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4화 (25/65)

요하네스는 시온의 예상대로 보란 듯이 내가 있는 발코니로 쫓아온 것이다. 아마 페이건이 보고했겠지.

그렇다고 하더라도 사적으로 휴식을 취하고 있는 발코니에 노크까지 했다는 건 어떻게 보면 무례하기까지 한 처사였다. 심지어 상대가 오라비인데 말이다.

“잘 들어, 엘로이즈.”

시온이 속삭이듯 중얼거렸다.

“절대로 네 마지막 패를 보이면 안 돼. 상대 역시 널 유혹해서 이용할 수도 있다는 걸 잊지 마.”

“…그걸 …그걸 어떻게 아는데.”

나는 꺽꺽대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요하네스가 날 이용하는지… 어떻게 아냐고.”

“그거야말로 단순해 빠진 문제야. 만일 요하네스가 널 이용해 먹었다면….”

시온은 피식 웃으면서 곧바로 대답했다.

“이런저런 핑계를 대면서 네가 필요한 걸 주지 않겠지. 결론만 보면 돼, 결론만. 과정 같은 건 생각해 봤자 헷갈리기만 해.”

우리가 서로 속삭이기만 할 뿐 밖에 답을 주지 않아서 그런지, 다시 한번 노크 소리가 들렸다. 이전 것보다 더 신경질적이고 급한 노크였다.

“엘로이즈?”

다소 여유가 없는 듯한 낮은 목소리가 울렸다. 나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발코니의 문을 열며 웃었다.

“요하네스.”

잠시 문을 열어 마주한 연회장의 모습은 마치 다른 세상 같았다.

명랑하고 경쾌한 음악,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 좋은 향기와 따뜻한 공기의 온도…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등 뒤에 둔 요하네스가 나를 형형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어쩐 일이에요?”

내 말에 요하네스는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남편이 부인을 찾아오는 건 당연한 일 아닌가. 심지어 큰일도 있었는데.”

“아.”

나는 생긋 웃어 보였다. 벌써부터 몸이 바짝 긴장했다.

“맞아요… 그랬죠.”

그가 나를 빤히 바라보다가 천천히 내 뒤에 있던 시온에게 시선을 옮겼다.

“르노아로 자작과 쉬고 있었군.”

시온은 씩 웃으면서 천천히 기대고 있던 난간에서 몸을 떼었다. 그러고는 손에 들고 있던 와인 잔을 부드럽게 요하네스에게 넘겼다.

“잘됐군요, 공작님. 엘로이즈가 발목이 좀 아픈 것 같아서 데려왔는데… 사실 저는 연회를 즐기고 싶긴 했거든요.”

시온이 능글맞은 미소를 지으며 내 어깨를 툭툭 쳤다.

“그럼 엘로이즈, 남편하고 좀 쉬고 있어. 난 내 영혼이 부르는 곳으로 간다.”

내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시온은 내게 팔랑거리며 손을 흔든 뒤 발코니를 떠나 연회장 안으로 들어갔다.

요하네스의 등 뒤로 다시 문이 닫혔다. 따뜻하고 환한 세계가 천천히 다시 사라졌다. 육중한 문과 꼼꼼히 쳐진 커튼을 뒤로 한 요하네스의 서늘한 얼굴만이 시야에 가득 잡혔다.

“아하하… 시온도 참.”

나는 이상하게 긴장하고 있는 몸을 추스르며 대수롭지 않다는 듯 머리카락을 넘겼다.

“어지간히 여자들한테 가고 싶었나 보네요.”

“그러게.”

요하네스는 천천히 발코니 안쪽으로 걸어 들어와 우아하게 몸을 기대었다. 그러고는 나를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

“난 어지간히 너한테 오고 싶었고.”

“세상에.”

괜히 머쓱해서, 나는 손에 들고 있던 와인으로 입술을 축였다. 그나마 술이라도 들고 있어서, 민망하게 멀거니 서 있지 않아도 되어 다행이었다.

“그렇게 말하면 저 떨려요.”

“왜?”

“설레서.”

나는 배시시 웃으면서 대답했다. 나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던 요하네스가 시온이 건넨 와인을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물었다.

“아까는 어떻게 된 거지?”

“아….”

