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오.”
디에고가 레오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상냥하게 말했다.
“노아비크에게도 이능에 관련된 여러 가지 이야기가 있겠지만, 벨리아나스에도 핏줄에만 이어져 오는 아주 신기한 전설이 있단다.”
레오의 옆에 서서 그 손을 꼭 잡은 엘로이즈가 보였다. 디에고가 여기저기 선반에 놓여 있는 잡동사니를 가리키며 말했다.
“내 형, 오베딘은 어릴 때부터 노아비크에 대한 막연한 환상이 있어서 공작가와 관련된 많은 유물들을 골라 모았단다.”
“노아비크에… 환상이요?”
레오가 눈을 깜빡이며 물었고 디에고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생각보다 두 집안은 아주 가깝단다. 악령을 불러낸 단테 노아비크가 받았던 첫 신탁 역시 두 가문에 관련된 것이었거든.”
디에고는 레오의 눈을 쳐다보며 짙게 웃었다. 그러고는 음산하기까지 한 어조로 말했다.
“첫 노아비크는 이계의 문을 열고, 마지막 벨리아나스는 이계의 문을 닫는다…. 첫 노아비크는 악령을 퇴치하고, 마지막 벨리아나스는 악령을 지배한다….”
요하네스의 입장에서도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노아비크가 이계의 문을 연다는 것은 아마 맨 처음 악령을 불러들였던 단테 노아비크에 대한 이야기인 것 같기는 한데… 디에고는 싱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어쨌든 악령과의 싸움이 오래된 만큼, 두 집안에 얽힌 여러 가지 유물들이 많은데 오베딘은 아주 어렸을 때부터 그것들을 수집했고… 그것이 이렇게 많이 쌓였단다. 형님이 돌아가신 이후에도 딱히 둘 곳이 없어 이곳에 계속 두었지.”
“어머, 왜 방에 두지 않고요?”
엘로이즈가 발랄하게 끼어들었다. 디에고가 이물질을 바라보는 듯한 눈으로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가 대답했다.
“아무래도 오베딘 형님의 손길이 닿은 곳이니만큼… 막 건드리기가 힘들더군. 게다가 벨리아나스의 피는 특유의 이상한 힘이 있지.”
“네?”
“그래서 염원이 깃든 물건은 그 피를 알아본다고 해. 그래서 주인의 혈연이 다가가면 아주 기뻐하며 끌어들이다가, 비슷하기만 할 뿐 주인이 아니었다는 걸 알게 되면 분노하여 저주한다고도 하지. 그러니 형제인 내가 건드리기에는 늘 찜찜했네.”
꽤 끔찍한 말을 하면서도 디에고가 씩 웃으며 말했다.
“어떤가, 노아비크 공자. 기념으로 마음에 드는 것 하나 정도는 가져가도 되는데. 형님의 물건이었지만 어쨌든 노아비크와도 관련이 있으니 말이야.”
요하네스는 순간 당장 달려가서 말릴 뻔했다. 디에고가 무슨 의도로 저런 말을 하는지 눈에 보였기 때문이다.
오베딘의 염원이 담긴 물건들이다. 심지어 레오의 친부가 직접 관리한 오래된 마법의 힘이 담긴 유물들이었다. 심지어 벨리아나스의 이능은 혈연을 타고 전달되는 힘이었다.
디에고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 유물들은 혈연인 레오를 끌어들인 후 저주라도 걸 것이 뻔했다. 역시 레오는 거절하지 않은 채 마치 정신이 반쯤 나간 것처럼 선반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때였다.
“와, 감사합니다! 저도 함께 고를게요.”
발랄하게 엘로이즈가 끼어들었다.
“레오, 그럼 저 오르골 어때? 고양이 눈에 박혀 있는 보석이 예쁘다. 나 저거 갖고 싶어.”
“아.”
홀린 듯 다른 물건에 손을 뻗던 레오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디에고에게 예의 바르게 말했다.
“네, 감사합니다. 그럼 저걸로 할게요, 전하.”
“이런.”
디에고가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저었다.
“그건 공작 부인이 원하시는 거니… 공자가 직접 고르는 게 어떤가.”
“아, 아뇨.”
레오는 싱긋 웃으면서 대답했다.
