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화 (20/65)
  • 나는 관심 없는 척을 하면서도 잔뜩 긴장해서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네 조언대로만 하면… 정말 어떤 남자든 유혹해서 원하는 걸 얻어 낼 수 있는 거지?”

    내 속삭임에 시온이 단번에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는 답지 않게 진지한 얼굴로 대답했다.

    “어떤 상대든 쉽게 유혹할 수 있는 방법 같은 건 없어. 그 사람의 특징과 관계에 따라서 다 다른 거지.”

    오히려 더 믿음이 가는 말이었다. 시온은 낮게 말을 이었다.

    “그리고 너와 요하네스의 관계에서 내가 내릴 처방은….”

    나는 귀 기울여 이어지는 시온의 말을 경청했다. 잔뜩 집중해야만 들을 수 있는 아주 작은 목소리였다.

    그러나 길지 않은 그 몇 마디를 다 듣고 난 후, 나는 실망스러운 표정으로 미간을 찌푸렸다.

    “…그게 다야?”

    “응.”

    생각보다 허접하기 짝이 없는 조언이었다. 나는 뭐라고 항의하려다가 이건 전적으로 나만을 위한 일임을 깨닫고 관두었다. 시온에게 다그치듯 다른 해결책을 달라고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게 다야, 엘로이즈.”

    내 실망이 역력한 표정에도 불구하고 시온은 당부하듯 힘주어 말했다.

    “이따 결정적인 순간이 오면, 내 말을 잊지 마.”

    “뭐, 그럴게.”

    나는 최대한 성의 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속으로는 딱히 통할 것 같지 않다고 생각했지만, 애초부터 유혹해서 얻어 낼 예정은 아니었으니 크게 좌절스럽지는 않았다.

    그때였다.

    저 멀리서 베이든이 찡긋, 하고 명백한 사인을 보냈다.

    “이제 시작인가 봐.”

    나는 조용히 말했다.

    “우리도 시작하자.”

    내 말에 시온이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혀로 윗입술을 살짝 핥으며 말했다.

    “정말 오랜만인데, 이런 기분.”

    그는 진심으로 즐거워 보였다.

    “‘에이스’를 폭발시킬 때로 돌아간 것 같아. 아주 흥분돼.”

    “그렇지. 그때처럼 목숨 걸고 있으니 얼마나 흥분되겠니. 수틀리면 죽을 수도 있고 참 기분 좋다.”

    나는 냉소적으로 대꾸한 다음 곧바로 일부러 발을 헛디뎠다. 주변에서 춤추고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쏠렸다.

    “엘로이즈!”

    시온이 가볍게 내 허리를 받치며 극적으로 외쳤다.

    “왜 이래? 이 스텝 원래 잘 밟던 애가!”

    다 짜 놓았던 극본인데도 시온이 워낙에 자연스럽게 주접을 떨어서 민망하기 그지없었다.

    “노아비크 영지에서 다쳤던 발목이 잠깐 시큰거려서 그래…. 진짜 별것 아냐!”

    내가 괜찮다는 표정을 지으며 재빠르게 손을 내젓는데 시온이 기겁하며 나를 들쳐 안았다.

    “북부에서 다쳤었다고? 왜 그걸 말 안 했어!”

    시온은 세상이 무너지는 표정을 지으며 절규했다. 나는 어느새 진심이 되어서 필사적으로 애원하듯 말했다.

    “오빠, 제발 주접 좀 떨지 마, 왜 여기서…!”

    “주접이라니, 네가 나 모르게 다쳤는데! 지금 당장 의사 소견을 들어야겠어!”

    연기를 초월한 내 진심 어린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시온은 그대로 나를 안아 들고 연회장을 나섰다. 조심스럽게 비켜 주는 사람들 사이로 수군대는 소리가 들렸다.

    “역시… 르노아로 자작이 여동생을 많이 아낀다더니….”

    “그러게요. 여동생 하나 때문에 연회에 참석했다잖아요.”

    “어릴 때부터 병약해서 굉장히 아껴 키웠대요.”

    대체 언제 저렇게 물밑 작업을 했나 싶을 정도로 여론이 빠르게 형성되어 있었다. 나는 시온에게 끌려가다시피 하면서 베이든을 향해 싱긋 웃어 주었다. 베이든이 홀린 듯한 얼굴로 내게 고맙다는 사인을 보내왔다.

