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6화 (27/65)
  • 8년 만의 연회는 성황리에 끝났다. 모두가 오랜만에 열린 사교 행사를 밤이 늦도록 즐겼다.

    그것은 노아비크 공작 부부도 마찬가지인지, 그들 역시 꽤 늦은 시각에 황궁을 나섰다.

    요하네스에게 안기다시피 하여 황궁을 나서는 엘로이즈의 뒤에서 귀족 여인들이 웅성거리며 대화를 나누었다.

    “뭐야, 결국 노아비크 공작 부인과는 한마디도 못 했어.”

    “대체 어떤 여자길래 노아비크 공작과 결혼했는지 궁금했는데….”

    첫 춤은 요하네스가, 두 번째 춤은 오라비라는 시온이 차지했으므로 엘로이즈와 대화할 수 있는 기회가 없었다.

    보통 연달아 두 곡을 추고 나면 세 번째 곡은 추지 않으니 그때 다들 몰려가서 대화를 나눌 생각이었는데, 갑자기 일어난 폭죽 사고 때문에 아수라장이 되었었다.

    그 이후 황태자와 잠시 동행하더니 아예 모습을 감추어 버렸다. 그녀와 어떻게 해서든 대화를 나누어 보려던 귀족들은 모두 허탕을 치고 말았다.

    그나마 그녀의 오라비라는 시온 르노아로 자작이 몇 명의 여인들과 춤을 추었으나, 얼마나 미꾸라지 같은 화법을 구사하는지 엘로이즈에 대해서는 딱히 알아낸 것이 없었다. 그나마도 곧 꽤 귀여운 영애 하나와 몰래 자취를 감추었다고 했다.

    심지어 한동안 모습을 보이지 않던 엘로이즈가 조심스럽게 상기된 얼굴로 발코니에서 나왔을 때에는 모두 ‘혹시 대단한 스캔들이라도 나는 것인가’ 싶어 희망에 찼지만, 그 후 비틀거리는 그녀를 부축하며 함께 나오는 남자가 요하네스라는 것을 확인한 뒤 모두가 실망하고 말았다.

    부부가 이런 곳에서 얼마나 좋은 시간을 보내든 그들에게는 썩 구미 당기는 가십거리가 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발그레한 눈가며 흔들리는 발걸음이며, 최대한 추스르려고 했지만 흐트러진 옷매무새 등이 발코니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뻔히 추론 가능하게 했다.

    “근데 일단 한 가지는 확실하네요. 난 노아비크 공작이 저런 표정을 지을 수 있는 남자인지 오늘 처음 알았어요.”

    “시선이 계속 부인에게만 가 있던데요. 그렇게 웃을 수 있는 사람인 줄도 몰랐네.”

    “뭐… 결혼식도 몰래 약식으로 치렀다는데, 그 악조건 속에서도 북부까지 올라가더니 결국 노아비크 공작을 유혹해 낸 모양이지요.”

    다들 혀를 차며 입을 모았다.

    “남부 출신이면 사실 진짜 귀족인지도 의심스러운 수준인 집안의 영애일 수도 있을 텐데… 제대로 신분 세탁 성공했네요. 노아비크 공작 부인으로.”

    “순진하게 생겨 놓고서는 보통내기가 아닌가 봐요. 부부끼리 불꽃이 튀었으면 공작저의 침대나 데울 것이지, 굳이 이런 연회장에서….”

    평상시 요하네스의 이미지가 워낙에 금욕적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더 충격을 받은 것도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얼마나 달려들었는지 살짝 드러난 엘로이즈의 쇄골에 얼룩이 선명했기 때문이다.

    그동안 ‘레오가 생긴 것이 신기하다’라는 소문이 돌 정도로 여자에 관심이 없었던 요하네스가, 남들의 눈도 의식하지 않고 저렇게 행동했다는 것은 놀라웠다. 그러므로 모두 ‘엘로이즈가 세기의 요부일 것’이라는 데에 입을 모았다.

    그러나 엘로이즈의 입장에서는 상당히 억울한 의견이었다. 그녀로서는 서글프게 사랑을 구걸한 것밖에 없었는데 먼저 입술 한 번 대어 보았다는 이유로 거의 잡아먹힐 듯이 몰려 버렸으니까.

