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 된 거 같지?”
나는 싱긋 웃으며 밑에서 기다리고 있던 시온에게로 뛰어내렸다.
움직이는 악령의 심장도 맞추는 내게 이 정도 저격은 일도 아니었다.
“아마도?”
시온이 눈썹을 치켜올리며 명랑하게 대답했다.
시온은 황궁 하녀에게서 얻은 황궁 평면도를 바탕으로 마정석의 위치를 알아냈었다.
워낙 귀중한 황궁의 보물이니 마정석이 있는 방 앞쪽은 기사들이 잔뜩 지키고 있었다. 심지어 5층의 테라스도 없는 방 안쪽에 있었기 때문에 외부에서 누군가 침입할 수도 없는 구조였다.
“황궁에는 달빛을 받아 작동하는 마정석이 있지. 이토록 강한 마정석은 황궁에만 있어서, 황궁에서 개최하는 밤의 연회가 언제나 아름다울 수밖에 없는 거야. 일단 마법 아티팩트들이 많아서 밝잖아.”
마정석은 달빛을 받아야 하므로 어쩔 수 없이 창가에 위치해야 했다. 다시 말해서 황궁 외부에서 내 사격의 사정거리에 들어온다는 뜻이었다.
나는 마정석을 겨냥한 건 아니었다. 그렇다면 아예 연회가 취소될 판이었으니까. 내가 맞춘 것은 마정석을 지탱하고 있던 테이블의 다리였다. 테이블이 무너지며 마정석이 바닥으로 떨어져 내려 잠시 달빛을 받지 못하게 된 셈이었다.
그리고 파열음과 나뒹구는 총알을 감추기 위해 시온은 때맞춰 준비해 온 폭죽을 근처에서 터트렸다. 당연히 폭죽은 빈센트의 작품이었다. 아까 연회의 시작 때 불꽃놀이를 했으니 다들 ‘무언가 잘못되었나 보다’라고 생각할 것이었다.
그리고 폭죽이 예상외로 터지면서 그 파편에 마정석을 두었던 테이블이 무너졌다고 추측할 테고. 인명 피해가 없으니 딱히 세세한 조사는 하지 않을 것이라는 게 우리 측의 판단이었다.
게다가 최대한 폭죽의 잔여물처럼 생긴 총알을 사용했으니 총이라는 무기가 개입되었다는 생각을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쉽네.”
시온은 씩 웃으면서 빠르게 내 총을 받아 들고 근처에 있던 자신의 마차에 숨겼다.
온 황궁에 새카맣게 불이 꺼져서 볼만했다. 무거운 마정석을 다시 힘겹게 들어 올려 적당한 테이블에 옮길 때까지는 시간이 꽤 걸릴 예정이었다.
“가자, 얼른.”
분명히 베이든은 무언가 수상하다는 표정으로 ‘더 자세한 조사가 필요하다’는 눈짓을 해 보였는데, 지금쯤 요하네스와 황궁 안을 잘 뒤지고 있을지 궁금했다.
‘디에고는 분명히 악령을 조종하고 있어… 그 힘은 반드시 벨리아나스 핏줄에서 나올 거야. 그 증거는 당연히 황궁 안에 있을 거고, 요하네스와 베이든이 제발 단번에 알아내야 할 텐데….’
우왕좌왕하고 있는 황궁의 사용인들 사이에 유유히 합류하며 나는 요하네스와 베이든의 행운을 빌었다.
⚜ ⚜ ⚜
연회를 위해 준비해 두었던 폭죽이 예상외의 장소와 시간에서 터지는 바람에 잠시 중단되었던 연회는 30분도 안 되어 다시 재개되었다.
다행히 인명 피해는 없었지만 많은 사람들이 빛이 없었던 그 시간 때문에 상당히 당황했다. 나중에 알아보니 폭죽의 파편이 마정석이 있던 방의 유리창을 깨고 들어가 테이블을 넘어트려 마정석이 바닥에 구르는 바람에 생긴 일이라고 했다.
마정석은 꽤 무거운 돌이었고, 힘센 황실 기사단 몇 명이 달라붙어 급히 마련한 테이블에 올려놓기까지 시간이 걸린 것 외에는 별달리 특이사항은 없었다.
