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화 (11/65)
  • 엘로이즈는 눈을 한 번 도르르 굴리더니 냉큼 덧붙였다.

    “걱정 마세요. 지금 이혼할 생각은 없으니까. 절대로 연회에서 공작님을 우스갯거리로 만들지 않을게요.”

    그 역시 엘로이즈가 즉시 이혼할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엘로이즈가 그 서류를 수도까지 챙겨 와서 가장 가까운 곳에 두었다는 점이었다.

    지금까지 본 엘로이즈는 딱히 물건에 애착을 가지는 성격이 아니었다. 뭘 야무지게 챙겨 다니는 타입도 아니었다.

    그런데 이혼 서류라.

    “그럼 이건 왜 가져온 거지?”

    “그냥 챙겨 온 거예요. 제가 못 챙길 걸 가져온 것도 아니잖아요. 다른 누구도 아닌 공작님이 주신 건데요?”

    놀랍게도 말문이 막혔다. 요하네스는 머리가 도는 것 같은 기분이었지만 그녀에게 그 어떤 논리적인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거침없이 이혼 서류를 내밀었던 건 분명 과거의 그였다.

    “심지어 북부에 오신 첫날부터 저를 쫓아낼 거라고 그랬잖아요.”

    엘로이즈는 이혼 서류가 들어 있던 서랍을 직접 닫으면서 말했다. 그녀의 팔이 움직임에 따라 살짝 헐거운 실내복 한쪽이 스르르 내려가며 둥근 어깨가 드러났다.

    “쫓겨났는데 뭐 하러 노아비크 성을 비참하게 갖고 있나요? 다시 르노아로로 돌아가는 게 낫지.”

    “그건….”

    “절대 공작님을 대외적으로 곤란하게 만들 일은 없어요.”

    요하네스는 자기 자신에게 환멸이 들어 이마를 짚었다. 이상하게 피가 끓어오르는 기분이 들었다. 분명히 쫓아낼 거라고, 엘로이즈라는 변수를 감당하기에는 너무 고단하다고 한 사람은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이었는데도 불구하고.

    분명히 그녀를 처음 보았을 때에는, 정말이지 아무 때나 이혼당해도 된다고 생각했었다. 오히려 이혼하지 않는 것이 더 이상하다고 여겼었다.

    그런데 지금은….

    “안 쫓아내면.”

    결국 요하네스는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그대를 쫓아내지 않는다고 하면.”

    엘로이즈가 푸른 눈으로 그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그럼 그 서류, 다시 내게 줄 수 있나.”

    “받아서 뭐 하시게요?”

    “그냥….”

    “…….”

    “일방적으로 끝을 통보받을 수 있다는 게 유쾌하지 않군.”

    나름대로 스스로에게 꽤나 놀라면서 내뱉은 말이었는데, 엘로이즈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반문했다.

    “저는 일방적으로 끝을 엄청 자주 통보받았는데요?”

    요하네스는 막다른 골목에 몰린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런 기분은 난생처음이었다. 심장이 죄어드는 것같이 불쾌한데, 대답할 말도 없고 이 상황을 타개할 방법도 생각나지 않았다.

    “그래도 열심히 매달려서 이렇게 버틴 제가 대단하지 않아요?”

    그의 타들어 가는 속도 모르고, 엘로이즈는 장난스럽게 물었다. 자랑스럽다는 듯 배시시 웃는 모습이 지나치게 사랑스러웠다. 그리고 그가 대답하지 않자 뒷짐을 진 채 그에게 발돋움까지 하며 장난스럽게 몸을 기울였다.

    “후회하세요?”

    은은한 살 내음이 달큼하게 풍겨 와 머리가 아찔했다. 발간 볼과 동그란 이마, 살짝 흐트러진 머리카락과 반짝거리는 푸른 눈이 시야에 가득 찼다.

    “저 수상하니까 쫓아낸다고, 심문한다고 막 그랬던 거.”

    그리고 그가 대답하기도 전에 냉큼 발랄하게 덧붙였다.

    “근데 그게 한 가문의 수장으로서는 당연한 거니까 후회하지 마세요.”

    그녀를 쫓아내겠다고 결정한 그때의 감정을 그는 선연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북부에 급히 도착해서 악령 앞에 선 그녀를 구해 주던 밤이었다. 제대로 마주친 건 두 번째였지만 그는 이상한 예감에 휩싸였었다.

