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화 (14/65)

요한이 나를 좋아하는 이유는 단순했다. 그저 성력을 가진 내가 신관들과 비슷한 기운이 풍기기 때문이다. 인간은 느끼지 못하는 동물의 본능과 감각으로 나를 따르는 것이었다.

성력은 악령과 정반대되는 힘이었고, 그렇게 치면 악령의 냄새를 싫어하게 된 베이든이 본능적으로 내게 호감을 품는 것도 가능한 일이었다.

어쨌든 이건 에멘타족의 힘이었고 북부 산간 지역에서 유랑하는 그들은 제국의 신관을 마주할 일이 없었다.

그러니 성력에 대한 기초 지식도 부족할 것이고, 따라서 악령의 기운에 민감한 에멘타의 주술사들이 성력을 가진 자들에게 홀리는 것 역시 아무도 모르는 사실일 가능성이 높았다.

“특히 공작님과 함께 계시는 모습을 보면 어찌나 마음이 편해지는지 모르겠어요.”

베이든은 실실 웃으며 말을 이었다.

“마치 공작님의 아주 음험한 기운이 마님으로 인해 정화되는 느낌… 저희 공작님 그러니까 잘 부탁드립니다.”

“뭘.”

나는 싱긋 웃으면서 직접 베이든의 앞에 차를 따라 주었다. 만일 내 가설이 맞는다면 몇 가지 확인해 볼 것들이 있었다.

“공작님께서는 날 믿지도 않으시는걸….”

“아, 그거야 한 집단의 수장으로서 당연한 일이지요. 너무 서운하게 여기지 마십시오.”

“그래도….”

나는 속상한 표정을 지으면서 시무룩하게 다 식은 차를 마셨다.

“…연회 때 무슨 일을 하시려는 것 같은데, 나한테만 안 알려 주니 꼭 소외당하는 기분이 들어… 나만 모르는 거잖아.”

내가 축 늘어진 상태로 기운 없게 말하자 베이든이 눈을 순진하게 껌뻑거렸다. 나는 힘없이 웃으면서 덧붙였다.

“이렇게 노력해도 소속감을 못 느낄 바에야, 오빠를 따라 남부로 돌아갈까 싶기도 하고… 대체 내가 뭘 잘못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어서….”

“잘못이라뇨! 마님은 잘못 없습니다. 무조건 다 옳아요.”

베이든은 눈을 희번덕거리면서 즉각 반응했다.

“그리고 남부라니… 계속 공작님 곁에 있어 주셔야죠! 소속감 문제라면 제가 다 말씀드릴게요. 사실 별것도 아니랍니다.”

역시.

평소의 베이든이라면 절대 이런 얄팍한 감정적 호소에 넘어올 리가 없었다. 어쨌든 노장이었고 요하네스에게 충성을 다하고 있는 최측근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그는 요하네스의 앞에서 대놓고 내 역정을 들 정도로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내가 떠난다는 말에 바로 반응한 것이었다.

“진짜 별것 아닙니다. 악령이 이상하게 행동하는 게 벨리아나스 황족과 관련된 것이라고 예측하셔서… 디에고 황태자 전하께 이상한 점이 있는지 제가 직접 파악해 보라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요하네스도 디에고를 의심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베이든이 무엇을 알아낼 수 있을지는 우리 모두 몰랐다. 에멘타족의 주술사가 어느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는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르긴 몰라도 상당히 엄청난 힘인가 봐.’

나는 강아지 같은 표정을 짓고 있는 베이든을 보며 생각했다.

‘내 성력에 이렇게 반응하다니 우리가 상상하는 그 이상인 것 같은데.’

아직까지 우리는 신관을 마주할 일이 없었기 때문에 베이든은 내게 품은 감정을 ‘갑작스러운 호감’ 정도로 판단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아무래도 가장 짙은 이능을 가진 두 핏줄이 노아비크와 벨리아나스이니까요. 여하튼 절대 마님을 소외시키려는 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위험한 일이니까 배제하려고 한 것뿐이지요. 물론 페이건이 마님을 감시하려고 몰래 따라붙기는 하겠지만….”

“…감시?”

