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화 (8/65)
  • 작은 손에 그가 만든 공깃돌이 아니라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총이 쥐어졌다. 무기가 완성될 때마다 그녀에게 들고 갔다.

    시간이 지날수록 소녀는 표정이 없어졌고, 빈센트보다 더 느리게 자랐으며 목소리에는 기운이 없어졌다.

    엘로이즈에게 그는 그저 가끔 찾아와 무기를 전달하는 보육원 동기였겠지만 그에게 엘로이즈는 항상 연구 대상이었다. 그녀에게 맞는 무기를 제작하는 것이 그의 임무였으니까.

    엘로이즈가 빈센트를 생각하는 것보다 수십 수백 배는 더 긴 시간 동안 그는 그녀를 생각했다.

    어쩌면 일곱 살 때도 그랬을지 모르지. 엘로이즈는 아무 생각 없이 여러 아이들과 뛰노는 여자애였고, 빈센트는 엘로이즈만을 위해 잡동사니를 만들었으니까.

    공적을 인정받아 노예로는 아주 특별한 케이스로 중간급 간부 수준까지 올라갔을 때 그는 엘로이즈가 오래 살지 못한다는 것을 들었다.

    시온과 본격적으로 ‘에이스’ 폭발을 기획할 때부터 그는 엘로이즈의 얼마 남지 않은 생을 의식하고 있었다.

    방법이 없으니 끝까지 지켜 줘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동안 늘 지켜봐 와서 그런지 그게 당연한 것처럼 느껴졌다.

    당연히, 당연히 자신이 엘로이즈의 처음과 끝을 모두 함께하겠다고. 세상사에 서툰 엘로이즈가 무엇을 결정하든 언제나 같이 있어 주고 지지해 주겠다고.

    그런데 엘로이즈는 그의 예상과는 전혀 다르게 굴었다. 자신의 생이 얼마 안 남은 것도 알고 있다고 했고, 갑자기 요하네스와 결혼하겠다는 폭탄선언까지 했다. 사실상 그와 시온의 보호가 전혀 필요 없다는 의미였다.

    받아들이기 힘들었지만 그래도 그녀가 살 수 있는 길이라고 하니 보내 주었다. 어차피 둘이서 제대로 된 결혼 생활을 할 수 없을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요하네스가 갑자기 북부로 올라갔을 때부터 불안했는데… 오늘 엘로이즈와 요하네스를 마주치고 나서 빈센트는 속에서 갑자기 끓어오르는 무언가를 느꼈다. 항상 냉철하다고 생각했던 그에게는 아주 생경한 감정이었다.

    “나도… 나도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고.”

    빈센트가 갈라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녀의 옆에 다른 남자가 있다는 것이 이토록 마음 찢어지는 일이었을 줄은 몰랐다.

    아마 그동안 엘로이즈가 세상과는 완전히 차단된 삶을 살았기 때문에 전혀 생각하고 있지 않은 상황이어서 그럴 것이다.

    “…시온.”

    빈센트는 아랫입술을 살짝 물었다. 대놓고 자신의 여자인 것처럼 엘로이즈의 어깨에 손을 두르던 요하네스와, 그 스킨십에 딱히 거부감을 보이지 않던 엘로이즈를 떠올리면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았다.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아까 공작저 앞에서 본 엘로이즈는 많은 사람들 속에 둘러싸여서 그 어느 때보다도 행복해 보였다. 그들과 남부에 머물 때보다도 훨씬 더.

    “엘로이즈가… 혹시 요하네스 노아비크를 좋아하면 어쩌지.”

    빈센트는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죽을 날이 가까워지고 있는 애를 두고 질투나 하고 있고, 정말 한심하기 짝이 없어….”

    시온은 늘 실실거리면서 웃고 있는 평소의 표정과는 달리 아주 복잡한 얼굴을 해 보였다. 그러고는 골치 아프다는 듯 이마를 짚고 말했다.

    “한심한 걸 알면 됐어.”

    “…….”

    “네 마음까지 지금 엘로이즈에게 강요할 생각은 아니겠지. 장례를 치르더라도 우리가 해 볼 수 있는 건 다 해 보고 치러야 할 것 아냐.”

