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화 (10/65)

오랜만에 친구와 오빠를 만나러 갔으니 당연히 시간이 오래 걸릴 수밖에 없지…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마음에 안 드는 조합이었다.

딱 봐도 여성 편력이 심각해 보이는 오라비에 오랫동안 그녀를 마음을 품어 온 것이 분명한 소꿉친구라.

꼭 그 바람둥이 오라비가 ‘남편 하나만으로 만족하겠어? 남자는 많이 만나 봐야 해!’ 같은 소리를 속삭이고, 건방진 소꿉친구가 ‘다시 남부로 돌아와.’라며 속삭일 것만 같았다.

요하네스는 신경질적으로 서류를 보았다. ‘푸른 루비’의 동선 분석에 대한 문장을 몇 번이나 반복해서 읽고 있던 그는 다시 한번 시계를 보았다. 분명히 아주 오래된 것 같은데 5분밖에 지나 있지 않았다.

‘분명히 일찍 들어오라고 했는데….’

엘로이즈가 그들을 바라보는 눈에는 당연하겠지만 반가움과 애정이 담겨 있었다. 툴툴거리는 것과는 별개로 깊은 신뢰가 있는 듯했다. 아니, 오히려 신뢰가 있기 때문에 그토록 툴툴거릴 수 있는 거겠지.

올망졸망한 푸른색 눈이 자신에게 향하지 않았던 그 잠깐의 순간을 요하네스는 정말이지 몇 번이고 회상하고 있었다.

그나마 엘로이즈의 말에 따르면 시온과 빈센트가 연회에 참석하지 않을 것이라고 하니 다행이었다. 빈센트와 엘로이즈가 사교의 의미로 춤이라도 추면 더 속이 뒤틀릴 것 같았으니까.

‘알아서 오겠지, 애도 아니고.’

다시 서류로 눈을 옮겼다. 아무리 생각해도 실내복 차림이었던 것이 마음에 걸렸다. 아주 거추장스러운 외출복을 입고 나갔어야 불편해서라도 금방 왔을 텐데.

수도 날씨가 꽤 후덥지근해서 카디건을 벗었을 것 같기도 했다. 북부에서는 워낙 날씨가 추워 모두 다 성안에서도 껴입고 있었기 때문에 사실상 처음 보는 옷차림이었다. 카디건 안쪽으로 보이던 흰 속살을 떠올리자 더 머리가 지끈거려졌다.

‘아무래도 그 소꿉친구 놈이 불순한 생각을 할 것 같은데….’

그동안 그는 수도에 아주 오래 머물렀고 당연히 여자들을 볼 일이 많았지만, 단 한 번도 평범한 실내복을 보고 이상한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다. 심지어 엘로이즈는 다른 여자들에 비해 노출이 심한 옷을 입은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푸른 혈관이 비칠 것만 같은 흰 피부와 가느다란 몸 선, 부드러운 살결 등은 한번 의식하니 야하기 그지없었다. 한때 그의 볼에 스스로 꾹 눌렀던 붉은 입술이 달싹이고 있는 걸 보니 몸 깊은 곳에서 이상한 충동이 느껴지기도 했다.

‘젠장, 불순한 생각은 내가 제일 많이 하고 있군.’

진도가 나가지 않는 서류만큼이나 스스로가 한심해져 갈 즈음 드디어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엘로이즈가 돌아온 것이다.

‘생각보다 늦었군.’

그가 헛기침을 한 번 하고 말을 걸어 보려는데 풀썩, 하고 침대에 쓰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엘로이즈가 도착하자마자 침대에 몸을 뉘인 듯했다.

‘이거… 좀….’

침대에 누운 엘로이즈가 옅은 한숨을 쉬었다. 시트에 몸을 비비는 듯도 했다. 옆방의 소리가 들린다는 것은 꽤 긴장되는 일이었다.

카디건을 벗는지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못된 상상을 해서 그런지 그 작은 소리에 마른침이 넘어갔다. 뭔가 잘못한 것도 없는데 요하네스는 마치 나쁜 짓을 하는 사람이 된 것처럼 머쓱해졌다.

