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5화 (26/65)
  • 그 어두웠던 밤이 생각났다.

    물가에서 에이데이가 조용히 물을 먹고, 갑자기 고요해진 세상에는 단둘뿐인 것 같았고, 아릿하게 상처 입은 발목이 그에게 붙잡혀 있던 그 밤.

    다시는 마주치지 않을 줄 알았는데, 결혼한 지 얼마 안 되어 북부로 넘어온 요하네스를 보며 ‘참 예상할 수 없는 상대’라고 속으로 욕하던 밤.

    요하네스는 언제나 내 예상을 벗어났다. 지금 이 순간까지도. 내가 그를 진심으로 좋아하게 될 줄은 그때만 해도 예상하지 못했으니까.

    그 밤, 그는 이토록 오연한 눈으로 나를 보며 자신을 주겠다 말했다. 퇴폐적이고 야하지만 긴장한 내색은 전혀 보이지 않는 얼굴로.

    그러나 지금 내게 같은 제안을 하고 있는 요하네스 노아비크는… 명백히 그때보다 더 긴장해 있는 것 같았다.

    조금의 미소도, 조금의 여유도 보이지 않는 그 눈빛이 마치 폭풍처럼 내게 밀려오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나는 그의 긴장을 의식할 처지도 되지 못했다. 형식적인 미소도 지어 보이지 못할 만큼 덜덜 떨고 있었기 때문이다. 와인을 괜히 마신 건지 심장이 두근두근 뛰고 피가 빠르게 돌았다.

    “요하네스….”

    나는 그의 눈을 간절히 바라보며 말했다.

    “당신을 줘요, 내게. 제발.”

    그때 요하네스가 자신을 매물로 내놓으며 요구했던 것은 ‘자신의 편이 되어라.’였다. 비밀과 속셈을 모두 털어놓는 대가로 무엇이든 해 주겠다고 했었다.

    “오늘 봤잖아요. 난 디에고의 사람이 아니에요. 오히려 그의 음모를 파헤치고 싶은 사람이에요.”

    여유롭게 하려던 말인데 이상하게 절실해졌다. 나는 마치 벼랑 끝에 선 사람처럼 필사적으로 말했다.

    “그 사람… 분명히 나쁜 일을 하고 있을 거예요. 악령을 조종해서 노아비크에 비극을 일으킬 사람이에요. 난 진심으로 당신과 레오를 지키고 싶어요.”

    요하네스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가만히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손이 닿아 있는 뺨이 잘게 떨렸다.

    “같은 편이 되어 줄 테니까, 앞으로도 내가 요하네스의 편이라는 걸 증명할 테니까… 약속 하나 해 주면 안 돼요?”

    “뭔데.”

    그의 목소리가 잔뜩 갈라져 있었다. 나는 심호흡을 한 번 하고 속삭였다.

    “날 사랑해 줘요.”

    베이든이 늘 말했다. 사랑을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한다고.

    절대 그 사람이 하지 않을 일들도 하게 만든다고.

    “노아비크의 사명 중에는 ‘시간의 돌’을 지켜서 혼란을 막아야 한다는 것도 있어, 엘로이즈.”

    요하네스는 민간인에게 절대로 ‘시간의 돌’을 유통하지 않겠다고 했었다.

    “만일 당장 죽어 가는 사람이 날 붙들고 부탁해도 들어주지 않을 거야.”

    그는 허튼 말을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정말 눈앞에서 사람이 하나 죽어 나가더라도 절대로 ‘시간의 돌’을 주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 상대가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레오가 죽었을 때 그는 시간을 돌리기 위해 최상급 악령을 죽였다. 그러니까 나를, 레오만큼만 사랑하게 되어도….

    하지만 나는 상대에게 사랑받기 위해 유혹하는 법을 몰랐다. 시온도 끝까지 가르쳐 주지 않았다. 그가 내게 한 조언은 ‘그저 진심을 이야기해라.’라는 것뿐이었다.

    “제가 더 잘할게요.”

    이상하게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당당하고 여유 있게, 매혹적인 미소를 지으면서 하고 싶은 말이었는데 요하네스 앞에서 나는 자꾸 초라해졌다.

