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화 (7/65)
  • “빌어먹을 요하네스 노아비크가 그랬어? ‘푸른 루비’가 절대 악이니까 쫓는 거라고? 넌 ‘에이스’를 키워 낸 아주 몹쓸 애고, 자기는 그걸 잡는 정의의 사도래?”

    “빈센트, 왜 그래.”

    시온이 빠르게 빈센트의 팔을 잡았지만 빈센트는 냉소적인 어조로 계속 말을 이었다.

    “정신 차려. 그 인간의 궤변에 당사자인 너까지 놀아날 셈이야?”

    “아니, 궤변이 아니고… 사실 객관적으로 생각해 보면 내가 범죄자니까 요하네스는 딱히 잘못이 없….”

    “와, 엘로이즈. 너 지금 누구 편을 들고 있는지 알기나 해?”

    나는 살짝 아랫입술을 물었다. 빈센트와 시온이 왜 저런 반응을 보이는지 짐작은 할 수 있었다. 회귀 전의 일을 아예 모르는 그들의 입장에서는 요하네스만 생각하면 치를 떨던 내가 갑자기 북부에 다녀오더니 그의 편을 들고 있는 셈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내 계획에 대해 왈가왈부할 수 있다는 건 아니었다.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그건 내가 알아서 해.”

    그리고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요하네스 노아비크에게 쫓긴 건 나야, 빈센트. 그러니 여기서 그에게 화낼 수 있는 사람도 나뿐이야. 네가 아니라.”

    순식간에 나와 빈센트 사이에 냉담한 기류가 흘렀다. 그 사이로 비집고 들어온 사람은 바로 시온이었다. 시온은 나긋나긋하지만 걱정된다는 어조로 살살 나를 달랬다.

    “엘로이즈, 그 사람이 네게 잘해 준다는 건 알겠어. 원래 자기 사람 아끼기로 유명한 사람이었으니까.”

    “…….”

    요하네스가 내게 잘해 주는 건가. 대답하기가 어려웠다.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슬프게도 반박의 여지는 없었다. 그는 내게 잘해 주었다. 일상에서 느껴지는 소소한 것들을 하나하나 손꼽아 보기에도 시간이 모자랄 만큼.

    “그런데 잊지 마.”

    시온은 내 어깨에 손을 얹으며 나지막하게 말했다.

    “요하네스 노아비크는, 제 아내가 ‘푸른 루비’라는 걸 알면 바로 신전에 넘겨 버릴 인간이라는 걸.”

    슬프지만, 그 말에도 나는 반박하기가 어려웠다.

    “엘로이즈.”

    시온이 부드럽게 쐐기를 박았다.

    “가족이라는 건 함께 진창을 굴러 봤던 우리랑만 될 수 있는 거야. 요하네스 노아비크처럼 빛 속에 사는 사람들하고 가족 놀이를 해 봤자 상처받는 건 너뿐일걸.”

    시온의 말에는 틀린 것이 하나도 없었다. 나는 우울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어느새 나도 모르게 ‘엘로이즈 노아비크’에 너무 심취해서 살았다는 것을 이제야 깨닫게 된 기분이었다. 처음에는 요하네스를 마주치는 것만 해도 싫었는데 지금은 이런저런 대화를 하는 것이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편하기까지 했다.

    “어차피 영원히 요하네스 노아비크와 지낼 생각인 것도 아니었잖아.”

    시온은 내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달래듯 말했다. 마구 소리를 질렀던 빈센트와는 대조적으로, 달콤하고 부드럽기까지 한 목소리였다.

    “네가 그럴 생각이라면 우리가 최선을 다해 도와줄게. 여기서 요하네스에게 원하는 것을 얻고, 마법진 다 지워 버린 뒤에 우리와 같이 남쪽에 내려가자.”

    그가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결론을 냈다.

    “그렇게 요하네스 노아비크에게서 영원히 도망치는 거지. 오래전부터 네가 원했던 것처럼.”

    내가 그런 말을 한 건 사실이었다. ‘에이스’를 폭발하고 나오던 날, 빈센트에게도 요하네스 노아비크에게 쫓기는 것이 너무 싫었다고 말했으니까. 그러므로 나는 그 말에 딱히 반박하기가 어려웠다.

    처음, 원래, 본디, 뭐 이런 단어가 붙으면… 내가 품고 있는 모든 마음과 결심들이 모두 다 어색해졌다.

    “아… 그래….”

    결국 나는 눈을 내리깔며 패배를 선언하듯 중얼거렸다.

    “…그랬었지 …맞아.”

    처음에 요하네스와 결혼하러 간다고 했을 때, 나는 분명 내 마법진을 지우고 나서 남부로 다시 돌아오겠다고 했었다. 그것이 아주 당연했던 때가 있었다.