“엘로이즈 님이 원하시는 게 제가 원하는 거예요. 정말 감사드립니다.”
“와아, 역시 우리 레오가 최고다.”
엘로이즈가 깔깔거리며 웃었다. 디에고는 명백히 못마땅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공작 부인이 공자와 아주 사이가 좋은가 보군.”
“네에. 얼마나 요하네스를 빼닮았는지 보자마자 너무 친해지고 싶더라고요.”
엘로이즈는 생기발랄한 얼굴로 자신이 오르골을 직접 집어 들었다. 디에고는 그녀를 빤히 바라보다가 불쑥 물었다.
“다 큰 후계자가 있는 북부에 가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을 텐데. 굳이 젊고 예쁜 영애가 간이 결혼식까지 감행하면서 간 이유가 있나?”
“제가 예전에 공작님을 뵈었다가 한눈에 반했거든요. 솔직히 그럴 만한 얼굴이긴 하잖아요?”
탐색하는 듯한 질문에도 엘로이즈는 끝까지 웃으면서 대답했다.
“결혼할 상대를 구한다는 소문을 듣고 냅다 남부에서 올라왔답니다.”
그 순간, 엘로이즈의 품에 안겨 있던 레오의 손이 또 홀린 듯 조용히 선반으로 향했다. 아직 엘로이즈와 디에고는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지만 조용히 그 모습을 지켜보던 요하네스의 눈에는 똑똑히 보였다.
“안 되는데!”
그러나 반응은 요하네스가 아니라 옆에 있던 베이든에게서 나왔다. 베이든이 절규하며 속삭였다.
“저건… 그냥, 느낌이 안 좋은데요!”
자신도 모르게 들썩거리는 베이든을 요하네스가 꽉 잡아 소리를 내지 못하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기척을 아예 지우지는 못했는지, 요하네스는 놀랍게도 그를 향하고 있던 엘로이즈와 눈이 마주쳤다.
‘제기랄….’
요하네스를 발견한 엘로이즈의 눈이 살짝 커졌다. 그리고 이상한 기척에 디에고 역시 뒤를 돌아보려고 하는 찰나였다.
“어떡해!”
그 순간, 엘로이즈가 들고 있던 오르골을 떨어트렸다.
바닥에 부딪힌 금속이 쨍, 하고 거친 소리를 냈다. 홀린 듯 어디론가 손을 뻗고 있던 레오 역시 놀라서 손을 거두고 엘로이즈에게 달라붙었다.
“어머, 어머! 어떡하죠?”
무의식중에 뒤를 돌아보려던 디에고 역시 미간을 찌푸리며 엘로이즈 쪽으로 시선을 보냈다. 엘로이즈의 손에 작은 상처가 났는지 레오가 화들짝 놀라 소리쳤다.
“엘로이즈 님! 피 나요!”
“태엽에 살짝 베었나 봐… 어떡해… 아파, 너무 아파! 죽을 것 같아! 나 아픈 거 싫은데!”
엘로이즈가 호들갑을 떨며 자신의 손을 꽉 쥐었다. 명백한 엄살이었다.
“죄송합니다, 황태자 전하. 좋은 구경에 선물까지 주셨는데 이런 추태를 보이고… 어머, 어머!”
설상가상으로 어쩔 줄 몰라 하던 엘로이즈의 발이 선반 구석을 쳤는지 이번에는 먼지가 쌓인 책들이 우르르 무너져 내렸다.
“어쩌죠? 얼른 사용인들을 불러야겠어요!”
누가 말릴 새도 없이, 엘로이즈는 커다란 목소리로 사람들을 부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요하네스와 다시 한번 눈을 마주치며 입을 벙긋거렸다.
멀리 있었지만 그 뜻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얼른 가요.’, ‘곧 따라 갈게요.’, 그리고… ‘걱정 마세요.’.
저 멀리서 사용인들이 오는 소리가 들렸다. 요하네스는 그사이에 얼른 베이든에게 눈짓하고 후다닥 몸을 숨겨 아래의 연회장으로 내려갔다. 마지막으로 본 디에고의 얼굴에 쓰여 있는 것은 틀림없는 낭패감이었다.
“역시.”
