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화 (17/65)
  • 나를 바라보는 요하네스의 눈빛이 한층 더 짙어진 것을 모른 척하며 천천히 말을 이었다.

    “야영을 가요. 이젠 소풍이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지만, 그래도 한 번 더 가고 싶어요.”

    내 입에서 나오는 야영이라는 말에 요하네스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그 난리를 피워 놓고서도 다시 가고 싶으냐는 듯한 표정이었다.

    “당신과 같이 가면 늑대 떼가 나타나도 괜찮잖아요.”

    들리는 음악과 스텝이 지나치게 경쾌했다.

    “수도에 오던 길에서처럼 별자리를 가르쳐 줘요. 별 보는 재미에 밤이 참 즐겁더라고요.”

    나는 늘 밤에 아래를 보며 살았다. 높은 곳에 올라가 악령을 기다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수도로 오는 길, 요하네스와 레오는 언제나 밤하늘을 보았다. 그리고 반짝이는 별에 이름을 붙였다. 나는 그 수많은 시간의 밤들이 너무 좋았다.

    “그리고 성에 돌아가면 카이트가 위험하게 왜 야영 같은 걸 하느냐면서 뭐라고 하겠지요. 베이든은 우리 둘만 같이 있으면 상관없다며 카이트를 말릴 거예요. 저는 달려오는 요한을 안으면서 못 들은 척하고….”

    북부의 고고한 공작성을 믿음직스럽게 지키고 있을 카이트를 생각하니 작게 웃음이 나왔다. 다시 그녀를 볼 수 있을까 싶었다.

    “밤중에 요하네스가 제 방문 앞에서 서성거리면서 못 들어오고 있으면….”

    “무슨 소리야. 서성거린다니.”

    “매일 밤 제 방문 앞에서 머뭇거리기만 하다가 돌아가신다면서요. 베이든이 그랬어요.”

    “…….”

    “사실 성 사람들이 다 알아요.”

    “며칠만 그랬을 뿐이야.”

    “아아.”

    나는 장난스럽게 웃었다.

    “그럼 북부로 돌아가게 된 다음, 제 방문 앞에서 다시 서성거릴 일은 없으시겠네요.”

    “…그래서.”

    요하네스는 낮게 내 손을 잡아끌며 속삭였다.

    “서성거리면서 못 들어오고 있으면 어떻게 할 건데.”

    결국 끝내 ‘더 이상 서성거릴 일 없다’ 같은 소리는 하지 않은 셈이었다. 나는 그 작은 항복에 뿌듯해서 살짝 웃은 뒤 말했다.

    “제 침대에 끌고 와서….”

    “…….”

    “옆에 눕도록 한 다음에 만지게 해 줄게요….”

    그때 타이밍도 좋게 첫 곡이 끝났다.

    순간적으로 요하네스의 시선이 일렁이는 것을 보면서 나는 가볍게 춤을 마무리 짓고 재빠르게 속삭였다.

    “…우리 테디 꼬리가 얼마나 부드럽고, 빙글빙글 잘 돌아가는지요!”

    “하, 참.”

    요하네스가 내 머리를 꾹 누르며 까불지 말라는 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남부에서는 농담을 그렇게 음란한 방식으로 하나?”

    “음란하다니요? 테디 꼬리가요?”

    내가 싱글거리는 얼굴로 그의 팔을 장난스럽게 툭 쳤다. 요하네스가 내 허리를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세게 자신의 쪽으로 잡아당기며 속삭였다.

    “이렇게까지 말해놓고 북부로 안 돌아가면, 엘로이즈, 그대는 참….”

    사실 어제 시온을 만나고 나서, 나는 찬물 한 번을 뒤집어쓴 듯 현실을 새삼 깨달았다. 내가 이제 와서 북부로 다시 돌아갈 가능성은 극히 적었다.

    애초에 북부에서 영원히 함께 살기 위해 세웠던 계획도 아니었다.

    ‘보물의 방’이 북부에 없다는 것을 안 이상 더 이상 그곳에 볼일은 없었다. ‘시간의 돌’만 차지하고 나면 요하네스도 레오도, 카이트도 베이든도 다시 엮이지 않을 가능성이 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하네스에게 방금 말한 것들은 거짓된 소망이 아니었다.

    이루어지지 않을 것 같아서 더 바랄 수밖에 없는 상상들. 내가 씁쓸함을 감추려고 애써 더 웃어 보이며 물었다.

    “…저는 참, 뭐요?”

    문맥상으로 볼 때에는 기만자라느니, 위선자라느니, 뭐 그런 말이 따라붙는 것이 자연스러웠다.