    이 여자에게 지나치게, 정말 심하게 휘둘리게 될 것 같은 직감. 수상하기 짝이 없는 이 작은 여자가 그의 모든 것을 망쳐 버릴 것만 같은 예감. 그 감각이 불길하여 어떻게든 멀어지고 싶었다.

    “당신이 자책하는 거, 그것도 나 때문에 후회하는 거….”

    엘로이즈는 슬며시 웃으면서 말했다. 지금 요하네스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꿈에도 모르고.

    “그런 거 정말이지 원하지 않아요.”

    “왜.”

    격렬한 감정의 파도와 말도 안 되는 충동을 꾹 누른 채 요하네스가 물었다.

    “그대가 나를 좋아해서?”

    질린다는 얼굴로 대충 그렇다고 대답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엘로이즈는 곧바로 대답하지 않고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한참이나 정적이 흐른 뒤 웃음기 뺀 얼굴로 대답했다.

    “…네.”

    요하네스는 홀린 듯이 손을 들어 그녀의 뺨을 감쌌다. 부드럽고 따뜻한 볼이 그의 한 손에 가득 들어왔다. 엘로이즈가 놀란 눈으로 살짝 입술을 달싹였다.

    엄지로 쓸어내린 볼에 어느새 홍조가 어려 있었다. 살짝 닿은 귓불이 뜨거웠다.

    “맨날 말하잖아요.”

    엘로이즈가 속삭이듯 중얼거렸다.

    “제가 공작님 좋아한다고.”

    “…….”

    요하네스는 단 한 번도 그녀의 좋아한다는 말을 믿어 본 적이 없었다. 애초에 그에게 청혼하는 모양새 자체가 사랑에 빠진 여자가 아니었다. 그는 조용히 빈정거렸다.

    “첫눈에 반해서 결혼했다는 그 말을 또 한 번 암송하시려고?”

    그건 엘로이즈를 난감하게 하려는 의도보다는 자신을 다스리려고 한 말이었다. 이대로라면 그녀의 거짓말을 핑계 삼아 무슨 짓을 할지 몰랐다.

    “아뇨.”

    토라진 표정을 지으며 ‘거짓말 아니라고요!’ 같은 말로 발끈할 줄 알았던 그녀가 마른침을 삼키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오늘은 다른 말 할게요.”

    “다른 말이라니?”

    엘로이즈는 살짝 망설이다가 조용히 말했다.

    “지내다 보니 더 좋아졌어요, 공작님.”

    파르르 떨리는 긴 속눈썹을 보자 이상한 감각이 치밀어 올라왔다. 이대로 그도, 그녀도 다 망쳐 버리고 싶다는 충동.

    “알면 알수록… 좋은 사람인 것 같아서 계속 좋아졌어요, 요하네스.”

    그 충동을 아는지 모르는지 엘로이즈가 열심히 말을 이었다.

    “그래서 예전의 저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말이나 행동까지 막 하고….”

    “…….”

    “제가 제 마음을 어떻게 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그래서?”

    “…좀 슬퍼요.”

    잠시 정적이 흘렀다.

    항상 앵무새처럼 ‘좋아하는데요.’만 읊던 것과는 느낌이 달랐으나, 요하네스 역시 지금 이상한 감정에 휩싸여 있었기에 그가 정신없이 흔들리는 이유를 분석하지 못했다. 다만 엘로이즈의 작고 붉은 입술만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

    치맛자락을 쥔 그녀의 손에 더 힘이 들어갔다. 한참을 침묵하던 요하네스가 느릿하게 입술을 말아 올렸다.

    “엘로이즈.”

    엘로이즈는 숨을 색색 몰아쉬었다. 그 어떤 상황에서도 태연하던 그녀였는데 지금은 긴장한 내색이 완연했다. 얼굴이 가까워지면서 어느새 숨이 섞였다.

    “내가 그 말을 핑계 삼아 못된 짓이라도 하면 어쩌려고 깜찍하게 그런 대담한 소리를 해.”

    그는 그녀의 동그란 푸른 눈, 상기된 뺨, 그리고 살짝 벌어진 붉은 입술을 천천히 훑었다. 시선이 지나가는 곳마다 아찔한 충동이 일렁거렸다.