    “더… 더 도와줄게요. 저 꽤 영리해요…. 요하네스도 그랬잖아요, 당신의 사람으로 만들고 싶다고.”

    “…….”

    “당신을 줘요, 요하네스. 하지만 껍데기 말고, 다 줘요. 네?”

    “…….”

    “당신, 아무도 사랑할 수 없을 거라고 했지만… 그래도 해 봐요.”

    요하네스는 그날 밤, 자신은 그 누구도 사랑할 수 없다고 했다. 자신의 인생에는 사랑 같은 건 개입될 수가 없다고, 사랑을 떠나 이뤄 내야만 하는 것들이 있다고 말했다.

    그게 왜 ‘푸른 루비’와 연관되어 있는지 나는 아직 알아내지 못했지만, 이제 나는 궁금해하는 것에도 지쳤다.

    “내가 노력할게요. 열심히 할게요. 그러니….”

    나는 잠시 말을 멈추고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이미 이 유혹이라고 할 수 없는 유혹은 망한 게 뻔했다. 요하네스는 황홀한 표정이 아니라 어딘가 비참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러니 날 사랑해 봐요….”

    말은 마무리 지어야 했기에 어쩔 수 없이 덧붙였지만, 사랑이 구걸해서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건 나도 잘 알고 있었다.

    요하네스가 내게 부탁했기에 그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의 작은 행동 하나하나에 젖어 들어 여기까지 온 것이었다. 반대로, 요하네스가 아닌 다른 사람이 내게 사랑을 요구해도 나는 그 사랑을 줄 수가 없었다.

    ‘괜히 말했어… 한번 말을 시작하니 나도 모르게 감정이 북받쳐서 쓸데없는 말까지 다 쏟아 내 버렸어….’

    그냥 대충 그의 눈을 바라보며 시온처럼 야살스럽게 웃기라도 할 것을, 괜한 짓을 했다 싶어 울적해졌다.

    아무리 사랑하는 상대에게 나와 같은 감정을 바라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해도… 이렇게 비굴하게 부탁할 건 아니었는데…. 목숨만 걸려 있지 않았더라도, 이렇게 비참하게 내 마음을 고백할 일은 없었을 텐데… 나도 자존심이라는 게 있는데.

    내가 한 건 유혹이 아니라 구걸이었다. 제안이 아니라 고백이었다. 가장 소중한 마음을 내비치면서도 초라할 수밖에 없는 처지가 슬퍼서 나는 비참해졌다.

    “이번 연회 때, 유혹에 성공하실 것 같습니다.”

    베이든의 찻물 점은 틀렸다. 하긴, 괜히 점을 재미 삼아 치는 것이라고 하는 게 아니니까.

    요하네스와 함께 왈츠를 출 때에는 기분이 정말 날아갈 것만 같았는데… 마정석의 테이블을 겨냥했을 때에도 그다지 긴장되지 않았는데….

    내가 시무룩한 얼굴로 고개를 서서히 숙일 때였다.

    “그런 표정하고 있으면, 엘로이즈.”

    그가 갈라진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불렀다. 그리고 내 뺨을 잡고 있던 손에 힘을 주어 다시 그를 바라보게 했다. 시선이 단번에 마주쳤다.

    “정말 못되게 굴고 싶어져.”

    그의 눈동자가 한층 더 탁해져 있었다. 평상시의 여유로움은 전혀 느껴지지 않는 갈급한 표정으로 그가 추궁하듯 물었다.

    “왜지?”

    “…네?”

    “왜 내게 사랑을 원하는 거지? 대체 왜?”

    “그거야….”

    나는 가만히 그를 바라보다가 토해 내듯 말했다. 그 순간만큼은 따끔거리는 심장의 통증마저도 의식되지 않았다. 다만 목소리가 덜덜 떨리며 눈물이 고였다.

    “제가… 제가 당신을 좋아하니까….”

    그에게 수도 없이 했던 말이었다. 첫눈에 반했다는 말부터 시작하여 결혼했고, 북부에서 쫓겨나기 싫어서 ‘당신이 좋다’라는 말을 숨 쉬듯이 해 댔다.