베이든 역시 그것을 알아챘는지, 흐뭇하기까지 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우리 마님이 황태자 전하의 첩자일 리가 없지! 암, 그렇고말고!”
평소에 늘 ‘경계하라.’라는 말을 달고 살던 요하네스는 그 순간 아무런 반박도 할 수가 없었다.
⚜ ⚜ ⚜
나는 레오와 함께 연회장으로 내려오면서 가슴을 쓸어내렸다.
‘어휴, 좀 놀랐네.’
아무리 많은 사건을 겪어 오며 강심장이라고 자부해 왔던 나였지만 요하네스와 눈이 마주쳤을 때에는 정말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하필 거기 숨어 있을 게 뭐람.
디에고에게 들키면 안 되는 상황인 줄은 순식간에 파악했다. 결국 몰래 태엽으로 내 손가락에 상처를 낸 다음 피를 봐서 이 모든 상황을 종료시켰다.
“괜찮으세요, 엘로이즈 님?”
“응. 근데 이제 연회장에 내려가 봐야 할 것 같아. 공작님이 걱정하실 거야.”
나는 들으라는 듯이 상냥하게 대답하고 디에고를 향해 환히 웃었다.
“좋은 구경시켜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황태자 전하. 좀 다치기도 했고… 이제 저와 레오는 다시 연회장에 돌아갈게요.”
아주 작은 생채기라 할지라도 어쨌든 상처였다. 내 엄살에 디에고는 살짝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지만 그래도 뭐라고 할 수 없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러도록 해.”
레오와 나는 그렇게 오르골을 주워 들고 다시 연회장으로 천천히 내려가기 시작했다.
모르긴 몰라도 디에고가 오베딘의 유품 앞에서 레오에게 무언가를 골라 보라고 제안한 일은 무슨 꿍꿍이가 있어서 한 짓일 것이다.
‘레오가 오베딘의 핏줄이라는 걸 한 번 확인해 보고 싶었겠지. 벨리아나스의 핏줄에는 내가 알지 못하는 무언가가 있을지도 모르고.’
나는 레오를 아이들의 파티장까지 데려다주며 생각했다.
‘오늘은 죽일 생각까지는 없었을 거야. 아무래도 수도에서 레오를 없애는 건 북부의 악령들을 움직이는 것보다 위험 부담이 크니까…. 다만 그 저주라는 게 아주 없는 말은 아닐 수도 있겠지.’
북부에서 악령을 조종하여 레오를 없애는 것은 쉬운 일이다. 실제로 내가 회귀하기 전, 레오는 지나치게 쉽게 죽었다.
그러나 디에고는 상당히 신중한 성격이었다. 요하네스가 북부로 올라가자마자 공격을 그만둘 만큼.
‘자신의 의도를 어떻게든 숨기고 싶었겠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황성의 사자가 요하네스를 맞이할 때에 맞추어 또다시 공격을 시도했다. 그 작은 틈을 노릴 정도로 레오를 정말 죽이고 싶었음에 틀림없었다.
‘요하네스가 직접 보면 무엇인가 눈치챌 거라고 생각한 건가?’
아직 많은 것들이 베일에 싸인 느낌이었지만 어쨌든 오베딘의 유품 앞에서 디에고의 뜻대로 되지 않은 것은 다행이었다. 눈치 없는 척하며 사사건건 방해했는데 그게 통했는지 그는 꽤 성가신 표정을 짓고 있었으니까.
게다가 내가 고른 오르골은 가격표까지 붙어 있는, 누가 봐도 별달리 중요해 보이지 않는 기성품이었다. 다만 ‘책임을 다하라, 모든 것을 걸고’라는 노아비크의 가언이 새겨져 있는 것을 보아 노아비크의 물건인 듯했다.
즉 벨리아나스의 피를 알아보는 유품은 아니었다는 소리다. 나름대로 내가 잘 고른 물건이니 레오가 지니고 있어도 별다른 문제는 없어 보였다.
‘그런데 요하네스는 왜… 거기 있었던 거지? 뭔가 알아냈나? 무사히 연회장으로 돌아갔겠지?’
다만 요하네스를 마주칠 줄은 몰랐다.
분명히 이따가 연회장에서 다시 만나면 내게 무언가 물을 텐데 혹시 수상하게 여기지는 않을까 걱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