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화 (9/65)
  • 나는 빠르게 대답했다.

    “아, 들어와!”

    황급히 시계를 보았더니 아직 레오가 잘 시간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꽤 늦은 저녁이었다. 문이 열리고 잠옷 차림의 레오가 들어왔다.

    “오늘은 피곤해서… 일찍 자고 싶어서요. 근데 자기 전에 굿나잇 인사를 하고 싶어서 왔어요.”

    “그렇구나!”

    당연하겠지만 오늘 공작저에 도착했으니 아이인 레오는 피곤할 만도 했다. 나는 싱긋 웃으며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럼 얼른 레오 방에 가서….”

    “아뇨.”

    레오는 고개를 저으며 나를 다시 침대에 앉혔다.

    “오늘은 제가 엘로이즈 님에게 잘 자라는 인사를 할게요.”

    “어?”

    “그냥… 귀찮으실 수도 있으니까….”

    “뭐? 그게 무슨 소리야?”

    내가 정색을 하며 물었지만 레오가 꼬물거리며 잠옷 안에서 사탕 하나를 꺼냈다. 그러고는 내게 내밀며 풀 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까 엄마라고 불러서 죄송해요.”

    “아니, 그게 왜….”

    “근데 엘로이즈 님, 그 사람들이랑 가족 하지 말고 나랑 공작님이랑 가족 계속해 주면 안 돼요?”

    나는 순간적으로 당황해서 눈을 깜빡거렸다. 잠시 굳어 있는 내 손에 레오가 사탕을 꼭 쥐여 주며 덧붙였다.

    “남쪽 안 가면 안 돼요?”

    레오의 칭얼거리는 듯한 부탁이 이어졌다. 나는 좀 놀라서 가만히 레오를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아까 빈센트가 건국제가 끝나면 남부로 같이 가자느니 하는 말을 계속 마음에 두고 있는 듯했다.

    “그 사람들보다 나랑 공작님을 더 좋아해 주면 안 돼요?”

    아까 그 타이밍에 레오가 괜히 끼어든 게 아니다 싶었다. 시온과 빈센트가 내게 너무 친근하게 굴어서 어딘지 모르게 불안감을 느낀 것 같았다.

    “음, 레오.”

    나는 천천히 말을 골랐다.

    “일단… 그 사람들도 내 가족이고, 레오와 공작님도 내 가족이야. 어쨌든 시온은 내 오빠인걸.”

    “그래도 지금까지는 북부에 살았잖아요.”

    “가족이어도 떨어져 살 수 있는 거야. 레오도 맨날 공작님하고 붙어 있었던 건 아니잖아.”

    레오는 마구잡이로 고집을 피우려다가 내가 논리적으로 대답하자 시무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레오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주었다.

    “그리고 더 좋아하고, 덜 좋아하고 이런 것도 없어. 시온도 빈센트도, 공작님도 레오도 다 좋아할 수 있는 거야. 떨어져 살든 같이 살든 가족이니까.”

    “하지만 떨어져 사는 건 싫은데….”

    “음… 좀 떨어져 있어도 나랑 레오가 서로 사이좋았던 기억들이 잊히는 건 아니잖아? 시온도 빈센트도 나랑 오랜만에 만났지만 어제 만난 것처럼 편안해 보이지 않았어? 그래서 레오가 이렇게 불안해하는 거고.”

    나는 차분하게 말을 골랐다.

    만일 어제만 같았어도, 나는 언제까지나 레오랑 잘 지내겠다며 다독여 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왠지 이제는 내가 없는 미래를 대비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어차피 내가 곧 죽을 날을 받아 놓은 푸른 루비라는 걸 말할 수는 없어. 혹시나 말하더라도 끝에 끝까지 가서 밝혀야겠지.’

    아까 빈센트와 시온을 만나러 가는 길에 페이건을 마주쳤었다.

    페이건이 산더미같이 들고 있는 보고서는 얼핏 보니 ‘푸른 루비’에 대한 것이었다. 요하네스는 수도로 돌아오자마자 ‘푸른 루비’를 쫓고 있었던 것이다.