    그것만 해도 상당히 무리였는지, 엘로이즈는 공작저에 돌아오자마자 거의 실신하듯 잠들어 버렸다. 함께 들어와 즉시 잠자리에 든 레오에게 자기 전 인사조차 하지 못할 정도였으니 상당히 피곤했음에 틀림없었다.

    물론 요하네스는 멀쩡한 모습으로 집무실에 앉았다. 페이건과 세예나, 베이든이 빠르게 동석했다.

    그러나 곧바로 오늘 연회에서 있었던 일들에 대해 상의할 줄 알았던 요하네스는 어딘가 생각에 잠긴 얼굴로 말했다.

    “자세한 건 내일 아침에 엘로이즈와 듣도록 하지.”

    “마님이요?”

    페이건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보통 이런 중요한 일을 의논할 때에는 최측근들만 모아서 진행했고, 요하네스는 그동안 명백히 엘로이즈를 의심해 왔기 때문에 그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놀라운 선언이었다.

    “엘로이즈가 오늘 꽤 활약을 해서 말이야.”

    요하네스는 턱을 쓸며 무심하게 말했고 베이든이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아까는 정말… 마님이 안 계셨으면 큰일 날 뻔했지요. 황태자 전하께 걸렸다면 저희는 오늘 무사히 황궁을 나오지 못했을 겁니다.”

    그 말에 세예나와 페이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 정도로 위험한 상황에 노출되었을 줄 몰랐던 탓이다. 심지어 귀엽기는 하지만 딱히 능력은 없어 보이는 엘로이즈가 무슨 활약을 했는지도 짐작이 되지 않았다. 요하네스가 천천히 말했다.

    “본인 말로는 꽤 쓸모가 있을 거라는데 한 번 지켜보지.”

    “쓸모… 요? 대체 무슨 쓸모요?”

    페이건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오히려 그 말이… 조금 의심스러운데….”

    “일단은 무조건 우리 편이라고 하더군. 어떻게든 도움이 될 테니까 믿어 달라고.”

    “그럼요!”

    베이든이 냉큼 환호하듯 대답했다.

    “마님이 저희의 편이 아닐 리 없습니다. 암, 그럼요. 마님께서 오시고 좋은 일들만 생기지 않았습니까?”

    “좋은 일들이 아주 많이 생겼지. 악령이 떼로 달려들고 말이야.”

    요하네스가 살짝 빈정대자 베이든은 갑자기 구역질이 난다는 표정을 해 보였다. 요하네스는 베이든의 파리한 얼굴을 보며 손을 내저었다.

    “그럼 다들 가 봐. 베이든, 나와 오래 붙어 있느라 고생 많았네.”

    요하네스의 명령에 모두 다 예를 갖추고 인사했다. 그리고 모두 문을 열고 나서는데, 페이건이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뒤를 돌았다.

    “아….”

    페이건은 요하네스의 그늘진 눈을 살짝 바라보며 약간 주눅 든 목소리로 물었다.

    “아까 빈센트 엘리어트와 직접 독대하시던데… 혹시 특이한 사안이 있으셨습니까?”

    앞으로는 엘로이즈와 함께 의논한다고 하더라도, 빈센트에 대해서는 엘로이즈가 없을 때 의견을 나누어야 했기 때문이다.

    어쨌든 빈센트는 엘로이즈의 측근일 확률이 높았고, 그가 수상하다면 엘로이즈 역시 의심해 봐야 마땅했다.

    “중점적으로 더 알아봐야 하는 것이 있다거나….”

    요하네스는 가만히 페이건을 바라보았다. 페이건은 잠시였지만 요하네스의 얼굴에 명백한 좌절감이 비쳤다고 생각했다.

    “…없어.”

    어딘가 비참해 보이는 표정으로 요하네스가 천천히 말했다.

    “수상한 점은… 없었다.”

    ⚜ ⚜ ⚜

    눈을 떴을 때, 머리맡에 쪽지 하나가 놓여 있었다.

    곤히 자고 있어서 깨우지 못했다. 준비되는 대로 집무실에 올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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