이미 다 알고서 하는 질문이겠지만, 나는 싱긋 웃으며 곧바로 대답했다.

“춤을 추다가 제가 발목을 다친 걸 시온이 알게 돼서… 의원에 가야 한다고 난리를 치다가 갑자기 황궁에 불이 나갔지 뭐예요? 걱정되어서 레오에게 갔는데… 그때 황태자 전하께서 레오에게 황궁 구경을 시켜 주신다고 하셔서 따라나섰어요.”

“왜.”

요하네스는 추궁하듯 물었다.

“왜 따라갔는데.”

“…그냥 …불안해서요.”

그가 이해를 못 하겠다는 듯이 미간을 찌푸려 보여서, 나는 재빠르게 말을 이었다.

“레오는 아직 어리잖아요. 황태자 전하께서 저희를 못마땅히 여기시는 걸 누구나 다 아는데 어떻게 혼자 보내요.”

“진짜 보호자같이 말하는군.”

“진짜 보호자인데요. 서류상 저는 레오의 엄마고요.”

연회장 안쪽에서 들려오는 음악 소리가 여전히 포근했다.

연회가 시작될 때, 불과 얼마 되지 않은 시간에 나와 요하네스는 서로 킬킬거리며 저 따스한 음악에 맞추어 춤을 추었다. 살짝 설레는 눈빛을 서로 주고받으며, 약간의 선을 넘나드는 농담을 해 가며, 자연스럽게 지어지는 미소를 어쩌지 못하며.

그러나 지금 우리는 마치 딴 세상에 존재하는 것만 같았다.

남들이 보지 못하는 어둡고 외진 장소에서 잔뜩 긴장한 채 서로의 의도를 짐작하려 애쓰고 있었다. 그 괴리가 순간적으로 나를 서럽게 했다.

아무리 남들 앞에서 정말 ‘사이좋은 부부’를 연기한다고 해도, 그 연기에 심취하여 실제로 즐거웠다 해도 이것이 우리 관계의 본질이었다. 상황에 따라 언제든 날카롭게 의심하고 또 그 의심을 피해 내야 하는 사이.

“그러다가 우연히 당신을 본 거고… 들키면 안 되는 상황인 것 같아서 도와드린 것뿐이에요.”

나는 초조함을 감추기 위해 다시 한번 와인을 한 모금 삼켰다. 요하네스가 다시 무뚝뚝한 목소리로 물었다.

“왜 나를 도와줬는데.”

“당연한 거 아니에요? 남편이잖아요.”

“진짜 부인처럼 말하는군.”

“진짜 부인인데요. 설마 저랑 가짜 결혼식 올리셨어요?”

가만히 나를 바라보고 있는 그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나는 기죽지 않고 그를 마주 바라보았다.

수려한 이목구비와 빛나는 황금색 눈, 단정하고 깔끔한 옷매무새. 연회에는 수많은 남자들이 있었지만 사실 그밖에 눈에 보이지 않았다. 요하네스 노아비크보다 시선을 잡아 끄는 남자는 없었으므로.

내게 저렇게 무서운 눈을 하고 있는 지금 이 순간조차도 그는 근사했다. 이 와중에도 두근거리는 심장이 새삼스러워 나는 내 스스로 한심스러울 지경이었다.

‘하나만 해. 아프거나, 아니면 두근거리거나…. 두 개 다 하는 건 너무 비양심적이지 않니.’

스스로 나 자신을 한심해하는 동안, 요하네스가 낮게 말했다.

“엘로이즈, 난 사실 그대가 디에고의 첩자인 줄 알았어.”

“…아니라고 몇 번을 말씀드렸잖아요.”

“그런데… 네 말대로 그건 아닌 듯하군.”

그의 표정은 편안하지 않았다. 오히려 괴로워 보였다. 그가 한 발짝 내게 다가왔고, 나는 나도 모르게 드레스 자락을 움켜쥐었다.

“만일 이 모든 게 황태자와 네가 짠 판이라고 해도 속아 넘어갈 수밖에 없을 정도야.”

그가 내 앞으로 다가올수록, 처음 맡아보는 옅은 시가 냄새가 은은하게 풍겨 왔다. 나는 뒷걸음질 치지 않고 그의 앞에서 당당히 눈을 깜빡였다. 요하네스가 지척까지 다가온 뒤 물었다.

