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3화 (24/65)
  • “잘 다녀오셨어요?”

    나와 레오가 도착하자마자 아이들의 파티장에서 안절부절못하며 기다리고 있던 세예나와 페이건이 단번에 다가왔다. 나는 싱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별일 없었으니 걱정하지 마.”

    레오는 들고 있던 오르골을 세예나와 페이건에게 보여 주며 자랑스럽게 얘기했다.

    “이거 선물로 받았어. 오베딘 황태자님의 수집품 중 하나래.”

    그리고 그 말을 들은 아이들이 슬금슬금 레오의 곁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예쁘장하게 생긴 소녀 하나가 레오의 근처까지 다가오더니 은근슬쩍 물었다.

    “공자님… 한 번 구경해 봐도 될까요?”

    어느새 또래 아이들의 시선이 모두 레오에게 몰려 있었다. 하긴, 황태자가 직접 황궁 구경을 시켜 준다고 데리고 나갔으니 외부에는 상당한 특혜로 보일 수밖에 없었다.

    “저도 한 번….”

    아이들이 관심을 가지고 몰려들자 레오의 귀 끝이 벌겋게 물들었다. 하지만 살짝 올라가는 입꼬리를 보아하니 싫은 내색은 아니었다. 나와 같은 생각인지 세예나가 싱긋 웃으며 레오의 등을 살짝 두드려 주었다.

    “공자님, 다들 공자님이 가져오신 오르골을 보고 싶어 하는데요? 저기 테이블에 가시는 게 어때요?”

    레오는 또래들과 어울리는 것이 싫지 않은지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아까 내게 ‘그다지 파티가 재미없다.’라고 한 것은 어린아이 특유의 허세였음이 틀림없었다.

    “재미있게 놀아, 레오.”

    나는 레오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어 주며 웃었다. 보호자는 이제 빠져 줄 때였다.

    “그럼 난 이제 공작님께 가 볼게. 아마 걱정 많이 하고 계실 거야. 레오를 찾는 친구들도 많고 말이야.”

    레오는 민망한 듯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 나를 보내는 게 괜히 마음에 걸리는지 내 귀에 대고 속삭였다.

    “다들 제가 노아비크 공자라서 잘해 주는 거예요….”

    나는 눈을 깜빡이며 대답해 주었다.

    “아주 좋네. 아무나 못 가지는 배경이니까 최대한 즐겨, 레오. 가장 잘해 주는 아이를 옆에 두도록 해.”

    예상했던 대답은 아닌지 레오가 조금 당황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바로 옆에 있어서 내 말을 들을 수 있었던 세예나가 뒤통수를 긁으며 거들었다.

    “놀랍게도 틀린 말은 아닌 것 같습니다, 공자님….”

    어쨌든 레오는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인 뒤 새로 사귄 친구들 사이로 사라졌다. 또래 아이들 사이에 둘러싸인 레오의 뒷모습을 한참 바라보다가 돌아서는 내게 페이건이 따라붙었다.

    “아, 제가 에스코트하겠습니다.”

    “고마워.”

    나는 페이건과 함께 연회가 한창일 위층으로 올라갔다.

    잠시 마법 아티팩트 소동이 일어난 것이 아예 무색할 만큼 연회장은 다시 호화롭게 번쩍이고 있었다. 그새 마정석의 위치가 완전히 복구된 것이다. 즐겁고 화기애애한 분위기도 마찬가지였다.

    “엘로이즈!”

    그리고 내가 위층에 도달하자마자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시온이 다가왔다. 나는 옆에 있는 페이건을 의식하며 살짝 웃었다. 이제부터 또 다른 연기의 시작이었다.

    “황태자 전하께서 황궁 구경을 잠시 시켜 주셨어. 재미있긴 했는데, 좀 다리가 아프네. 춤은 못 추겠다. 근데 빈센트는?”

    내가 빈센트의 안부를 묻자 시온이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집에 보냈어. 아무래도 사교적이지 않은 성격이다 보니 멀거니 서 있는 게 신경만 쓰여서.”

    “아….”

    나는 알 만하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모두 계산된 일이었다.