다시 마법 아이템들이 빛을 내며 이전의 반짝거리는 분위기로 돌아갔지만, 사건의 여파로 다소 긴장해 있는 사람들에게 디에고가 직접 나섰다.
“아무래도 오랜만의 연회라 실수가 좀 있었던 듯하군.”
디에고는 사람 좋은 미소를 지어 보이며 잔을 들었다.
“다시 모든 것이 회복되었으니 걱정 말고 즐기도록 하지. 내가 직접 솔선수범하여 모든 곳을 다시 한번 점검할 테니.”
아무리 조금 불안하다고 해도 8년 만에 열리는 연회였다. 다시 편안한 음악이 나오기 시작하자 사람들은 다시 집에 갈 생각이 조금도 없어졌다. 게다가 디에고가 직접 나선다고 하지 않는가.
과연 디에고는 연회를 즐기는 것을 멈춘 채 수족들을 이끌고 황궁 전체를 점검하러 나섰다.
“어린아이들이 가장 불안해하고 있겠지. 아래층부터 가 보겠네.”
그 첫 번째 장소 또한 상당히 일리 있는 선정이어서 모두 다 안심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디에고는 그렇게 아래층에 따로 마련된 아이들을 위한 파티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 ⚜ ⚜
나와 시온이 ‘작업’을 마치고 향한 곳은 아이들끼리만 모아 놓은 파티장이었다. 당연히 레오를 보러 간 것이었다.
“엘로이즈!”
내가 아이들이 모여 있는 파티장의 문을 열자마자 레오가 저 멀리서 달려왔다. 내 품에 폭 안기는 레오를 보며 나는 상냥하게 말했다.
“괜찮아, 레오. 별일 아니래.”
이제 마정석이 복구되고 있는지 하나둘씩 조명이 켜지고 있었다. 불이 일제히 꺼지고 나서 자식들을 걱정하는 귀족 부모들이 나 말고도 꽤 내려와 있었다.
“기다리면 다시 다 괜찮아질 거라고 하더라. 걱정 마.”
내가 머리카락을 쓸어 주자 레오가 안심했다는 듯 씩 웃어 보였다. 그런 우리의 모습을 보면서 페이건과 세예나가 뒤통수를 긁었다.
“아무래도 저희만으로는 안 되나 보네요…. 의젓하게 구셨지만 그래도 다른 아이들처럼 부모님을 기다렸나 봐요.”
레오는 부정하지 않고 내 옆에 찰싹 달라붙어 있었다. 사실 외양으로 치면 나는 레오의 큰누나처럼 보였지만, 어쨌든 공식적으로는 레오의 엄마였으므로 빠르게 달려온 부모들에 합류한 셈이었다.
“어때, 파티는 재미있어?”
“뭐… 그냥 그래요.”
레오는 썩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다들 너무 말이 많아서….”
“북부랑은 좀 다르지… 하지만 이게 다 사회생활이야.”
내가 씩 웃으며 이해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굳어 있던 레오의 얼굴에 방긋방긋 미소가 꽃피기 시작했다.
“우리 엘로이즈가 레오를 많이 좋아하나 보네.”
그 모습을 보던 시온은 내 뒤에서 옅은 한숨을 섞어 다 들으라는 듯이 말했다.
“어떻게 해서든 의사에게 끌고 가려고 했는데… 황궁에 불이 다 꺼진 걸 보더니 바로 레오에게 가야 한다고 난리를 치지 않겠어?”
사람들이 우왕좌왕하는 사이에 마련해 둔 우리의 알리바이는 다음과 같았다.
예전에 발목이 다친 것을 알아챈 시온이 당장 나가겠다고 나를 마차로 끌고 갔고… 나는 시온의 마차를 타고 이동하다가 황궁의 불이 모두 다 꺼진 것을 보고 레오가 걱정된다며 돌아간 것이라고.
그리고 내가 바로 레오에게 온 이유도 있었다. 내가 레오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는데 곧바로 파티장의 문이 열렸다.
‘…역시.’
일제히 고개를 숙이는 다른 귀족들에 합류하여 나 역시 급히 예를 갖추었다. 고고한 얼굴로 아이들을 향해 들어온 그 남자는 다름 아닌 디에고였다.
‘올 줄 알았지.’