“날 보고 첫눈에 반했다고 했지. 그게 언제야?”

그동안 요하네스는 단 한 번도 ‘대체 언제 나를 처음 보았느냐.’라는 질문을 하지 않았다. 애초에 첫눈에 반했다는 내 거짓말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살짝 입술을 달싹이다가 대답했다.

“…막 성인이 되었을 때, 성력 검사를 하고 신분증을 발급받으러 수도에 왔다가 ‘푸른 루비’를 추적하고 계신 모습을 먼발치에서 뵈었어요. 별건 아니고… 그냥 잘생기셔서 자꾸 생각이 났어요.”

당연히 거짓말이었다. 요하네스는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그… 세상에 없다는 네 첫사랑과 비슷한 감정인가?”

“어… 음….”

하나는 거짓이고 하나는 참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비교하는 건 조금 힘들었다. 그래서 나는 아예 다른 말을 했다.

“그게 별로 중요한 것 같지는 않아요.”

“왜지?”

“왜냐하면… 그런 일회성의 감정 동요는 이제 제게 큰 의미가 되지 못하니까요.”

요하네스는 일렁이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지금 이 순간 요하네스가 그 어느 때보다도 크게 갈등하고 있음을 알았다.

“요하네스.”

나는 조용히 와인 잔을 테이블에 내려놓고 조용히 말을 꺼냈다.

“당신이 북부에 와서 나를 처음으로 만난 밤, 기억해요? 악령을 죽이고 벼랑 끝으로 함께 떨어지던 그날 밤.”

요하네스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고,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때 저한테 말했죠, 요하네스 당신을 주겠다고.”

“…그랬었지.”

그가 잔뜩 잠긴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제 우리는 상당히 가까운 거리에 있었는데, 손가락 하나 닿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그의 눈에 선명한 욕망이 담겨 있었다.

나는 그를 보고 있는 내 얼굴도 저런 표정일지 궁금했다. 더 이상 억지로라도 웃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내 얼굴에도 저렇게 숨길 수 없는 욕망과 이상한 처절함이 마구 섞여 있을까.

나는 한 번 숨을 삼키고 간신히 말했다.

“그거 아직 유효해요?”

“싫다고 하지 않았나.”

요하네스는 내게 눈 한 번 떼지 않고 짧게 말했다.

“아주 기겁하던데.”

“그건… 그때고요.”

요하네스 앞에서 더한 말도 했던 것 같은데 이상하게 움츠러들었다. 대체 왜 이런 상황에서 용기가 필요한 건지 알 수 없었으나, 나는 내 안의 호승심을 모두 끌어모아야 했다.

정말… 정말 이게 맞는 거야, 시온?

덜덜 떨면서 말을 뚝뚝 끊어 먹는 내가 나 스스로도 한심한데, 이런 것이 정말 먹히는 유혹일 리가 없었다. 그러나 시온은 내게 아까 이렇게 지시했다.

“하고 싶은 말을 다 해, 엘로이즈. 진심을 다해서. 네가 느끼는 욕망, 네가 남긴 아쉬움, 네가 바라는 마음, 그대로 전달하면 돼. 꾸밈없이.”

정말 그런다고 해서 제대로 된 유혹이 되는 건 맞는 거야, 시온? 유혹을 하기는커녕 마치 잡아먹힐 것만 같은 분위기인데 이거 잘되어 가고 있는 거야? 이 상황을 조금도 내가 주도하고 있는 것 같지가 않은데….

내가 심호흡을 한 번 하고 다음 말을 덧붙이려는데 요하네스가 가볍게 손을 들어 내 뺨을 감쌌다.

“그럼 지금은 어때.”

그의 길쭉한 눈이 가느스름해졌다. 어느새 탁해진 눈동자가 너무나 가까이 있었다.

이제 연회장 안에서 경쾌하게 연주되고 있는 음악 같은 건 들리지도 않았다. 그가 붉은 입술을 열어 느릿하게 물었다.

“아직 그 제안이 유효하다고 하면.”

심장이 터질 듯이 뛰었다. 나도 모르게 아랫입술을 물었다. 그의 살짝 갈라진 목소리가 유혹하듯 이어졌다.

“지금은 그때와 다른 답을 들을 수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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