    그동안 ‘푸른 루비’는 아무런 활동을 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그는 도착하자마자 곧바로 자료를 받아 보기 시작했다. 마치 그것이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이라는 듯.

    그러나 요하네스는 알지 못할 것이다. 지금 이 순간 이 세상에서 ‘푸른 루비’를 가장 없애고 싶은 사람은 바로 나였다.

    그딴 과거 같은 건 아예 없었던 것처럼 싹 지우고 지금처럼 ‘엘로이즈 노아비크’로 살고 싶었다.

    늘 수상하다고 의심은 받지만 그래도 요하네스의 아내로, 어머니라는 소리는 듣지 못하지만 그래도 레오의 어머니로, 아무런 권한은 없지만 그래도 공작가의 안주인으로.

    계속해서 이렇게 살 수 있다면 평생 거짓말이라도 할 각오가 되어 있을 정도였다. 거짓된 모습으로 살 수 없다는 건 내게 사치와도 같은 고고함이었다.

    하지만 수도에 오니 마치 긴 꿈에서 깬 것처럼, 이제 그 끝이 코앞까지 다가온 게 느껴졌다. 꺼져 가는 생명 앞에서는 그럴듯한 거짓말조차도 유지하기 어려운 법이었다.

    그리고 이 꿈이 모두 깼을 때 슬픈 건 나 혼자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까 레오, 만약에 말이야.”

    나는 작은 미소를 지은 채로 천천히 말했다.

    “우리가 좀 떨어져 지낸다고 해도… 서로 계속 좋아하면서 편안할 수 있는 거야. 가족이니까. 그러니 너무 슬퍼하지 않아도 돼. 곁에 없어도 서로 잘 지낼 거라고 믿고 씩씩하고 건강하게….”

    “엘로이즈 님.”

    레오가 이상하다는 듯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근데 왜 꼭 떠날 것처럼 얘기해요?”

    그때였다. 갑자기 요하네스와 연결된 방문이 열렸다.

    “거기까지, 레오.”

    편안한 실내복 차림의 요하네스가 노크도 없이 문을 연 것이었다. 나는 화들짝 놀라서 요하네스의 다소 못마땅해 보이는 금빛 눈동자와 편안하게 내린 앞머리, 느슨한 가운 깃 같은 것을 바라보았다.

    워낙에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아서 옆방에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평소라면 당연히 집무실에 있을 시간이기도 하고 말이다.

    그리고 레오에게 그만 징징거리라고 훈계할 줄 알았던 요하네스는 뜻밖의 말을 꺼냈다.

    “그다음부터는 내가 맡지.”

    마치 레오와 한 편이라는 것 같은 어조였다.

    ⚜ ⚜ ⚜

    “요하네스 노아비크가 아들과 아내를 데리고 수도에 왔다고 합니다, 전하.”

    디에고는 측근의 보고를 들으며 손에 든 와인 잔을 한 바퀴 돌렸다. 측근이 고개를 조아리며 말을 이었다.

    “부인의 경우 오자마자 남부의 친지들을 만났고… 노아비크 공작은 바로 ‘푸른 루비’ 추적에 들어갔다고 합니다. 그 외에는 특이 사항이 없습니다. 아, 여독이 깊고 연회 때까지 컨디션을 관리한다는 이유로 주변에는 초대 및 방문을 정중히 사양한다고 알렸습니다.”

    “연회 때까지 노출하지 않겠다는 말이군.”

    그래 봤자 도착한 날을 빼면 이틀이다. 이틀 후면 어쩔 수 없이 연회에 모습을 드러내게 될 것이다.

    검은 머리에 황금빛 눈이라고 했다. 요하네스 노아비크를 꼭 닮았다고. 그러나 다르게 말하면 레이나 노아비크를 닮은 셈이었다.

    원래는 악령을 조종하여 몰래 죽이려고 했으나 이렇게 된 이상 얼굴을 보고 제대로 된 확신이라도 갖고 싶었다. 그리고 또 하나, 그의 계획에 전혀 없었던 의문의 여자까지.