“기분 상하셨나요? 어이쿠, 제가 중간에 반드시 페이건도 보내 버리겠습니다. 제가 마님을 보고 있겠다고, 레오 도련님께 가라고 하면 냉큼 갈 겁니다. 세예나가 그쪽에 있을 거니까요.”

“응, 알겠어.”

나는 싱긋 웃으며 말했다. 보아하니 적어도 3개월간 베이든은 요하네스가 아닌 완벽한 내 편이었다. 그 사실을 아무도 짐작하지 못한다는 건 상당히 괜찮은 일이었다.

“나도 베이든의 일에 도움이 될 수 있었으면 좋겠네.”

베이든은 헤벌쭉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요. 사실 저도 막막하거든요. 공작님이 황궁을 돌아다녀 보라고 지시하긴 하셨지만… 정말 중요한 정보라면 연회장 밖에 있지 않겠습니까? 황궁을 몰래 탐색하는 게 이 늙은 몸에게 쉬운 것도 아니고, 나 참….”

열심히 불평불만을 내뱉던 베이든이 갑자기 내가 다 마셔 버린 찻잔을 흘끗 보고 물었다.

“다 드셨군요! 혹시 찻물 점 쳐 드릴까요?”

“아… 찻물 점?”

확실히 뭔가 씐 것처럼, 요즈음 베이든은 평상시 같지 않았다. 숨기는 것이 많은 입장에서 점을 치는 것 자체가 좀 찜찜하여 거절하려고 했으나, 베이든이 재빨리 내 찻잔을 가져가서 가만히 응시했다.

“그 할멈이 점 보는 걸 어지간히 좋아했나 봅니다. 저도 틈만 나면 점을 보고 싶어져서요.”

“아… 그래? 정확도는 어때?”

“적당히 잘 맞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뭐 그렇습니다. 점이 다 그렇듯이 은근히 애매한 게 많잖아요.”

베이든은 눈을 가늘게 뜨고 내 찻잔을 노려보더니 옅은 신음 소리를 냈다.

“음… 마님.”

“뭐, 뭔데?”

불안해서 조심스럽게 묻는데, 베이든이 히죽 웃으면서 말했다.

“이번 연회 때, 유혹에 성공하실 것 같습니다.”

심장이 쿵, 하고 한 번 떨어졌다. ‘유혹’이라는 단어에 생각나는 사람은 요하네스뿐이었다.

요하네스를 유혹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 본 적 없었다. ‘좋아한다’라거나 ‘한눈에 반했다’라는 말을 해도 비웃음만 당했으니까.

물론, 어젯밤은 조금 다르긴 했지만….

그건 성공한 유혹이라기보다는 순간적인 욕정에 가까웠다. 그걸 스스로도 알았기에 요하네스는 내게 끝내 손을 대지 않았을 것이다.

“지내다 보니 더 좋아졌어요, 공작님.”

하지만 요하네스는 알고 있을까. 사실 그 말은 진실이었다.

“알면 알수록… 좋은 사람인 것 같아서 계속 좋아졌어요, 요하네스.”

어제 시온과 빈센트를 만나며 깨닫게 된 내 뒤늦은 진심이었다. 전처럼 책을 외우듯 중얼거린 ‘첫눈에 반했어요.’ 같은 말들과는 결이 달랐다.

솔직히 첫눈에 반하지는 않았지만… 지내다 보니 더 좋아졌고, 좋은 사람이라 계속 좋아졌고.

이 마음은 결국엔 어떻게든 짐이 될 것이다. 그렇기에 무의식적으로 미뤄 왔던 사실일 테고.

순간적으로 생각이 복잡해져서 아무런 대답도 못하고 드레스 자락만 쥐고 있는데, 베이든이 미간을 찌푸리며 찻잔을 더 들여다보았다.

“아… 아닌가?”

그가 세상 어려운 문제를 마주쳤다는 듯 심각하게 중얼거렸다.

“유혹을 당한다는 뜻인가…?”

“유, 유혹을 당하기는 뭘 당해!”

나는 깜짝 놀라서 두 손을 내저었다.

“아까 공작님 말씀 못 들었어? 이상한 마음 먹으면 바로 공작저에 끌고 오신다잖아.”

