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화 (15/65)
  • 바로 옆집이니 시온의 얼굴을 보러 가는 것은 크게 어렵지 않았다.

    “오, 엘로이즈.”

    시온이 거울을 보며 제 얼굴을 뜯어보고 있다가 씩 웃으며 돌아보았다.

    “어제 봤는데 또 보러 왔어? 역시 너도 우리가 보고 싶었구나? 빈센트는 어젯밤 새고 아직까지도 자는 중인데 얼른 깨우라고 전할게. 걔는 밤낮이 바뀌어서 참 큰일이야.”

    나는 그 말 같지도 않은 말에 대꾸하지 않은 채 추궁하듯 물었다.

    “연회에 참석하겠다고? 대체 왜 둘 다 오는 거야?”

    시온은 평소와 다른 가르마를 한 자신이 마음에 드는지 연신 머리를 매만지며 느긋하게 말했다.

    “그러게 말이야. 빈센트까지는 안 와도 되는데. 내가 참석한다고 하니까 본인도 꼭 가겠다고 하지 뭐야? 뭐 우리 편이야 많을수록 좋겠지.”

    “시온 너도 올 필요 없어.”

    내 말에 시온이 짙게 웃으며 눈을 반짝였다.

    “정말?”

    그는 고개를 갸웃하며 다소 장난스럽기까지 한 어조로 덧붙였다.

    “정말로 내 도움이 필요 없겠어, 엘로이즈?”

    “무슨 소리야?”

    내가 팩 쏘아붙이는데 시온은 느긋하게 팔짱을 끼며 소파에 앉았다. 그러고는 유혹적으로 눈썹을 들어 올리며 한심하다는 듯이 말했다.

    “넌 어제 정말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하고 갔어. 알아?”

    “뭐가?”

    “벨리아나스 황가와 노아비크 공작가가 얽힌 일을 네가 밝혀낸다며. 엘로이즈, 놀라운 자의식은 칭찬한다마는 보통 그런 일은 너 같은 사람 하나가 알아낼 수 있는 일이 아니야.”

    나는 시온의 말이 무슨 뜻인지 단번에 알아챘다.

    내 회귀를 모르는 시온의 입장에서는 내가 불가능한 일에 도전하는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었다.

    하기야 시온의 말 중 틀린 건 하나도 없었다. 어쨌든 나를 걱정해서 하는 말이었으므로 나는 화를 내지 않고 차근차근 대답했다.

    “심증은 다 있어. 게다가 황태자는 분명히 어떤 일을 벌일 거야. 그때 몇 가지 정보만 캐내면 돼. 위험한 일 아니야.”

    한 번 지나간 시간을 알고 있다는 것은, 내 행보가 만들어 내는 의외의 상황들을 모두 인지해 낼 수 있다는 뜻이었다.

    디에고는 반드시 레오를 찾을 것이다. 그가 죽이지 못한 대상이니까. 그때에 나는 기회를 잡을 생각이었다. 나 역시 내 능력의 한계를 알고 있었으므로 무리한 계획은 세우지 않았다.

    알아낸 정보만 넘기고 실제적인 일의 실행은 요하네스에게 맡길 예정이었다. 시온의 말대로, 벨리아나스 황가를 나 혼자서 상대한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으니까.

    아니면 내가 생각하기에 정말 결정적인 정보라면 그 정보를 가지고 요하네스와 협상을 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일단 연회가 끝나고 나서야 고려해 볼 여지가 있는 사안들이었다.

    “여하튼 네가 걱정하지 않아도 돼.”

    “그래도 혼자보다는 둘, 둘보다는 셋이 낫겠지. 특히나 유능한 동료들이라면 말이야.”

    시온은 싱긋 웃으며 내게 무언가를 흔들었다. 나는 눈을 크게 뜨고 시온이 내민 것을 받아 들었다.

    “이건….”

    황궁에서 일하는 사용인의 출입증이었다. 묻지 않아도 완벽하게 위조된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어떻게 한 거야?”

    “어젯밤, 연회에 참가한다는 것을 알리러 내가 직접 황궁에 갔지. 아무래도 너무 늦게 회신을 하여, 직접 참가 명단을 작성하는 관리자에게 사과하고 싶다는 이유를 들어서.”

    “…그걸 믿어?”

    나는 아연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아무리 하급 귀족이더라도 귀족인데, 참가한다는 답신을 황궁의 사용인에게 직접 내러 간다니!

