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화 (13/65)
  • 페이건의 말이 이어졌다.

    “저희야 이번에는 임무 때문에 떨어져 있겠지만, 그런 것 없이 가벼운 마음으로 참석한다면 이야기는 다르겠죠. 항상 같은 공간에서 늘 똑같은 모습만 보다가, 화려하고 아름다운 공간에서 멋지게 차려입고 춤이라도 한 번 추고 나면 뭔가 달리 보이지 않겠습니까?”

    “뭐가 다르게 보이는데?”

    “물론 처음에 마주쳤을 때야, 서로 어색하게 ‘네가 그런 차림이라니 웃기다!’라며 서로를 비웃겠지만….”

    그 상황을 상상하는 페이건의 눈이 몽롱하게 젖어 들었다.

    “결국 생판 남들과도 춤추는 판에 친한 친구끼리 당연히 한 곡 추겠죠. 자연스럽게 손도 잡고, 허리에 팔도 두르고….”

    오랫동안 상상한 듯, 페이건의 이어지는 말에는 거침이 없었다. 세세한 묘사에 마치 연회장에서 자연스럽게 웃는 남녀의 모습이 눈앞에 그려지는 듯했다.

    “춤을 추면서 남들은 모르는 어릴 때 일도 얘기하고, 역시 서로를 가장 잘 아는 상대는 오래 지낸 서로뿐이라는 걸 새삼 깨닫고….”

    “…깨닫고?”

    “그때를 틈탄 남자의 적극적인 애정 공세에 갑자기 여자의 마음이 열리는 거죠. 편한 상대가 의외의 모습을 보이면 자연스럽게 신경이 쓰이는 법이니까요.”

    요하네스의 손에 쥐어져 있던 서류가 무참하게 구겨졌다.

    “연회에서는 원래 그런 종류의 감정이 폭발하는 법이니 젊은이들이 모두 손꼽아 기다리는 것 아니겠어요? 그래서 황제 폐하가 편찮으신 동안 황태자 전하께서 연회를 금했겠지요. 선정적인 행사는 맞으니까.”

    페이건은 어깨를 으쓱하며 덧붙였다.

    “하지만 공작님의 명으로 저희는 연회에서 완전히 떨어져 있으니… 오래된 소꿉친구가 서로를 달리 보게 되는 일은 없겠지요.”

    그 말에 요하네스는 섬뜩하게 대답했다.

    “없어야지.”

    “…네?”

    “그런 빌어먹을 일들은 당연히 없어야지.”

    “비, 빌어먹을 정도까지….”

    “영원히.”

    온갖 상상의 나래를 순식간에 접어 버린 페이건은 상처받은 눈으로 시무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주군의 인성에 대해 다시 한번 고찰해 보아야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요하네스가 잔뜩 구겨진 서류를 책상 위에 올려놓으며 명령했다.

    “지나가는 길에 엘로이즈에게 이 사실을 흘려 봐. 시온 르노아로와 빈센트 엘리어트가 연회에 참석한다고 하는데 알고 있었냐고. 반응을 좀 봐.”

    “네….”

    페이건은 슬픔을 추스르며 묵례했다. 아무리 인성에 의문이 생겼다고 해도 어쨌든 그가 충성을 다하고 있는 주군이라는 점은 변하지 않았다. 대신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런데 공작님, 평생 마님을 의심하면서 사실 생각이십니까?”

    “…….”

    “이번 연회에서도 별달리 수상한 행적을 보이시지 않는다면… 그래도 계속 이렇게 감시하시면서 사실 예정이신가요?”

    요하네스는 침묵했지만, 오랫동안 그와 함께한 페이건은 그의 얼굴에서 명백한 망설임을 보았다. 페이건이 재차 말했다.

    “공작님께서 결정할 사안이시기는 합니다만… 요즈음 두 분 사이가 정말 좋아 보여서 그냥 궁금했습니다.”

    “…….”

    “원래 사랑은 숨기기 어려운 거잖아요. 요즈음 다들 공작님과 마님을 보면서 흐뭇해하고 있습니다. 베이든은 공작님 얼굴을 보고 결국 토하면서도 보기 좋다고 해요.”

    “구토를 하긴 하는군. 내 앞에서는 토하는 것까진 아니라고 하더니.”

    “앗… 비밀로 해 달라고 했는데.”