    “부인께서 그렇게까지 최선을 다해 예쁜 소리를 하면 네 충실한 남편은….”

    상냥하기까지 한 목소리였으나, 명백한 몰아붙이는 어조였다. 그는 눈앞에 사냥감을 두고 고민하는 맹수처럼 욕망을 누른 채 느긋하게 속삭였다.

    “…더 엉망으로 굴고 싶어져.”

    엘로이즈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사랑스럽게 살짝 쳐진 두 눈이 가만히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넌 내가 지금 뭘 참고 있는지 조금도 모르겠지.”

    “…….”

    “네가 말하는 ‘좋은 사람’을 지키기 위해 뭘 누르고 있는지.”

    작은 체구와 귀엽게 생긴 이목구비, 무구해 보이는 맑은 눈동자를 보고 있자면 그가 한없이 나쁜 사람이 된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그녀의 달싹거리는 입술 새로 긴장된 숨이 오갔다. 살짝 흐트러진 금색 머리카락이 오르락내리락하는 가슴을 타고 흘러내렸다. 어쩔 줄 몰라 하는 토끼 같은 모습이었지만 피하지 않는 강단만큼은 한결같았다.

    황폐했지만 안정되어 있던 그의 삶을, 어느새 찬란하게 꽃피워 마구잡이로 헤집어 대는 여자.

    “공작님께서는 본인이 다 갖춘 사람인 걸 스스로가 아시면서, 왜 그 인생을 헐값에 내던지고 싶어 하세요?”

    어느 날 밤, 그녀가 담담하게 그의 인생을 꿰뚫어 봤을 때부터 예감했다. 그녀가 결국 그의 모든 것을 망쳐 버리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사실 그녀를 쫓아내고 싶다기보다는 본능적으로 그녀에게서 도망치고 싶다는 것이 옳은 표현이었을 것이다.

    그의 삶이 고요한 호수였다면 그녀는 갑자기 그 표면에 내려앉은 꽃잎과도 같았다. 아무리 잔물결로 밀어내려고 해 봤자 꽃잎은 보란 듯이 여유롭게 유영할 뿐 사라지지 않는다.

    그 커다란 호수가, 그 작은 꽃잎 하나를 끝끝내 어쩌지 못하여.

    그리고 그녀는 벌써부터 아주 작은 요소 하나만으로도 그의 감정을 휘몰아치게 만든다. 전혀 노출이 심하지 않은 실내복 하나로도 그를 아찔하게 한다.

    그는 어렵게 그녀에게서 손을 뗐다. 우연히 본 이혼 서류에 눈이 돌아서 혼자 날뛰고 있는 모양새가 스스로도 한심하다고 판단한 탓이었다.

    “그래도 열심히 매달려서 이렇게 버틴 제가 대단하지 않아요?”

    합리적인 이유 없이 이혼 서류를 강제로 빼앗는 것보다는, 이혼이 그토록 싫다면 그 역시 엘로이즈처럼 끝까지 매달리면 될 일이었다. 주어진 상황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 원래 그가 추구하던 인생 아니었나. 그 당연한 이치까지 순간 잊을 정도로 머리가 하얘져 있었다.

    머리가 타오를 것 같이 온갖 충동에 휩싸여 있었지만, 그래도 그 정도의 이성은 남아 있어서 다행이었다.

    천천히 몸을 뒤로 물려 그녀에게서 멀어진 요하네스가 담담하게 말했다.

    “이혼 서류 말인데.”

    “…….”

    “서랍을 잠가 두는 게 좋을 거야.”

    “왜요?”

    “내가 찢어 버릴 수도 있거든.”

    “네?”

    “그러니 잠가 둬. 날 그렇게까지 최악의 인간으로 만들지 마.”

    어색하게 눈을 돌릴 줄 알았던 엘로이즈는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하긴, 그녀는 민망해하기는 해도 주눅 들지는 않았다.

    “요하네스.”

    그녀의 목소리는 작았지만 또렷했다. 확신에 가득 찬 어조로, 엘로이즈가 울 것같이 말했다.

    “당신은 나한테 최악의 인간이 될 수 없어요.”

    그 작은 여자 앞에서, 요하네스는 굴복하는 기분이 되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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