그는 무조건 이번 연회 때 레오를 확인하려고 했을 것이다. 호시탐탐 아이들 방으로 향할 적당한 기회를 노리고 있었을 텐데 사고가 났으니 더 이상 좋은 핑곗거리가 없었겠지.
디에고는 우리를 바라보며 인자한 목소리로 말했다.
“준비해 놓았던 폭죽이 예상외의 시간에 터지면서 생긴 문제로, 별 이상 없이 다 회복 중이니 걱정하지 말라는 뜻에서 왔다.”
나는 마른침을 삼키며 레오를 다시 품에 당겼다. 베이든은 이자에게서 무슨 이상함을 느꼈을까?
에멘타의 이능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 수 없었지만, 그래도 분명히 무언가를 알아챘기에 내게 눈짓했을 것이다.
“이토록 아이들까지 챙겨 주시니 황태자 전하의 배려심에 몸 둘 바 모르겠습니다.”
이곳에 있는 귀족들을 대표하여, 굉장히 높은 사람 같아 보이는 여자가 앞에 나서서 인사했다.
“파우니아 공작 부인이세요.”
페이건이 내 귀에 속삭였다.
“여기서 가장 높은 위치의 부인이시죠.”
수도 사교계에 대해 무지한 나로서는 그게 내가 아니라는 사실이 반가울 뿐이었다. 조용히 묻어가면 되겠다고 생각하는데 페이건이 낮게 덧붙였다.
“두 번째는 엘로이즈 님이십니다.”
‘젠장.’
조용히 묻어가기도 어렵다는 뜻이었다. 내가 낭패라는 뜻으로 한숨을 쉬는데 디에고의 눈빛이 나를 향했다. 그가 눈을 치켜뜨며 말했다.
“아, 노아비크 공작 부인도 와 계시는군.”
결국 나는 품 안에 있던 레오를 놓아주고 수줍게 미소 지으며 무릎을 굽혀 예를 갖췄다. 그리고 생긋 웃으면서 말했다.
“황태자 전하의 배려심에 감동했습니다. 많은 위안이 되었습니다.”
적당히 괜찮은 발언이었다. 하지만 그 발언의 적절함과는 상관없이, 디에고가 피식 웃으며 나와 레오 앞으로 다가왔다.
그러고는 눈꼬리를 휘어 보이며 레오에게 말을 걸었다.
“공자는 수도가 처음이겠군. 노아비크 공작이 북부에 꽁꽁 숨겨서 키우는 바람에.”
레오 역시 내 옆에서 적당한 예의를 갖추며 인사했다.
“황태자 전하의 은혜 덕분에 즐거운 구경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다행이군. 나도 공자가 아주 반가워.”
디에고가 레오를 빤히 바라보며 웃었다. 다소 긴장한 표정의 레오에게 그가 친절하게 말을 이었다.
“단테 노아비크가 이계의 문을 열어 악령을 불러들인 이후로 노아비크와 벨리아나스의 이능은 마치 쌍둥이처럼 각성하게 되었지. 공자는 알고 있나?”
“예…. 가문의 역사는 어릴 때부터 배우고 있습니다.”
“어쨌든, 선대 황제께서도 늘 노아비크와는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라고 했었네. 마치 형제처럼 말이야.”
나는 마른침을 삼키며 레오의 옆에 바짝 붙었다. 디에고가 노아비크를 경계하는 건 누구나 다 아는 이야기였는데 아주 느낌이 안 좋았다.
게다가 악령이 나타나게 된 이후 두 가문이 함께 이능을 발현하게 되었다는 건, 그리고 그 이후 악령에 관련된 신탁들에 계속해서 두 가문이 출현한다는 건 벨리아나스 황가 입장에서는 딱히 언급하고 싶은 이야기가 아니었다.
언제나 황가는 유일함으로 권위를 세우고 싶어 하는데, 이능의 핏줄을 논할 때면 노아비크가 마치 그림자처럼 따라왔기 때문이다.
물론 악령에 관련된 이능이야 에멘타족 같은 북부의 유랑족에게서 더 진하게 발현된다지만, 어쨌든 그들은 제국 소속이 아니기 때문에 언제나 논외가 되었다.
잔뜩 긴장하고 있는데 디에고가 레오에게 손을 내밀었다.
“내 북부를 지키는 노아비크에 대해 늘 감사하고 있는데 혹시 지금 황궁 구경을 나와 함께하지 않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