    그러나 요하네스는 천천히 말했다.

    “참 잔인한 사람일 거야.”

    그대로 우리는 다시 몸을 떼었다. 곡이 완전히 끝나고 잠시 쉬는 시간이었으므로 당연한 일이었다.

    붙어 있던 몸을 떼고 나니 늦은 열기가 확 올라왔다. 그의 손이 닿았던 허리며 손끝이 뒤늦게 화끈거렸다.

    분명 매일 보던 얼굴이고, 수도에서 올라오는 동안 항상 붙어 있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아름답고 화려한 공간에서 정복을 입은 채로 춤을 추는 것은 또 다른 기분을 들게 하여, 나는 그를 가만히 시선에 담았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 그를 피하던 수많은 과거를 지나, 그 어느 때보다도 밝고 화려한 불빛 아래 많은 사람들 앞에서 당당히 그의 옆에 서 있었다. 그 사실이 이상하게 벅찼다.

    이 연회장에 우리 둘밖에 없는 것처럼, 숨을 고르며 서로를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순식간에 우리 곁으로 다가온 사람들이 있었다.

    “엘로이즈, 오늘 예쁜데?”

    “아, 시온! 빈센트도 왔네.”

    시온과 빈센트였다. 나는 환히 웃으며 뒤를 돌았다.

    워낙에 인상 좋은 미남인데다가 맵시 좋게 차려입은 시온은 벌써부터 시선을 끌고 있었다. 반면 얼굴부터가 무표정을 하고 있는 빈센트는 마치 시온의 그림자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근데 네 드레스….”

    시온은 악의 없이 웃으며 말했다.

    “북부는 비즈가 유행이 아닌가 보네?”

    “아쉽게도.”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대충 대답했다.

    “그래도 나한테 잘 어울리지 않아? 예쁘잖아.”

    “미안한데 사실 내가 더 예쁜 것 같아. 그런 의미에서 다음 춤은 나랑 출까?”

    시온이 유려하게 손을 내밀며 해사하게 웃었다. 그러면서 생글거리는 눈으로 요하네스를 바라보았다.

    “공작님께서도 부인의 두 번째 춤은 오라비가 가져가는 것을 허락해 주시겠지요? 어떤 놈팡이보다는 나을 겁니다.”

    그가 과장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는 척하며 덧붙였다.

    “정보가 별로 없는 노아비크 공작 부인에 대해 궁금해하는 남자들이 아주 많던걸요. 물론 드레스는 좀 유행에 뒤처졌지만.”

    “뭐.”

    요하네스는 썩 표정이 좋아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막을 수는 없다는 목소리로 마지 못해 대답했다.

    “엘로이즈만 지치지 않는다면.”

    “괜찮아요. 시온하고는 대충 추면 되니까요.”

    나는 싱긋 웃으며 시온이 내민 손에 내 손을 얹었다. 시온이 낄낄거리며 뒤에 따라온 빈센트에게 턱짓했다.

    “그럼 공작님께서는 빈센트와 한 번 얘기를 나눠 보시는 것이 어떻습니까?”

    “엘리어트 남작과?”

    요하네스가 의외라는 표정으로 빈센트를 바라보았다. 빈센트는 안경을 밀어 올리며 무뚝뚝한 목소리로 말했다.

    “공작님께 제안하고 싶은 사업이 있는데… 이 기회에 말씀드리고 싶습니다만.”

    “사업이라….”

    요하네스의 날카로운 눈이 빈센트를 빤히 바라보았다. 빈센트는 조금도 주눅 들지 않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제가 소수의 높으신 분들 상대로 작은 무기 사업을 하고 있는데, 북부에서도 관심이 있을 것 같아서 먼저 제안을 드립니다.”

    나는 싱긋 웃고 있었지만 사실 꽤 긴장한 상태였다. 바야흐로 지금 시온이 어제 열심히 짠 판이 돌아가고 있는 셈이었다.

    요하네스가 이 제안을 놓칠 리 없었다. 그는 이미 시온과 빈센트에 대해 경계하고 있을 테고, 의심스러운 대상이 먼저 접근하는데 당연히 지켜보고 싶어 할 것이다.

    아마 이 상황 자체가 수상하기 때문에 더더욱 빈센트의 제안에 응할 것이다. 나는 시온과 함께 이 연회장에 있을 테고, 페이건도 명령에 따라 나를 감시하고 있을 테니까.

    “무기… 좋지.”

    요하네스는 눈썹을 치켜올리며 여유롭게 말했다.

    “그럼 저기 빈 카드 룸으로 가실까.”