    “…….”

    “괜히 엇나가지 말고 엘로이즈가 시키는 대로 해. 만일 엘로이즈가 요하네스를 유혹하겠다고 결심하면 그마저도 도와주란 말이야. 어? 그게 너나 나나 장기적으로 후회 안 하는 길이야.”

    시온의 말에 빈센트는 이를 악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생각만 해도 괴롭다는 얼굴이었다. 시온은 결국 자리를 박차고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제기랄, 이래서 너무 진지한 사랑을 하면 안 돼. 결국에는 지극히 상식적인 행동을 하는 것조차 힘들게 만들어 버린다고.”

    빈센트를 거실에 혼자 두고 자신의 방에 들어온 시온은 한심하다는 듯이 혀를 끌끌 차며 책상에 앉았다.

    그는 본디 여성 편력이 화려했다. 그러므로 빈센트처럼 서투른 감정 정도야 흘끗 봐도 눈치챌 수 있었다.

    “문제는….”

    시온은 의미 없이 책상의 서류들을 만지작거리면서 중얼거렸다.

    “그 서투른 감정이 하나가 아니라는 거지….”

    실제로 빈센트가 단번에 긴장할 만큼, 아까 얼핏 본 엘로이즈와 요하네스의 분위기는 미묘했다. 서로가 서로를 보는 눈에 감출 수 없는 호감이 묻어났던 것이다.

    수많은 연애를 겪어 오고 지켜본 그는 자신도 모르게 신음을 내뱉었다. 그건 정말이지, 조금의 계기만 생기면 완전히 터져 버릴 것 같은 뇌관이 훤히 드러난 폭탄을 보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아무런 호감이 없는 남녀 간에도 불을 지필 수 있는, 아주 오랜만에 열리는 거대하고 화려한 황궁 연회가 다가오고 있었다.

    “미안하다, 빈센트.”

    시온은 한숨을 쉬며 눈을 깜빡였다.

    “그래도 애 먼저 살리는 게 우선 아니겠냐.”

    “만일 엘로이즈가 요하네스를 유혹하겠다고 결심하면 그마저도 도와주란 말이야.”

    아까 빈센트에게 그렇게 말한 것은 빈말이 아니었다.

    아까 엘로이즈를 바라보던 요하네스의 눈빛에는 분명한 호감이 새겨져 있었다. 그렇기에 빈센트 앞에서 보란 듯이 엘로이즈의 어깨를 감싼 것이 아니겠는가.

    이 상황에서 요하네스에게 엘로이즈가 무언가를 받아 내야 한다면, 단신으로 무언가 해내는 것보다는 감정적으로 그를 유혹하는 것이 더 빨랐다. 엘로이즈 역시 이런 쪽에서는 경험이 없기에 그와 연관된 계획을 세우지 못하는 것 같지만.

    확실히 엘로이즈와 유혹은 사실 지나치게 어울리지 않는 단어였다.

    ‘게다가… 정말로 엘로이즈가 요하네스를 좋아한다면 오히려 더 작정하고 유혹하기 어려울 수도 있어.’

    차라리 한쪽의 짝사랑이라면 이용해 먹기라도 하겠는데, 엘로이즈 쪽도 상황이 심각해 보이기는 마찬가지였다. 아까 빈센트 앞에서 요하네스의 편을 들던 그녀의 모습은 사실 시온으로서도 좀 놀라울 정도였으니까.

    아까 갑자기 그들의 말에 동의하는 척하면서 피곤하다고 일어난 것은 분명히 본인 역시 당황스러워서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 내가 도와줘야 해.’

    시온은 책상 서랍에서 황궁 연회 초대장을 꺼냈다. 원래는 이 초대장에 연회 전까지 참석 여부를 표기하여 황궁에 전달해야 했다. 시종들이 대략의 인원을 파악하기 위해서였다.

    사실 이것을 핑계 삼아 수도에 오기는 했지만 정말로 연회에 참석할지는 결정하지 못했었다. 엘로이즈의 말마따나, 아무리 그들의 얼굴을 아는 ‘에이스’의 생존자가 없을지라도 굳이 많은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는 건 현명한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시온은 망설이다가 깃펜을 들어 ‘참석’ 란에 유려하게 서명했다.