    “남부의 문화라고 했어.”

    시온은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지나치게 민폐를 끼쳤을 때에는 주인이 무조건 가는 거라고. 뭐 다들 알겠다고 하던데?”

    나름대로 괜찮은 핑계였다. 황궁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먼 남부의 문화를 알 리 없었으니 말이다. 남부 귀족들은 타 지역에 어지간하면 발걸음을 하지 않았다.

    “그 다음은 쉬웠지.”

    시온이 씩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연회 참가 명단 관리자가 여자였거든.”

    알 만했다.

    “네게 도움이 될 만한 연회의 정보를 몇 개 알아뒀어. 이 출입증으로 이미 모의 실행도 다 해 봤지. 황궁 연회가 어떻게 진행될지도 좀 듣고.”

    “그걸 어떻게….”

    “말했잖아. 상대가 여자였다니까.”

    그가 ‘도움이 될 만한 사실’이라고 단언한 것을 보면 확실히 대단한 정보일 것임에 틀림없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감동해서 중얼거렸다.

    “시온….”

    “황궁에 들어갈 수 있는 기회는 내일 한 번뿐이야, 엘로이즈. 그러니 내일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해 놓아야 해.”

    그의 표정은 마치 전쟁에 나가는 것처럼 진지했다. 나름대로 상당히 신경을 쓰고 있었음에 틀림없었다.

    “네가 정확히 무슨 계획을 세우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쓸 수 있는 수단은 다 써야 한다고. 여러 가지 방안을 마련해 둬야지.”

    그의 말은 일을 기획하는 입장에서 백번 맞는 일이었다. 쓸 수 있는 카드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았다. ‘에이스’에서도 무슨 일을 기획할 때에는 최대한 많은 경우의 수를 대비하곤 했다.

    그런데 이 모든 걸 어젯밤에 다 해내다니… 내가 감탄하는 눈빛으로 시온을 바라보자 그가 의기양양하게 웃었다.

    “난 ‘에이스’도 없앤 사람이야. 이 정도 기획은 일도 아니지. 빈센트랑 너는… 음, 미안하지만 결국 내가 시킨 대로만 움직인 거잖아.”

    부정할 수는 없었다. 나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며 한숨을 쉬었다. 그러고는 조금 누그러진 목소리로 말했다.

    “물론 네가 내게 엄청난 도움이 되는 사람이라는 건 알지. 하지만 우리는 어쨌든 다 ‘에이스’ 출신이고, 이렇게 수도에 모습을 드러내는 게 현명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그들이 수도에 올라왔을 때부터 일관적으로 걱정하던 바였다. 나는 초조한 얼굴로 덧붙였다.

    “모르겠어? 난… 난 너희를 걱정하는 거야.”

    “와, 감동인데.”

    “성의 없게 대답하지 마. 간부급은 다 죽었다지만 남아 있는 ‘에이스’의 생존자들도 있고, 괜히 요하네스에게 우리가 알지 못하는 실마리를 줄 수도 있는 일이잖아.”

    내 걱정스러운 말에 시온이 피식 웃었다. 그러고는 낮게 말했다.

    “단 하루야, 엘로이즈. 단 하루.”

    그 말은 아주 짧았지만 굉장한 울림이 있었다. 나는 멈칫해서 입을 다물었다.

    “그런데 그 하루 동안 귀족들만 모이는 곳에서, 정체를 ‘에이스’ 내에서도 숨겨 온 우리가 들킬 가능성이 얼마나 되겠어? 그런 가능성 없는 일에 주춤하기엔 네 목숨이 정말 얼마 안 남은 것 같은데.”

    ‘목숨’이라는 단어가 나오자 내 입이 금세 닫혔다. 시온 역시 나를 위해 많은 것을 걸었다는 게 바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너도 쓸 수 있는 패는 다 얘기해. 우리 셋이 힘을 합치면 일이 굉장히 쉬워질 거야. ‘에이스’를 없앴던 그 밤처럼 말이야.”

    “…미안해서 그러지….”

    “서운한데, 엘로이즈.”

    시온은 피식 웃으며 손을 들어 내 머리카락을 헝클어트렸다.

    “우린 이미 서로에게 목숨을 건 적 있잖아.”