    카드 룸이라면 연회장 한구석에 마련되어 있는 폐쇄된 공간으로 시가와 함께 간단한 도박을 즐길 수 있는 곳이었다. 유리창으로 훤히 안이 비추어서 헛된 짓을 할 수 없는 곳이기도 했다.

    때마침 두 번째 곡이 시작된다는 발랄한 종소리가 울리기 시작했고, 나는 시온과 손을 잡은 채 중앙으로 나아갔다.

    빈센트와 요하네스는 유유히 사람들을 헤치고 단둘이 카드 룸으로 들어갔다. 나는 시온과 대충 스텝을 맞추면서도 멀찍이 떨어져 있는 카드 룸 안을 계속 바라보았다.

    투명했던 유리창 안에 어느새 희뿌연 연기가 흩어지기 시작했다. 요하네스가 시가를 태우는 건가… 한 번도 못 봤지만, 귀족들의 문화니 아마 태울 줄은 알 것이다. 예전에 지나가듯이 한 번 언급한 적도 있었고.

    “엘로이즈, 스텝 좀 신경 써… 네 발 피하느라 지금 내 스텝이 엉망이야.”

    내가 시온의 등 뒤로 계속 카드 룸을 바라보고 있는데 시온이 한숨을 쉬며 속삭였다.

    “그리고 그만 봐도 돼. 빈센트가 어지간히 잘할까. 차라리 내 얼굴을 봐. 기분이라도 좋아지게.”

    “하지만….”

    “그리고 우리는 지금 할 일이 있잖아.”

    시온의 눈이 가느스름해졌다. 나는 결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빈센트가 요하네스의 눈을 가리고 있는 동안, 시온의 말대로 우리는 할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 ⚜ ⚜

    카드 룸에 들어온 빈센트는 가만히 눈앞의 남자를 바라보았다.

    카드 룸이라니, 이렇게 밀폐된 공간에 들어오게 될 줄은 몰랐다. 큰 연회도 낯설고, 이런 귀족적인 문화에는 더더욱 익숙하지 않은 빈센트는 속으로 적잖이 당황했지만 필사적으로 무표정을 유지했다.

    요하네스는 태연하게 긴 다리를 꼬고 앉아 빈센트에게 맞은편의 의자를 권했다.

    “앉으시지.”

    비릿한 웃음이 걸려 있는 얼굴의 분위기가 묘하게 아까와는 달랐다.

    지금까지 요하네스가 엘로이즈의 곁에 있는 것만 보아 왔었다. 그리고 생각보다 부드럽고 간질거리는 두 사람의 분위기에 기분이 나빠 자세히 요하네스를 살펴볼 겨를도 없었다.

    그러나 이렇게 밀폐된 공간에서 둘이 마주하자 풍기는 위압감이 상당했다. 엘로이즈가 옆에 없는 그의 얼굴은 표정부터가 달랐기에 풍기는 분위기조차 확연히 차이가 났다.

    “그래, 사업….”

    요하네스는 흥미롭다는 눈으로 빈센트를 바라보며 말꼬리를 늘였다.

    “본업이 무기 사업가셨군? 엘로이즈가 잡동사니를 자주 만지며 논다고 해서, 오르골이나 만드는 장인인 줄 알았더니.”

    빈센트가 대답을 고민하는 동안 요하네스가 태연하게 테이블 위에 있던 상자를 열었다.

    인정하기는 싫지만, 느릿한 몸짓 하나하나가 고상하여 괜히 귀족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빈센트는 긴장한 얼굴로 요하네스가 상자 속에서 시가를 꺼내 입에 무는 것을 지켜보았다.

    곧이어 희뿌연 연기가 흩어졌다. 그 연기 가운데 형형한 금색 눈이 똑바로 빈센트를 응시하고 있었다. 우아하게 시가를 문 요하네스가 시가를 하나 더 꺼내어 빈센트에게 내밀었다.

    “…….”

    빈센트가 잠시 굳어 있자 요하네스가 다시 한번 손에 든 시가를 까닥거렸다. 빈센트는 어쩔 수 없이 시가 쪽으로 손을 내밀었다. 요하네스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시가를 태울 때 장갑을 끼고 있는 건 좋은 생각이 아닌 것 같은데.”

    그런가? 사실 이런 곳에서 대화하게 될 줄 몰랐기에 빈센트는 카드 룸에 대한 사전 지식이 거의 없는 상태였다. 그러나 시가를 태우려면 불을 붙여야 하니 그도 그럴 것 같긴 했다.

    그는 천천히 장갑을 벗고 시가를 받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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