    페이건이 머쓱한 듯 웃었다. 요하네스는 옅은 한숨을 쉬며 중얼거렸다.

    “…글쎄, 왠지 정말 이번 연회와 건국제에서 아무런 일도 없이 무사히 북부에 돌아가게만 된다면… 그땐 이야기가 좀 달라질 것 같기도 하군.”

    “어? 북부로 돌아가실 거예요? ‘푸른 루비’는요?”

    “그것도….”

    요하네스가 피곤하다는 듯 눈을 감았다.

    “…생각해 봐야겠지.”

    그의 고요한 얼굴에 고뇌가 내려앉았다. 며칠 밤을 새워서 ‘푸른 루비’를 쫓을 때조차도 그는 이렇게 고단해 보이지 않았다.

    페이건은 조용히 예를 갖추고 집무실을 나왔다.

    ⚜ ⚜ ⚜

    연회 전날 오후, 나는 황실 연회의 기본적인 절차에 대해서 수업을 받기로 했다. 당장 내일이 연회였기 때문이다.

    8년 만에 열리는 황실 연회였다. 내가 수도의 연회에는 한 번도 참석하지 않았다고 하자 베이든이 싱긋 웃으며 설명을 자처한 것이었다.

    “자, 그럼 이제 황실 연회의 절차에 대해서 설명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요즈음 베이든은 나만 보면 기분이 좋은지 실실 웃었다. 요하네스에게는 악령의 냄새가 난다며 구역질을 삼키는 표정을 해 보이는 것과는 정반대였다.

    “바쁠 텐데 미안해. 하지만 실수하는 것보다는 낫겠지?”

    나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

    “안 그래도 노아비크 공작 부인에 시선이 많이 쏠릴 것 같은데.”

    실제로 수도에 도착한 이후, 내게는 온갖 서신이 밀려들었다. 다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귀족 영애들이었는데 ‘네가 궁금하다’라는 메시지를 잔뜩 담고 있었다.

    요하네스가 여독을 핑계로 알아서 모두 물려 주지 않았더라면 몹시 피곤할 뻔했다.

    “뭘요, 마님의 교육은 언제나 제 차지였습니다.”

    베이든은 흐뭇하게 웃으며 말했다. 요하네스가 내 옆에 앉아서 팔짱을 낀 채 우습다는 듯 끼어들었다.

    “요즈음 너무 엘로이즈에게 무른 것 아닌가? 비죽비죽 웃는 걸 참지를 못하는군.”

    “다행 아닙니까. 지금 마님과 함께 있으니 중화되어 망정이지 공작님과 단둘이 있으면 저는 너무나 역겨워서… 앗, 아닙니다! 이건 그 망할 할멈의 본능이지 제 본능이 아닙니다!”

    무뚝뚝한 북부 사람들과는 달리, 베이든은 남녀 간의 로맨틱한 분위기를 지나치게 숭상하는 기질이 있었다. 그러므로 요즈음 나와 요하네스의 분위기가 좋자 내게 너무 과한 호감을 품은 듯했다.

    “어쨌든… 크흠, 남부에서도 연회는 참석해 보셨지요?”

    베이든은 빠르게 화제를 돌렸고 나는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하지만 거긴 여기보다 훨씬 규모가 작아서… 홈 파티 정도로 생각하는 게 더 편할 거야.”

    “작은 홈 파티여도 기본적인 특징은 같습니다. 일단 마님은 공작님의 에스코트를 받아서 입장할 테고, 연회의 주최자인 황태자 전하의 말씀을 경청하신 뒤 첫 춤을 공작님과 추시면 됩니다. 춤을 추실 줄은 아시지요?”

    “아, 응.”

    춤이야 남부에서 이미 익힌 것이었다. 남부에서는 말 타는 법 같은 건 몰라도 되었지만 춤을 못 춘다는 건 상상할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 후에는 자연스럽게 파트너를 바꾸어서 춤을 춥니다. 아마 마님께서는 많은 춤 신청을 받을 겁니다.”

    베이든의 말에 요하네스가 끼어들었다.

    “힘들면 안 춰도 돼.”

    “크흠, 뭐, 물론 조금 몸이 안 좋다고 해도 되지만… 그래도 사교계 첫 진출이니 예의를 갖추는 것이 좋겠지요.”

    “낯설면 안 갖춰도 돼.”