자신도 모르게 꼼짝도 안 하고 있는데 타이밍 좋게도 레오가 들어왔다. 레오는 엘로이즈에게 이른 굿나잇 인사를 하러 왔다가 대놓고 시온과 빈센트에 대한 경계심을 표현했다.

하기야, 안 그래도 엘로이즈가 북부에 온 뒤부터 많은 것이 바뀌었다고 여기는 아이였다. 게다가 레오는 엘로이즈와 자신이 사이가 좋아서 본인과 함께 많은 시간을 보내는 줄 알고 있었다. 사실은 사이가 좋은 건 아니고….

…좋은 게 아니던가?

요하네스는 순간 헷갈렸다. 수상쩍다 여겨서 경계하고 있는 것은 논외로 치고, 이게 사이가 좋은 것이 아니라면 무엇이란 말인가?

엘로이즈와 레오의 대화가 이어졌다.

“우리가 좀 떨어져 지낸다고 해도… 서로 계속 좋아하면서 편안할 수 있는 거야. 가족이니까. 그러니 너무 슬퍼하지 않아도 돼. 곁에 없어도 서로 잘 지낼 거라고 믿고 씩씩하고 건강하게….”

요하네스는 다소 서글프게 이어지는 엘로이즈의 말에 미간을 찌푸렸다. 평소의 엘로이즈라면 당연히 ‘난 레오랑 안 떨어져! 어떻게든 북부에 꼭 붙어 있을 거야!’라며 실실거렸을 텐데 확실히 좀 이상했다.

결국 그는 문을 열고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왜 이렇게 화가 나고 불안한지 알 수가 없었다. 수상해서가 아니라, 정말이지 어쩔 수가 없어서 모습을 드러낸 것이었다.

“거기까지, 레오. 그다음부터는 내가 맡지.”

레오는 마치 지원군을 만난 것처럼 반갑다는 표정을 지었고, 엘로이즈는 황당하기 그지없다는 눈으로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가 나타날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는 얼굴이었다. 레오 역시 연결된 문이 신기하다는 듯 신나서 물었다.

“공작님! 왜 거기서 나오세요?”

“아.”

요하네스는 레오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말했다.

“부부의 방은 원래 이렇게 이어져 있거든.”

레오는 실제로 부부가 연결된 방을 쓰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공작성에는 한참 동안이나 공작 부인의 자리가 공석이었고, 엘로이즈가 북부로 온 뒤에는 자기가 직접 방을 고른답시고 아주 외진 이상한 방을 골랐으니 말이다.

“아?”

고개를 갸웃하는 레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요하네스가 느긋하게 설명했다.

“보고 싶을 때 이렇게 자주 보라고 말이야.”

그는 여전히 당황해하는 엘로이즈의 얼굴을 보며 천천히 말을 이었다.

“그러다 동생도 만들 수 있….”

다분히 충동적인 말이었지만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보통 부부들이 연결된 방을 쓰는 건 그런 이유가 컸으니까. 그리고 그녀의 ‘가족’들이 바로 옆에 와서 그런지, 요하네스는 자꾸만 그녀와 자신이 확실한 ‘가족’인 것을 계속해서 확인하고 싶었다.

심지어는 꽤 가능한 일이라고도 생각되었다. 어쩌면 당연한 거니까. 갑자기 그에게 부드럽게 안겼던 엘로이즈의 작은 몸이 떠올라 작게 한숨이 나왔다.

“이제 가서 자, 레오.”

남의 속도 모르고, 엘로이즈가 기겁하며 레오의 어깨를 붙잡아 출구 쪽으로 몸을 틀었다. 레오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눈을 깜빡이자 엘로이즈는 요하네스에게 눈을 흘기며 짜증스럽게 덧붙였다.

“공작님이 왜 갑자기 몹쓸 소리를 하실까.”

“그럼 왜 부인께서는 서운한 소리를 하셨을까.”

요하네스가 제 방처럼 책상에 걸터앉으며 놀리듯 말했다.

“두 노아비크가 기겁하게 말이야.”

“아니, 뭘 기겁해요?”