    ⚜ ⚜ ⚜

    빈센트와 시온이 걱정할까 봐 웃는 얼굴로 저택에 들어왔지만, 사실 내 속은 몹시 시끄러웠다.

    여독을 핑계 삼아 얼른 자리를 피했지만 사실 정말로 피곤해서 돌아온 것은 아니었다.

    이대로라면 오랜만에 만난 시온과 빈센트의 안부도 제대로 묻지 못할 만큼 표정 관리가 어려울 것 같아서였다.

    ‘정말… 정말 내가 요하네스를 좋아하는 건가.’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는 사실이기는 했다. 그러나 필사적으로 모른 척해 온 것은, 그것을 직면해 봤자 더 괴로워질 것이라는 사실도 짐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언제부터인지 알 수 없었다.

    회귀 전 처음으로 마주쳤을 때 내 발목에 붕대를 직접 감아 주었을 때부터? 내가 ‘푸른 루비’와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뻔히 알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최상급 악령으로부터 나를 끝까지 구해 줬을 때부터?

    솔직히 그 순간들이 내게 엄청나게 인상 깊게 남았음은 부정할 수 없었다.

    나는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요하네스 노아비크를 의식하며 살았고 그를 공공연하게 미워했으나… 결국에는 미워할 수 없다는 걸 깨닫게 된 계기가 된 순간들이었기 때문이다.

    모든 의외성은 사람에게 여운을 남기는 법이다. 요하네스는 의외로 좋은 사람이었고 나는 오랫동안 그 여운에 시달렸다.

    그러나 그 순간들은 이미 사라졌다. 회귀하면서 그 모든 일이 없던 것으로 되었으니 결국 나 혼자만 기억하고 있는 허상에 가까웠다. 그렇기 때문에 큰 의미를 두지 않으려고 했다.

    하지만 회귀 후에도 결국 나는 요하네스에게 향하는 마음을 어쩌지 못한 듯했다.

    거친 언어와 요요한 유혹을 넘나들며 사람의 혼을 쏙 빼놓고도, 결국 다친 내 발목이 걱정되어 명백히 수상한 아내를 바로 쫓아내지 못했던 사람.

    그의 인생에 잠시 난입한 소녀 하나를 잊지 못해서 평생을 죄책감에 시달리며 어떻게든 비슷한 이에게 선한 영향력을 끼치려고 애를 쓰는 사람.

    그가 장난스럽게 건넨 결혼 선물이, 무심하게 놓아 준 푸딩 하나가, 아무렇지도 않게 썰어 준 소시지 같은 것들이 어느 순간부터 나를 참 많이 약하게 했다.

    ‘근데 약해진 걸로 끝이 아니라… 아무래도 마음을 주게 되었나 봐.’

    제삼자가 보기에 내가 정말로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이고 있다면. 회귀 전 내 마지막을 함께해 준 사람들 앞에서 다른 누구도 아닌 요하네스의 편을 들고 있다면.

    불가능한 일을 하게 하는 건 사랑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나는 터덜터덜 방으로 걸어 들어와 침대에 엎어졌다.

    ‘하지만… 스물다섯이 되기까지 두 달도 채 남지 않았는데.’

    혹시 만약에 그가 나를 정말 좋아하게 된다고 하더라도 그건 또 그것대로 신경 쓰이는 일이었다. 나는 그제야 내가 그동안 정말 앞만 보고 살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떻게 이럴 수 있지.’

    죽을 날이 얼마 안 남았는데 그 이후를 의식하지 않고 있었다. 그냥 최선을 다해서 레오를 해치려고 한 디에고의 속셈을 밝히고 난 뒤 요하네스와 거래할 생각만 했다. 살고 싶다는 생각만 간절하게 해 왔다.

    순간 열이 올라서 카디건을 벗었다. 일이 다 잘못되어 만일 내가 죽고 나면… 남은 사람들은 어쩌지. 그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똑똑, 하고 노크 소리가 들렸다.

    “엘로이즈 님?”

    레오였다. 나는 생각을 멈추고 일단 몸을 일으켰다.

    “들어가도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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