    베이든과의 이 일은 이미 합의가 되어 있는 상태였다.

    “나도 베이든의 일에 도움이 될 수 있었으면 좋겠네.”

    나는 베이든에게 호의를 표현한 상태였고, 베이든 역시 내게 필요한 도움을 이미 이야기한 상태였다.

    “사실 저도 막막하거든요. 공작님이 황궁을 돌아다녀 보라고 지시하긴 하셨지만… 정말 중요한 정보라면 연회장 밖에 있지 않겠습니까? 황궁을 몰래 탐색하는 게 이 늙은 몸에게 쉬운 것도 아니고, 나 참….”

    그리고 연회에 오기 전, 베이든은 ‘그 도움’이 필요한 때가 오면 내게 눈짓하기로 했다. 다른 말로는 베이든이 지금 황궁에서 무언가 수상한 것을 알아냈다는 뜻이었다. 그런데 혼자 힘으로는 도저히 안 될 것 같다는 신호이기도 했다.

    “신호하면 제가 도와줄게요, 베이든. 저희 오빠가 이래 봬도 그런 방면에서 아주 뛰어난 실력자랍니다.”

    나는 베이든에게 성력을 내뿜으면서 최면을 걸듯 말했었다.

    “저도 노아비크 식구들에게 도움이 되고 싶어서 그래요. 당연히 요하네스에게는 비밀로 하고요. 안 그래도 저를 의심하는데 쫓아낼 수도 있잖아요?”

    쫓아낸다는 말을 하자마자 베이든의 눈에서 불이 튀었다.

    “그럴 수는 없지요! 아니, 저희 공작님은 이렇게 보는 눈이 없답니다…. 어쨌든 그런 일이 벌어지면 안 되니 반드시 비밀을 지키겠습니다.”

    요즈음 성력 때문에 완전히 홀려 있었던 지라 믿을 만한 반응이었다.

    ‘자 이제 가 볼까….’

    내가 ‘에이스’에서 배운 진리가 있다면 간절한 일일수록 절대로 무리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황가의 추적은 그쪽의 능력자인 요하네스에게 맡기고, 나는 그 추적을 ‘도와주었다는’ 명백한 사실만 있으면 되었다.

    지금은 말하지 말라고 당부해 놓았지만, 요하네스의 편인 베이든이 나중에 나의 도움을 증명할 수 있는 일이니 요하네스와 거래할 만한 괜찮은 기회였다.

    ‘내가 가장 잘하는 걸 하러.’

    시온은 나를 마차에 태워서 의원에 데려갈 것처럼 맹렬하게 정원으로 돌진했다. 그러나 마차에 타는 척하고 은근슬쩍 숨어든 우리의 진짜 목적지는 따로 있었다.

    “저기야, 엘로이즈.”

    시온이 나를 안아 들어 구석진 벽 위로 올려 주며 속삭였다.

    이미 황궁의 사용인들이 어떻게 이 연회를 준비했는지, 그리고 황궁의 지리는 어떤지 모두 알아둔 시온의 목소리에는 자신감이 묻어났다.

    “할 수 있지?”

    그가 다시 한번 힘주어 물었다. 사용할 수 있는 것들을 모두 동원한 그의 계획에는 나름대로 빈틈이 없었다.

    그리고 시온이 아무리 극본을 잘 짠다고 하더라도 결국 그 안에서 결정적인 역할은 내 것이었다.

    나는 잠시 들린 시온의 마차에서 꺼내 온 총을 천천히 들며 웃었다.

    “당연하지.”

    ⚜ ⚜ ⚜

    빈센트가 이야기하기 시작한 무기들은 나름대로 성능이 대단했으나 별달리 흥미가 가는 것은 없었다. 요하네스는 천천히 대화를 마무리하기 위해 시가 상자를 탁, 하고 닫았다.

    “천천히 생각해 보겠네.”

    그가 씩 웃으며 빈센트에게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장갑을 손수 들어 건네주었다. 느릿한 움직임이 고아하면서도 느긋했다.

    “오늘은 연회를 마저 즐기고 말이야.”

    “예.”