    그는 레오의 암살에 실패한 뒤로 한 가지 확신을 얻었다. 북부는 그의 눈과 손이 직접적으로 닿지 않는 곳이었고 그래서 일이 예상대로 되지 않을 때 이유를 짐작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처리해야 할 대상이 있다면 수도로 불러서 그가 직접 그의 영역에서 처단해야 했다. 보는 눈이 많고 요하네스의 경계 역시 삼엄하여 훨씬 더 까다로워지더라도 말이다.

    미심쩍은 것은 가만두지 않는다. 그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했다.

    “분위기는 어때.”

    “사이가 좋아 보인다고는 합니다.”

    측근이 턱을 긁으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이동할 때 내내 함께 왔었고, 수도의 공작저에서도 다정한 모습을 보였다고 그러더군요. 아, 그리고 또 특이 사항이 있습니다.”

    “뭐지?”

    “신전의 보고입니다. 요하네스 노아비크가 수도로 오는 길에 또 한 번 최상급 악령을 잡았다고 합니다.”

    디에고는 옅은 한숨을 쉬었다. 두 번이나 최상급 악령을 잡다니 정말이지 괴물 같은 인간이었다.

    “그런데 최상급 악령이 또 나왔다고?”

    “원래는 20년 전 최상급 악령이 나왔으니까 몇백 년간은 나오지 않는 것이 정상인데…. 신전의 말로는 이번 실험 때문에 시공간이 좀 뒤틀린 것 같다고 합니다.”

    그럴듯한 추측이었다. 어쨌든 이런 식의 악령을 조종하는 실험은 처음이었고 당연히 부작용이 나타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일이 벌어질 때마다 디에고는 노아비크의 핏줄을 대놓고 경계하게 되었다. 최상급 악령을 즉시 감지하고 또 죽일 수 있는 이능은 확실히 특별했다.

    그리고 또 하나, 대륙에서 이능으로서 핏줄을 증명할 수 있는 가문은 노아비크 공작가와 벨리아나스 황가, 딱 둘뿐이었다. 그 사실이 디에고를 몹시 거슬리게 했다. 마치 선택받은 능력이 나누어진 것만 같아서.

    사실 노아비크와 벨리아나스는 거울과도 같이 비슷하지만 대조적인 이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그 두 집안의 피를 이은 아이가 세상에 있을 가능성이라니,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다시 한번 눈을 번득인 디에고가 미간을 찌푸리며 화제를 돌렸다.

    “그런데 공작 부인의 친지들이 왔다고? 여전히 특이 사항은 없나?”

    “네. 없습니다. 남부야 워낙에 뜨내기들이 왔다 갔다 하는 동네라 주변 사람들을 수소문해도 별 의미는 없고… 뭐, 거기야 돈만 받으면 대놓고 범죄자도 신분 세탁을 해 주는 곳이니까요. 어쨌든 여러 가지 서류도 딱히 걸리는 데가 없었습니다.”

    디에고가 와인을 한 모금 마신 뒤 눈을 가늘게 떴다. 연회 때까지만이라도 꽁꽁 숨겨 두겠다는 이야기 같은데, 어차피 노아비크 공작가는 대귀족이므로 건국제까지 참석해야 했다.

    “뭐.”

    디에고는 생각에 잠긴 얼굴로 중얼거렸다.

    “확인할 수 있는 기회는 앞으로 많으니까.”

    ⚜ ⚜ ⚜

    요하네스는 제프의 심문을 마치고, 집무실에서 서류를 읽다가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 주섬주섬 서류를 챙겨서 침실로 향했다.

    “역시 여독이 좀 심하신가 봅니다.”

    이른 시간에 집무실을 뜨는 그를 보며 페이건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역시 오늘은 좀 쉬심이….”

    “너도 좀 쉬어.”

    그렇게 요하네스는 산더미처럼 쌓인 서류를 들고 침실로 온 것이었다. 자신이 생각해도 웃긴 일이었다.

    문이 연결된 옆방에서는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요하네스는 헛기침을 몇 번 하고 ‘엘로이즈?’ 하고 불러 보았다.

    당연히 대답은 없었다. 하긴, 엘로이즈가 이웃집에 간다고 한 것이 얼마 되지 않았다. 요하네스는 시계를 보고 생각보다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았음을 자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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