    내가 엄숙하게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나는 손을 꼼지락거리다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많이 도움이 될 것 같은 사람이 있긴 해. 요하네스의 최측근이자 옛 스승인데, 북부 주술의 부작용으로 3개월 정도는 요하네스보다 내 말을 들을 것 같아.”

    “좋네. 이용할 여지가 충분하겠어.”

    나 역시 알게 된 지 얼마 안 된 사안이라 시온과 조금 더 의논해 봐야 할 것 같았다. 물론 3개월이 지나 주술사의 힘이 주인에게 돌아가면 베이든이 스스로를 미쳤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내 생일은 얼마 남지 않은 상황이었고 3개월 뒤의 변수를 생각할 때는 아니었다.

    “자, 그럼 자세한 건 천천히 판을 짜 보도록 하고, 그 전에….”

    시온이 나를 가만히 바라보며 폭탄과도 같은 발언을 던졌다.

    “혹시 모르니까 내일 확실히 요하네스 노아비크를 유혹해.”

    “…어?”

    유혹이라니 생각하지도 못한 지시였다. 내가 얼떨떨하게 한 손으로 내 얼굴을 가리키며 반문했다.

    “내가? 유혹?”

    시온은 싱긋 웃어 보이면서 나와 똑같은 제스처로 자신의 얼굴을 가리켜 보였다.

    “그럼 내가 할까? 사실 그게 더 쉽긴 하겠지만.”

    그 와중에도 꽃같이 예쁜 얼굴이라 짜증 나기까지 했다. 그가 순식간에 표정을 굳히며 진지하게 덧붙였다.

    “연회만큼 로맨틱하고 퇴폐적인 기회는 없어. 괜히 남부에서 매일매일 연회를 하겠어? 만일 네가 아니라 내가 여자였다면, 난 이미 그를 유혹해서 원하는 것을 얻어 냈을 거야. 그것처럼 쉽고 빠른 방법이 없거든.”

    유혹해서 중요한 것을 얻어 내는 것이 그렇게 쉬운 줄 아느냐는 말을 하려던 나는 시온이 건네준 출입증 두 장을 보며 입을 다물었다.

    하룻밤 만에 말도 안 되는 일을 해낸 당사자가 내 앞에 있었기 때문이다.

    시온이 턱을 치켜들며 간단한 심부름을 시키듯 말했다.

    “사랑하는 상대에게는 뭐든 주고 싶은 게 당연한 거야. 내가 알아서 오붓한 기회를 만들어 볼 테니 알아서 유혹해 봐. 별로 어렵지 않을 것 같아.”

    “어려워.”

    갑자기 주도권을 완전히 빼앗긴 듯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부루퉁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렇게 어렵지 않을 것 같으면, 노하우나 가르쳐 주든지.”

    유혹이라니 거의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했지만 시온의 조언을 한 번 받아 볼 생각은 있었다. 솔직히 믿지는 않지만 아까 베이든이 찻물 점을 쳤을 때 어쨌든 유혹에 성공한다는 결과가 나왔으니까.

    “그럴까?”

    시온이 반색해서 말하는데 계단에서 우당탕탕 소리가 들렸다.

    급히 옷을 차려입고 나온 듯한 빈센트였다. 잠을 얼마 자지 못했는지 그의 눈에 피곤이 잔뜩 내려앉아 있었다.

    “엘로이즈, 아침부터 무슨 일….”

    “내내 처자다가 엘로이즈 왔다고 옷까지 차려입고 내려오는 거 봐라.”

    시온은 빈센트의 몰골을 보며 혀를 찼다. 그러나 소파 한쪽을 비워 주며 앉으라고 툭툭 치는 손길에 친밀감이 잔뜩 묻어났다.

    “너도 일단 와. 내일 전략을 짜야 하니까. 일단 너도 참석하겠다고 한 이상 뭐라도 역할 하나는 해야지.”

    “…무슨 역할.”

    빈센트가 무뚝뚝하게 미간을 찌푸리자, 시온이 씩 웃으며 손으로 총을 쏘는 시늉을 했다.

    “엘로이즈가 일을 하러 갈 때, 요하네스를 붙잡아 두는 역할. 성능 좋은 총 하나와 실탄도 준비해 둬라.”

    어젯밤 시온은 이미 시나리오까지 한 편 쓴 듯했다. 우리는 마치 ‘에이스’를 무너트리던 그날 밤처럼 시온의 계획대로 움직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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