    그리고 이런 말을 할 때면 그는 항상 헛소리하지 말라고 하거나 그냥 대충 피식 웃으며 넘겨 버렸다.

    그러므로 내 하찮은 고백은 어차피 이번에도 무시될 것이었다. 내가 반쯤은 포기 상태로 중얼거렸다.

    “당신을 알면 알수록… 더 좋아지니까 그렇죠.”

    “그래?”

    그러나 ‘믿지 않는다.’라고 하며 빈정거릴 줄 알았던 그는 천천히 고개를 숙여 내 바로 앞까지 다가왔다. 갑자기 가까워진 얼굴에 숨이 막혔다.

    “그럼….”

    그가 가늘게 뜬 눈으로 속삭였다.

    “…그것부터 증명해 봐.”

    “같은 편이 되어 줄 테니까, 앞으로도 내가 요하네스의 편이라는 걸 증명할 테니까….”

    내가 아까 뱉었던 ‘증명’이라는 말을 내게 돌려준 것이나 다름없었다. 나는 눈물까지 고인 눈으로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아무리 이런 분위기를 잘 모르는 나라고 하지만 본능적으로 그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 것 같았다.

    지금 이 순간, 나 역시 원하고 있는 것이기도 했다.

    북부와는 다른 후덥지근한 공기가 우리를 감싸고 있었다. 큰 보름달이 환하게 우리를 비추고 있었고, 커튼과 문으로 단절된 연회장의 세계는 이제 완전히 남의 일인 것만 같았다.

    “청혼한다고 해서 나, 나, 남성적 능력을 원한다는 말은 아니었어요. 전혀요. 그때도 말했잖아요.”

    그때 그 말을 뱉었던 나와 지금의 나는 확연히 달라져 있는데… 요하네스는 그때와 똑같을지 궁금했다.

    여전히 본인 스스로를 헐값에 내놓을 정도로 세상 모든 것에 의미를 두지 않는 남자인 건지, 아니면 나처럼 무언가가 아주 많이 달라져 있을지….

    “네.”

    나는 가까스로 속삭이듯 대답했다.

    “증명할게요.”

    그리고 발돋움을 해서 단숨에 그에게 키스했다.

    부드럽게 입술이 부딪혔다. 단지 그뿐인데도 불구하고 발끝까지 짜릿하여 눈이 질끈 감겼다. 요하네스의 한쪽 팔이 내 허리를 감싸고 자신의 쪽으로 깊게 끌어당겼다.

    팽팽했던 무언가가 뚝, 하고 끊긴 것처럼 갑자기 머릿속이 엉망이 되었다.

    숨이 엉키며 온몸이 죄어들었다. 어느새 밀착한 몸 사이로 서로의 심장이 거세게 뛰는 것이 느껴졌다.

    “아….”

    내 한쪽 뺨을 감싼 그의 손이 천천히 내 머리를 받쳤다. 마치 거세게 침입해 오는 것 같은 그의 몸에 내가 밀려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 떨림, 이 체온, 이 공기를 이대로 영원히 기억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움직임 하나 숨결 하나 새어 나오는 신음 하나하나가 모두 아쉬웠다.

    먼저 입술을 맞댄 사람은 분명 나인데, 어느 순간 나는 마치 잡아먹히는 것처럼 그의 품 안에서 할딱이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다리가 얽혔다.

    “그날 밤부터 예감이 좋지 않았어.”

    입술을 마주한 채로, 그가 낮게 중얼거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절박하게 빌었던 사람은 나 같은데, 오히려 그가 모든 것에 패배한 것 같은 목소리를 하고 있었다.

    “네가 내 모든 것을 망치고….”

    다급하게 내 몸을 자신의 몸에 더 밀착시키는 그의 손짓은 어딘지 모르게 절망적으로 느껴졌다.

    “…날 엉망으로 만들 것만 같았지.”

    딱히 대화를 할 생각은 없었는지, 그는 내가 대답을 할 새도 없이 다시 내 입 안을 파고들어왔다. 체격차가 워낙에 나는 나머지 나는 마치 작은 새끼 짐승처럼 안겨 속절없이 그를 받아들여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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