 않았다. 너무 산전수전을 고루 겪어서 그런지 오히려 계속 그렇게만 대접받고 싶었다.

물론 어쩔 수 없이 여기까지 와 버렸지만….

“어쨌든 맞습니다, 마님.”

내가 들어오자 계속 싱글벙글 웃고 있던 베이든이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폐하께서 깨어나시는 건 쉽지 않습니다… 악령을 조종하기 위해 힘을 너무 많이 빼앗기고 있거든요.”

베이든이 빌린 것은 에멘타 주술사의 힘이었다. 나는 유제이가 악령에게 당한 상처를 순식간에 회복시키던 그 에멘타 주술사를 떠올렸다.

악령과 관련된 상해를 기가 막히게 치료한다던데 정말 그 방법을 모르나? 내 표정을 읽었는지 베이든이 천천히 말을 이었다.

“물론 방법이 없는 건 아닙니다만… 불가능합니다.”

“무슨 방법인데?”

“원래 약재로는 최상급 악령의 심장을 최고로 치는데요….”

그 말에 내 눈이 커졌다. 며칠 전 수도로 오는 길에 나는 요하네스로부터 최상급 악령의 심장을 받았다. 결혼 선물로 차마 ‘시간의 돌’은 줄 수 없다면서. 귀한 약재로 쓰이니 이 또한 보물이라며 내게 준 그 심장은 내 방에 고이 모셔져 있었다.

“그게… 원래 최상급 악령의 심장은 10년 넘게 숙성시켜야 제대로 된 효능이 나오는 법이라서요.”

결국 내 방에 있는 최상급 악령의 심장을 10년 이상 묵혀야 한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아마 디에고는 그 전에 악령과 관련된 실험을 완전히 성공시킬 가능성이 높았다.

깔끔하게 그 가능성을 지워 버린 나는 또 한 가지의 방법을 떠올리고 요하네스를 바라보았다.

“20년 전에 당신이 없앤 최상급 악령이 있잖아요! 그때 그 심장 어쨌어요?”

“그게….”

요하네스는 골치 아프다는 듯이 한숨을 쉬었다.

“…그때 신전에 기부했어. 혹시 악령 때문에 고통받고 있는 자가 있다면 이것으로 구해 달라고.”

“와.”

나는 허탈하게 중얼거렸다. 그때만큼은 내 손을 잡고 있는 요하네스의 체온마저도 설레지 않았다.

“이렇게 올바르게 최악의 선택을 하기도 쉽지 않을 텐데.”

“그때의 난 여덟 살이었다는 걸 고려해 주길 바라.”

요하네스가 내 볼을 한 번 건드리고 나서 천천히 말을 이었다.

“그래서… 결국 그 심장을 되찾아야 할 것 같아. 어디에도 그걸 썼다는 이야기는 없으니 대신전의 어딘가에 있겠지.”

“대신전에요?”

“그래.”

그가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웃었다.

“오늘부터 건국제고, 건국제는 대신전에서 주관하는 행사니까. 그리고 엘로이즈, 당신과 나는 대귀족의 일원으로서 그곳에 참석해야 해.”

“아… 맞아요, 그랬죠….”

“신전의 가장 비밀스러운 공간에 ‘푸른 루비’를 핑계로 접근할 예정인데….”

나는 갑자기 나온 ‘푸른 루비’의 이름에 속으로는 흠칫했지만 내색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등으로는 식은땀이 주르륵 흘렀다. 그동안 워낙에 악령을 죽이지 않고 살아서 그런지 ‘푸른 루비’라는 자아 자체가 낯설어져 있었지만, 어쨌든 내가 그 당사자였기 때문이다.

요하네스가 싱긋 웃으며 내 손을 고쳐 잡아 깍지를 꼈다. 손가락 사이로 단단히 그의 손마디가 엉겨 붙었다. 손을 빼지조차 못하게 된 상황에서 그가 내 눈을 마주하고 천천히 덧붙였다.

“그대가 날 좀 도와줄 수 있을 것 같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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