    빈센트는 떨떠름한 얼굴로 장갑을 받아들며 대답했다. 시간을 끌어보라던 시온의 말대로 요하네스를 잘 붙들고 있었던 것 같은데 이상하게 말려든 기분이었다.

    설명할 수 없는 불안감을 누른 채 빈센트가 끝까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모쪼록 좋은 인연 맺었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좋은 인연….”

    요하네스는 희미하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랜 시간이 흐른 것 같지만 아직 춤곡 하나도 끝나지 않은 상태였다.

    “좋은 말이군.”

    그는 성의 없게 말하고 나서 카드 룸 문을 열었다. 더 이상은 빈센트에게 흥미가 없다는 태도였다. 관성적으로 그의 시선이 시온과 춤을 추고 있을 엘로이즈를 찾았다.

    그때였다.

    갑자기 쾅, 하는 소리와 함께 황성 전체가 어둠에 잠겨 들었다. 환하게 빛나고 있던 실내 마법 아티팩트들이 모두 꺼진 탓이었다.

    게다가 놀랍게도 다 끝난 줄 알았던 폭죽이 밖에서 연달아 터지고 있었다. 쾅, 쾅하는 파열음에 음악 소리도 모두 묻혔다.

    “뭐, 뭐죠?”

    “깜짝 이벤트인가요?”

    사람들이 깜짝 놀라 춤을 멈추고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창밖에서 폭죽이 연달아 터지니 결국 시선은 밖으로 몰렸다. 캄캄해진 연회장 속에 오색의 폭죽 빛이 흐르기 시작했다.

    연회에서 일하고 있던 시종들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아닌데… 이미 불꽃놀이는 이미 끝났는데?”

    게다가 환한 낮인 것처럼 빛을 내뿜던 마법 아티팩트들이 일제히 꺼지니 연회장은 마치 암흑이 내려앉은 것처럼 캄캄해졌다.

    “죄송합니다, 손님 여러분!”

    연회의 총책임자로 보이는 늙은 시종장이 당황스러운 목소리로 소리쳤다.

    “연회가 너무 오랜만이라… 폭죽이 제멋대로 터지면서 마법 아티팩트들에게 마력을 공급하던 마정석에 문제가 생긴 듯합니다! 문제 해결까지 잠시만 기다려주시길 바랍니다!”

    황궁에는 마법 아이템들에게 마력을 공급하는 커다란 마정석이 있었다. 그 마정석은 달빛을 받아야만 마력을 내뿜어 마법 아티팩트를 작동시킬 수 있었다. 아직 달빛이 환하니 마정석이 갑자기 작동을 멈춘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마정석을 누가 훔친 거 아니에요?”

    누군가 크게 외치자 시종장이 화를 내며 반박했다.

    “무슨 소립니까! 마정석 앞을 지키고 있는 기사들이 몇 명인데요!”

    요하네스가 미간을 찌푸리며 웅성거리는 인파 사이로 엘로이즈를 찾고 있을 때였다. 수많은 관중 속에서도 그녀를 찾을 수 있다고 자신했는데 이상하게 그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어둠에 잠긴 연회장 속, 간간히 터지는 폭죽 불빛에 의지하여 사람들을 제치고 있는데 누군가 요하네스의 팔을 잡았다.

    “공작님!”

    베이든이었다.

    “아주 이상한 기운이 느껴집니다. 얼른, 얼른 가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상한 기운? 혹시 디에고….”

    “황태자 전하가 아닙니다.”

    그가 고개를 저으며 요하네스의 팔을 잡아끌었다. 여전히 토할 것 같은 표정임에도 불구하고 목소리가 다급했다.

    “저 멀리… 황궁 위쪽에서 분명한 악령과 이계의 기운이… 다들 정신이 없을 때, 얼른 가서 몰래 확인해야 합니다. 얼른요!”

    확실히 황궁 안의 모든 빛이 꺼져서 모두가 우왕좌왕하는 와중이었다. 뒤늦게 촛불을 붙인다며 시종들이 분주했으나 당장은 불씨조차 없었다.

    베이든은 어딘가 홀린 듯 그를 잡아끌고 있었고, 요하네스는 결국 고개를 끄덕이며 베이든이 이끄는 대로 연회장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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