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화 (22/65)
  • 레오는 살짝 당황한 얼굴로 멈칫했다. 뒤에 있던 페이건과 세예나가 난감한 눈빛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나 역시 긴장한 얼굴로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아까 형제니 뭐니 입에 발린 소리를 했던 게 다 이 제안을 위해서였나. 디에고가 상냥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안 그래도 이번 사고 때문에 황궁 이곳저곳을 시찰할 예정이거든. 노아비크 공자께서는 이번에 다시 북부로 가면 언제 또다시 황궁에 오게 될지 모르지 않나? 호의를 한번 베풀고 싶군.”

    다른 누구도 아닌 황태자의 제안이었다. 그러므로 아무리 찝찝해도 거절하기는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하지만 디에고와 레오를 단둘이 두었다가 무슨 꼴이 나려고… 보는 눈이 있어서 단번에 해코지하지는 않겠지만 좋은 일이 생기지 않을 것이라는 건 확실했다.

    결국 내가 활짝 웃으며 끼어들었다.

    “우와, 호의와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전하. 정말 재미있겠어요.”

    사실 여기서 눈치 없는 척하며 발랄하게 끼어들 사람은 나뿐이기도 했다. 페이건과 세예나 같은 한낱 호위 기사들이 끼어들 수는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만일 내가 즉시 레오가 있는 곳에 오지 않았더라면 레오는 어쩔 수 없이 불편하게 황태자와 둘이서 동행해야 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저도 끼어도 괜찮을까요? 아시다시피 저는 남부에서만 자란 데다가 북부로 돌아가면 언제 또다시 황궁에 오게 될지 몰라서… 레오와 비슷한 처지거든요.”

    디에고의 차가운 눈이 나를 향했다. 명백한 경계의 눈빛이었지만 나는 생글생글 웃으며 레오의 손을 잡았다.

    “저도 함께 가고 싶습니다, 전하!”

    그리고 아주 설렌다는 듯이 덧붙였다.

    “벨리아나스 황가와 노아비크 공작가는 형제와 같은 사이라면서요! 너무 낭만적인 말이에요. 저도 노아비크의 일원으로서 그 호의를 감사히 받겠습니다.”

    도저히 거절하지 못하도록 말이다.

    ⚜ ⚜ ⚜

    한편, 난리가 난 틈을 타 요하네스와 베이든은 남몰래 연회장을 빠져나가 황궁을 누볐다. 베이든이 그 어느 때보다 날렵하게 앞장섰다.

    “이상한 기운이… 정말 이상한 기운이 느껴집니다. 저 위쪽에서요!”

    베이든은 거침없이 발걸음을 움직였다. 요하네스가 미심쩍은 듯 다시 한번 확인했다.

    “디에고가 아닌 것 확실해?”

    “예. 디에고 황태자님께는 아무런 것도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요하네스는 신음을 삼키며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분명히 디에고에게서 수상한 점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잘못 짚었나 싶었다.

    제국에서 악령과 관계된 핏줄은 단둘뿐이다. 노아비크와 벨리아나스. 악령이 나타난 뒤 신에게서 직접 이능을 하사받은 가문들이었다.

    그중 두 명의 노아비크가 아무런 일도 벌이지 않았으니 나머지 하나인 벨리아나스에게 분명히 수상한 점이 있어야 할 텐데.

    게다가 디에고는 이미 대신전과 오래도록 결탁해 있었다. 그것은 신전의 명을 따라 오랜 시간움직여 온 요하네스가 가장 잘 알고 있는 것이었다.

    분명히 둘이서 결탁하여 뭔가 일을 꾸민 뒤 북부에 피해를 끼치고 있는 것 같은데… 아직 이유와 목적을 알 수 없었다. 더불어 확실한 증거조차도.

    “이쪽, 조금만 더 가면 나옵니다. 점점 더 이상한 기운이 짙어지고 있어요!”

    베이든은 확연히 표정을 일그러트리며 거침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불이 다 꺼져서 사용인들이 모두 다 연회장 쪽으로 달려간지라 마주치는 사람이 없었다.

    “…흡사 누가 도와주는 것만 같은 타이밍이군.”

    요하네스가 낮게 중얼거렸다.

    “이 시점에 불이 다 나가 버리다니 말이야.”

    베이든은 희미하게 웃을 뿐 별 대답을 하지 않고 계단을 올랐다. 연회장에서 점점 더 멀어지고 있었다.

    간간히 인기척이 들려올 때도 미리 피해서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어쨌든 그들은 몸을 쓰는 데 특화된 기사들이었고 한낱 황궁의 사용인들에게 기척을 숨기는 것 정도야 쉬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레오는 세예나가 잘 다독여 주고 있을 테고… 엘로이즈는 시온과 함께 있으려나.’

    베이든을 따라 영문 모를 목적지로 향하면서도 머리 한구석에 계속 자리 잡고 있는 생각이 있었다.

    ‘아니라면….’

    갑자기 이런 난리 통이 벌어질 줄은 그 역시 몰랐다. 어떻게든 오늘 황궁에서 이상한 점을 찾아내야 하는 그에게는 기적처럼 찾아온 행운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예상치 못한 일이라 엘로이즈와 레오가 걱정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엘로이즈를 떠올리면 가슴이 갑갑해져 오는 것과 동시에 어쩔 줄 모를 정도로 머리가 복잡해졌다. 절차상 단 한 번 추었던 왈츠의 기억이 몸에 남아 그녀의 부드러운 체온이 여전히 몸에 감겨 있는 듯했다.

    그리고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면 그 어떤 것도 깊이 생각하고 싶지 않아졌다. 마치 함정이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이 완벽한 타이밍조차도. 그가 옅은 한숨을 삼키는데 베이든이 발걸음을 뚝 멈추고 벽에 몸을 감췄다.

    “…저깁니다, 공작님.”

    베이든이 가리키는 곳을 본 요하네스의 표정이 단번에 심각해졌다. 말없이 표정만 굳히고 있는 요하네스를 보며 베이든은 미심쩍다는 듯 물었다.

    “대체 저기가 어디입니까?”

    베이든이 벽에 딱 붙어 서서 숨을 몰아쉬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가 가리킨 커다란 방 앞에는 황궁 기사들이 네 명이나 자리를 지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누가 봐도 아주 감시가 철저한 공간이었다.

    “여기서 아주 끔찍한 기운이 느껴집니다. 정확히는… 이계로 빠져나가고 있는 아주 거대한 힘이 느껴져요.”

    요하네스는 대답하지 않고 작은 신음을 내뱉었다. 골치 아프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베이든이 온 얼굴을 찌푸리며 속삭이듯 중얼거렸다.

    “피… 피 냄새가 나는 것 같기도 하고요. 아주 짙은 피 냄새요.”

    피 냄새라는 말에 요하네스의 뇌리에 스쳐 지나가는 고문서의 문구가 하나 있었다.

    황족이 고귀한 피를 신에게 바칠 때, 그는 노아비크보다 훨씬 더 악령과 가까워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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