    “흠, 낯선 이가 조금 두려우시다면 친분이 있는 남자분과 두 번째 춤을 추어도 좋겠군요. 예를 들어 이웃집의….”

    “더 최악이군.”

    베이든은 툭툭 끼어드는 요하네스에게 도끼눈을 떠 보이다가 흠칫하여 바로 고개를 돌리고 나서 온순하게 말했다.

    “…그리고 만일 사적인 대화를 청하는 상대가 있다면 연회장 곳곳에 마련된 테이블에서 티 푸드를 함께하며 이야기를 해도 좋습니다. 또 피곤하면 쉴 수 있는 작은 침실이나 바깥바람을 쐴 수 있는 테라스도 곳곳에 있지요.”

    “아, 그건 나도 알아.”

    나는 싱긋 웃으며 말했다.

    “문 잠그고 벗는 곳 아니야?”

    내 발랄한 말에 베이든과 요하네스 모두 굳어 버렸다. 잠시 충격적인 정적이 흐른 뒤에 베이든이 말을 더듬으면서 황급하게 중얼거렸다.

    “아, 아니… 그, 그게….”

    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풀 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남부랑 기본적인 특징은 같다며….”

    베이든은 차마 아니라고 하지 못했고, 요하네스는 옅은 한숨을 쉬며 낮게 지적했다.

    “내일 그대는 그대가 누군가의 아내라는 사실을 끊임없이 상기해야만 할 듯하군.”

    “어, 음, 그건 별로 상관없던데….”

    실제로 남부의 문란한 연회들을 떠올리며 내가 중얼거리자 요하네스가 눈을 가늘게 떴다.

    “빌어먹을 남부에서처럼 행동하면 즉시 공작저에 돌아올 테니 그렇게 알아.”

    그 말에 발끈한 사람은 의외로 베이든이었다.

    “왜 마님께 성질이십니까? 악령의 냄새나 풀풀 풍기시는 주제에!”

    물론 팩 쏘아붙이고 나서 곧바로 엎드린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죄, 죄송합니다…. 그 할멈의 기운이 정말 이상하군요…. 당연히 제 진심이 아니었습니다! 그냥 마님께 화를 내시는 걸 보니 본능적으로….”

    베이든은 눈을 빼꼼 뜨며 중얼거렸다.

    “…하지만 이렇게 된 건 다 공작님의 명 때문에, 우욱, 우우우욱….”

    그 꼴을 보고 있던 나는 한숨을 쉬며 요하네스의 등을 밀었다.

    “나가 봐요, 요하네스. 베이든 난감하게 하지 말고. 지금 당신은 교육에 도움이 하나도 되지 않고 있어요. 알죠?”

    결국 이 촌극을 계속할 수 없었던 요하네스가 혀를 차며 일어났다.

    “대충 하고 끝내. 그리고 그대는 그냥 연회 내내 내 곁에 있도록 해. 떨어지지 말고.”

    그럴 생각이 조금도 없던 나는 어설프게 웃었고 요하네스는 못 미덥다는 얼굴을 한 채로 방을 나섰다.

    쾅,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단둘이 되고 나서야 베이든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들고 일어났다. 그가 연신 식은땀을 흘리며 중얼거렸다.

    “진짜 제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습니다… 공작님께 이렇게 대들다니 평소 같았으면 상상도 못 할 일이죠.”

    “다 그 에멘타족의 힘을 받아서 그런 것 아니겠어? 공작님께서도 다 이해하시니 저 정도로 넘어가시는 거지.”

    “어휴, 그래도… 제가 옛 스승 아니면 이 정도로 끝나지는 않았을 겁니다. 예상외로 규율에 몹시 철저하시거든요.”

    “예상외는 아니었어. 어쨌든 얼른 편히 앉아.”

    “예… 근데 정말이지, 요하네스 공작님께 느껴지는 노아비크의 악령 냄새가 너무 지독해서 너무 힘듭니다. 반면에….”

    베이든은 부드럽게 웃으면서 나를 향해 말했다.

    “왜 이렇게 마님만 보면 기분이 좋은지 모르겠어요. 마치 마님만 보면 정신 못 차리고 꼬리를 흔들어 대는 요한처럼 말입니다.”

    아무 생각 없던 나는 ‘요한’이라는 말에 갑자기 떠오르는 가설이 있어서 흠칫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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