“공작령에 있을 땐 춥고 흐린 북부가 최고라더니, 수도에 오자마자 변심한 것처럼 굴잖아. 엘로이즈, 자존감 낮은 북부인들에게 애정을 줘 놓고 그렇게 매정하게 돌아서면 상처받아.”

요하네스는 당황한 엘로이즈의 얼굴을 보면서 오히려 더 여유로워졌다. 그녀가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같은 표정으로 그를 볼 때마다 이상하게 안심이 되었다. 아까 레오에게 했던 말은 다 빈말인 것처럼 느껴져서.

그는 느긋하게 책상에 걸터앉아 엘로이즈의 얼굴을 보면서 긴 다리를 까닥였다. 가운 뒤에 달려 있던 장식이 책상 서랍에 걸려 덜커덕거렸다. 요하네스가 무심결에 가운의 자락을 당겼을 때였다.

서랍 고리가 딸려오며 서랍이 살짝 열렸다. 텅 빈 서랍에 달랑 하나 들어 있는 서류가 그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이건….”

청혼을 받던 날 그가 아무 생각 없이 건넸던 이혼 서류였다.

“아.”

요하네스가 무엇을 발견했는지 눈치챈 엘로이즈 역시 난감하다는 듯이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순간 머리가 멍해졌다.

사실을 말하자면, 요하네스는 그 서류의 존재는 언제나 의식하고 있었지만 그 효용성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갑자기 일이 이렇게 몰아닥치기 전까지 그는 진심으로 엘로이즈를 북부에서 쫓아내려고 했었다.

솔직히 서류상 결혼 관계인 것은 그에게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엘로이즈가 알아서 새 출발을 위해 이혼장을 제출하면 그렇게 되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이후 너무 버거운 일들이 연달아 생겼다. 유제이의 방문이라든가, 디에고의 연회 초대라든가.

그동안 엘로이즈는 일관적으로 그를 좋아한다고 했었고, 그래서 요하네스는 그녀가 떠날 수도 있다는 생각을 단 한 번도 해 보지 않았다.

아, 생각해 보니 한 번 잠시 가볍게 상상해 본 적은 있었다.

“음… 마님! 공작님에게서 도망가시려고요? 이혼도 하시는군요. 아니, 이게 무슨 일이랍니까?”

바로 베이든이 에멘타 주술사의 능력을 빌려서 찻물 점을 쳤을 때였다. 그때 베이든은 아주 의외의 소리를 하면서 호들갑을 떨었었다.

“어이쿠… 근데 이혼하고 도망가시면 공작님께서 완전히 미치신다는데?”

요하네스는 원래 근거도 없이 떠드는 점 같은 건 믿지 않았다. 점 같은 것에 의존할 시간에 서류라도 하나 더 보는 게 낫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정말로 그 웃기지도 않는 말들이 다 들어맞는다면 에멘타에서는 그 찻물 점에 ‘점’이 아니라 ‘예언’이라는 이름을 붙였을 것이다.

그러므로 딱히 신경 쓰지 않았다. 물론 그 당시 순간적으로 치밀어 오르던 불쾌감은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그러나 지금, 엘로이즈의 첫 번째 서랍에서 이혼 서류를 발견한 건 그 망할 찻물 점과는 아예 차원이 다른 얘기였다.

아직 서류의 정체를 눈치채지 못한 레오는 갑자기 굳어진 요하네스의 얼굴에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엘로이즈가 눈치 빠르게 레오의 등을 밀었다.

“레오, 일단 가서 자.”

“네?”

“우리는… 음, 급히 해야 할 말이 있어서. 잘 자, 레오!”

“아.”

레오는 씩 웃으면서 말했다.

“네! 그럼 좋은 밤 보내세요!”

요하네스는 억지로 입꼬리를 올려서 레오를 배웅했다. 그리고 레오가 방문을 닫고 나가자 거짓말처럼 표정을 굳혔다. 그리고 먼저 부루퉁하게 말을 걸어온 사람은 엘로이즈였다.

“왜 그런 얼굴이에요?”

“…무슨 얼굴?”

“악령이 이 땅에 현신한 것 같은 얼굴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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