    모든 판을 짠 시온은 이 시점에 대해서 굉장히 완고했다. 빈센트는 요하네스의 시선을 잠시 끌어내는 그 순간 외에는 연회장에 있으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이유를 물어도 딱히 대답해 주지 않았는데, 아마 빈센트가 연회에서 빙빙 겉돌까 봐 걱정되어서인 것 같았다. 하기야, 빈센트는 연회를 조금도 즐기는 성격이 아니었으니까.

    “어쨌든 다리가 아프다고? 발목을 조심했어야지!”

    시온은 짐짓 눈꼬리를 올려 보이며 화를 낸 뒤 내게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누구나 다 들을 수 있도록 크게 말했다.

    “너 여기 있으면 아마 춤 신청을 받을지도 몰라. 아무래도 안 되겠어. 발코니에 가서 좀 쉬고 있자.”

    나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며 시온의 손에 내 손을 올렸다.

    “페이건, 나 조금 쉬고 올게요. 혹시 무슨 일 있으면 말해요.”

    “아, 네…. 알겠습니다.”

    아무리 페이건이라고 해도 사적으로 귀족들이 휴식을 취하는 발코니까지 따라올 수는 없었다. 페이건을 뒤에 둔 채로 시온은 발코니로 향하면서 와인을 두 잔 챙겨서 내 손에 쥐여 주었다.

    “기억해, 엘로이즈. 여기서 네가 뭘 해야 할지는 알지?”

    비어 있는 발코니로 향하면서 시온이 낮게 말했다. 시온은 ‘발코니에 있으면 요하네스가 알아서 찾아올 것이다.’라고 이후의 계획을 설명했었다.

    그리고 그때… 내가 해야 할 일에 대해서도.

    “요하네스를 유혹하라는 거지?”

    나는 한숨을 섞어 대충 대답했다.

    “노력은 해 볼게. 사실 별 가망은 없는 것 같지만.”

    연회에 온 순간부터 계속해서 긴장한 상태로 일을 치러서 그런지 벌써부터 힘이 빠지는 느낌이었다.

    연회장 구석에 있는 발코니는 시온의 마지막 계획이 이루어질 장소였다. 내가 요하네스를 유혹할 곳. 연회에서 다들 눈이 맞아 들어오는 외진 발코니.

    하지만 단둘이 밀폐된 공간에 있는 건 지금까지 많이 해 봤다. 당장 수도로 오는 마차에서도 오랫동안 둘만 있었다. 하지만 그동안 아무런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심지어 어젯밤에도.

    그러므로 나는 딱히 할 수 있다는 기대를 버린 상태였다.

    “긴장해. 지금 이게 가장 중요한 순간이니까.”

    시온은 굳은 얼굴로 말했고 나는 성의 없게 고개를 끄덕였다. 시온은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는 했지만 사실 나는 오늘 일이 다 끝난 것 같아서 이미 긴장이 풀린 상태였다.

    베이든과 요하네스가 어떤 단서를 찾아냈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어쨌든 나는 그들에게 결정적인 도움을 줬다. 나중에 ‘시간의 돌’을 두고 거래할 때에 분명히 큰 건수가 되어 줄 것이다.

    심지어 디에고의 눈에서 그들을 숨겨주기까지 했다. 어떻게 보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한 셈이었다.

    발코니에 도달한 시온은 담담하게 문을 닫고 커튼까지 쳤다. 사적인 시간을 방해하지 말라는 메시지이기도 했다. 완전히 둘만의 공간이 된 것을 확인한 후에 시온이 진지하게 말을 꺼냈다.

    “엘로이즈, 너는 요하네스를 믿는다고 말했지. 그는 빚을 지는 것을 싫어하고 계산이 확실한 남자니까… 먼저 도움을 잔뜩 준 다음, 나중에 거래하자고 하면 분명히 응해 줄 거라고.”

    “응.”

    나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확실해.”

    “…확실한 건 없어, 엘로이즈. 상대는 요하네스 노아비크야.”

    시온이 눈을 가늘게 뜨며 경고했다.

    “무조건 유혹해 놔. 너를 사랑할 수 있게. 너와의 거래에 응해서 네 부탁을 들어주는 게 아니라, 너를 사랑하기 때문에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상태로 만들어야 한단 말이야.”