“흠. 잘 모르겠군요.”

베이든은 한숨을 쉬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언제나 이렇더란 말이죠. 뭔가 다 애매해서 결론을 내리기가 어려워요. 그런데 이 유혹의 성공이… 되게 서글픈 감정을 품고 있군요.”

“서글프다니?”

나도 모르게 조심스레 묻자, 베이든은 심각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저 적당하고 가벼운 유혹이 아니라… 파멸을 동반하는 유혹인 것 같습니다.”

“아하하. 파멸이라니, 뭐 이렇게 거창해?”

베이든의 얼굴이 너무 굳어 있었기에, 나는 손을 내저으며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 ⚜ ⚜

베이든의 수업이 다 끝났을 때에는 석양이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나는 산책이라도 할 심산으로 방을 나섰다. 정원이 꽤 예쁘다는 말을 어디서 주워들었기 때문이다.

“아, 마님! 좋은 저녁입니다. 역시 수도는 저녁이 되어도 따뜻하고 좋군요.”

“그래. 페이건도 좋은 저녁이야.”

대충 대꾸하고 내려가려는데 페이건이 은근슬쩍 물었다.

“르노아로 자작님과 엘리어트 남작님께서 연회에 참석한다는 서신을 보내셨다고 합니다. 어제 마님께서 참석을 부탁드리신 건가요?”

“뭐?”

나는 정원으로 향하던 발걸음을 뚝 멈췄다. 충격적인 사실이었다.

“연회에 간다고? 두 사람이?”

타이밍으로 보나 맥락에 맞지 않는 말로 보나 분명히 일부러 날 떠보려고 질문한 것일 텐데, 실제로 나는 정말 두 사람이 참석할 것이라고는 생각도 안 했었기 때문에 놀라서 도리어 더 캐물었다.

“어젯밤에 참석 여부를 보냈다고? 대체 왜 간대?”

“음… 어제 대화가 되신 게 아닌가요? 그렇다면 마님께서 물어보시는 게 더 빠르지 않을까요?”

“아 진짜….”

나는 성가시다는 얼굴로 한숨을 쉬었다. 분명히 나 때문에 결정한 사안일 텐데 반갑지 않았다.

어쨌든 노아비크와 황족이 관련된 일이었고, 한낱 신분을 산 하급 귀족에 불과한 그들이 괜히 얽혀서 피해를 보는 건 원치 않았다.

게다가 어쨌든 우리는 ‘에이스’ 출신이었고 수도 근방에서 대놓고 함께 다니는 것이 꺼림칙했다. ‘에이스’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이 아무리 우리를 모른다지만, 그래도 조심해서 나쁠 건 없으니까….

“대체 왜 온다는 거야.”

그리고 페이건은 신경질적으로 중얼거리는 내 얼굴을 대놓고 유심히 살피고 있었다. 감시하고 있는 건 알지만 너무 노골적이어서 나는 미심쩍다는 듯 물었다.

“왜 그래?”

“아니, 뭐…. 마님께서 그렇게 짜증스러운 표정을 지을 수도 있다는 걸 처음 알아서 그렇습니다.”

“아….”

그러고 보니 북부에서는 항상 즐거워서 늘 웃고 다녔던 것 같았다. 실제로 짜증 나는 일이 별로 없기도 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시온과 빈센트가 혹시라도 위험한 일에 얽힐까 봐 그렇다는 말을 할 수는 없었다. 나는 혀를 차며 대충 대답했다.

“그냥… 시온이 연회에 가면 벌어질 일이 눈에 선해서 그래.”

다행히 그 말에 페이건은 바로 수긍했다.

“그렇군요. 하긴, 어제 그 잠시 동안 그분께서 공작저에 일으킨 파란이 어마어마했죠.”

“…파란?”

“예. 어제저녁부터 제게 시온 르노아로 자작의 정보를 묻는 하녀들이 속출했거든요.”

나는 알 만하다는 듯이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별로 놀랍지도 않은 사실이었다.

그리고 저택을 나서자마자, 정원 산책이고 뭐고 다 때려 친 뒤 다급하게 시온을 찾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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