    “그게 말이 쉽지….”

    시온의 말 그대로, 상대는 요하네스 노아비크였다. 지금껏 아무리 ‘좋아한다’라며 달라붙었어도 눈썹 하나 꿈쩍하지 않는 남자. 나는 요즈음 꽤 잦아진, 따끔한 심장의 통증을 모른 체하며 부루퉁하게 대꾸했다.

    “어쨌든 해 보긴 할게.”

    “그리고 하나 더.”

    시온은 내 성의 없는 대답에도 불구하고 더 심각하게 말을 이었다.

    “절대로 정체를 들키지 마. 네가 ‘푸른 루비’라는 걸 말하고 싶어도 끝까지 말하면 안 돼.”

    “…무슨 소리야?”

    “상대를 유혹해서 누군가를 이용한다는 건… 우리만 하는 생각이 아니라는 걸 알아 둬.”

    시온의 표정이 진지하기 짝이 없었기 때문에, 나는 심각하게 팔짱을 낀 채 그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시온은 착잡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요하네스 노아비크도 거꾸로 우리를 이용할 수 있다는 소리야.”

    “이… 용?”

    “그래. 보아하니 위험에 빠진 쪽은 거기도 마찬가지인데… 네 능력을 눈치챈다면, 너를 유혹해서 이용해 먹을 수도 있어. 솔직히 내가 요하네스 노아비크라면 네 정체를 알아도 침묵할 거야. 알아서 이렇게 도움이 되어 주니 말이야.”

    나로서는 전혀 생각해 보지 못한 측면이었다. 생각해 보니 요하네스 입장에서는 가만히 있어도 내가 도움을 주고 있는 셈이었다. 내가 벙찐 얼굴로 눈을 깜빡이자 시온이 냉철하게 덧붙였다.

    “그리고 정말로 자기들이 안전해졌을 때 널 신전에 처넣겠지. 기억해, 넌 엘로이즈 르노아로도 아니고, 엘로이즈 노아비크도 아니고, 요하네스 노아비크가 그토록 열심히 쫓던 ‘푸른 루비’야.”

    “…….”

    “유혹하는 주체는 너야, 엘로이즈. 그걸 잊지 마. 절대로 요하네스 노아비크에게 마음을 주지 마. 모든 걸 망쳐 버릴 수도 있으니까.”

    시온의 푸른 눈이 경고하듯 서늘하게 빛났다. 마치 요하네스에게 흔들리고 있는 내 마음을 다 안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시온이 짚어 준 말은 생각보다 가슴에 깊게 남았다. 내가 ‘푸른 루비’인 것을 눈치채도 가만히 두어 이용한다…. 어차피 요하네스에게 이로운 일을 해 주고 있으니까….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한 측면이었다.

    “…요하네스 노아비크는… 남을 이용해 먹는 사람이 아닌데….”

    “그래, 입 험하게 쓰고 오만방자한 것 외에는 평판이 괜찮더군. 부정하지 않겠어. 요하네스 노아비크는 좋은 사람이야.”

    시온은 비웃듯이 입술을 말아 올리며 덧붙였다.

    “‘푸른 루비’ 외의 사람들에게는.”

    그 말에는 부정할 수 없어 내가 살짝 한숨을 쉴 때였다. 발코니의 닫힌 문으로 노크 소리가 들렸다.

    순간 숨이 멎는 것 같았다. 노크 소리만 들어도 누가 왔는지 알 것 같아서였다.

    시온은 그것 보라는 듯이 얄밉게 웃어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시온이 연회 전에 예상한 대로 일이 돌아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이 끝나면 너와 나는 발코니로 갈 거야.”

    “발코니?”

    “그래. 그럼 요하네스가 아마 주인 잃은 개처럼 득달같이 쫓아올 거다.”

    “…설마.”

    “진짠데. 그날 두고 봐.”

    나는 마른침을 삼키며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엘로이즈.”

    다소 다급한 것 같은 노크 소리 이후, 요하네스의 낮은 목소리가 이어졌다.

    “거기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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