    나는 손가락을 꼬물대고 있다가 천천히 일어섰다. 그리고 빈센트와 시온을 바라보며 싱긋 웃은 뒤 다시 발랄한 어조로 말했다.

    “이런 거 준비해 줘서 고마워. 확실히 든든하네. 워낙에 능력 있는 추적자한테 쫓기고 있는 몸이라.”

    내가 갑자기 태세를 전환하자 빈센트도 시온도 다소 의아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그 의문에 찬 눈빛을 모르는 척하며 쾌활하게 물었다.

    “그럼 여기서 시온도 빈센트도 건국제 때까지 계속 머물 거지?”

    그 말에 대답한 사람은 빈센트였다.

    “…네 생일 때까지는 무조건 머물 거야.”

    “맞네.”

    나는 허탈하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내 스물다섯 번째 생일이 다시 다가오고 있었다.

    이제 다시 최상급 악령이 나타날 일도 없었다. 이미 이 시점에 나와야 할 최상급 악령은 나온 셈이니까.

    “고마워, 다들. 정말로.”

    그제야 나는 시온과 빈센트가 굳이 이곳까지 온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굳이 말로 하지는 않지만, 그들은 혹시 모를 나의 마지막을 지켜 주기 위해서 온 것이었다. 절대로 혼자 세상을 떠나게 하지 않기 위해서.

    그들은 회귀 전에도 그랬다. 미련스럽게 ‘시간의 돌’을 찾겠다며 매일 밤 수도 근처를 헤매는 내 옆에 끝까지 있어 주었다.

    “진짜… 고마워.”

    나는 조금 충동적으로, 시온과 빈센트에게 다가가 그들을 한 번씩 안아 주었다. 시온은 ‘으이구….’라며 편안하게 내 등을 토닥여 주었지만, 빈센트는 이런 스킨십이 익숙하지 않은지 몸을 아주 뻣뻣하게 굳혔다.

    빈센트에게서 몸을 뗀 나는 배시시 웃으면서 말했다.

    “그럼 오늘은 일단 난 갈게. 가까우니까 내일 또 만나서 얘기하자. 오늘은 막 도착해서 내가 너무 피곤하거든… 알잖아, 나 체력 약한 거.”

    보고 싶다고 대낮부터 공작저 앞에서 진을 치고 있던 것이 무색하게, 시온도 빈센트도 내 피곤하다는 말에 즉시 내 등을 떠밀기 시작했다.

    “그래, 얼른 가서 쉬어.”

    “여기서 자고 가면 안 돼? 아, 하긴. 거기에 하녀들이 많겠지. 여긴 시중을 들 사람들이 아무도 없어서… 음, 근데 엘로이즈? 언제부터 네가 시중들 사람이 필요했지?”

    “시중을 떠나서 여긴 당장 잠옷도 없잖아, 멍청아. 설마 나보고 네가 준비해 둔 천 쪼가리를 입고 자라는 건 아니지?”

    “…그거 빈센트가 산 거야.”

    “뭐?”

    나는 눈을 크게 뜨며 빈센트를 바라보았고 빈센트가 기겁하며 말을 더듬었다.

    “나, 난… 혹시나 수색을 할 때… 미, 민망하라고 최, 최선을….”

    “그래, 빈센트가 정말 최선을 다하더라.”

    시온이 진지하게 대꾸했다. 명백히 놀려 먹는 말인데도 불구하고 빈센트는 어쩔 줄 몰라 했다. 나 역시 시온에게 합류해서 빈센트를 놀리며 그들과 함께 비밀스럽게 숨겨진 은신처를 나왔다.

    바로 옆인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내가 공작저에 들어갈 때까지 지키고 서 있었다. 나는 그들에게 크게 손을 흔들며 생각했다.

    “어차피 영원히 요하네스 노아비크와 지낼 생각인 것도 아니었잖아.”

    예전에 선언했던 그 말이 무색할 정도로 나는 많이 바뀌어 있었다.

    그리고 사람을 말도 안 되게 바꿀 수 있는 건 원래 단 하나뿐이라고 했다. 베이든이 지긋지긋하게 말하던 것, 그러니까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단 하나의 감정.

    복잡하게 생각하기 싫어서, 직면해 봤자 서글프기만 할 테니 자꾸 피해 오기만 했던 진심. 하지만 이 사실을 회피하면 앞으로 나만 더 우스워질 것이다.

    나는 아무래도 요하네스를 좋아하고 있는 것 같았다. 어쩌면 꽤 오래전부터.

    ⚜ ⚜ ⚜

    공작저 안으로 총총 들어가는 엘로이즈의 작은 뒷모습을 확인한 후에야 빈센트와 시온은 본인들의 집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집에 들어오자마자 시온은 빈센트를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

    “왜 흥분하고 그래.”

    “…….”

    “물론 엘로이즈가 다른 남자의 편을 드는 게 기분이 나쁠 수는 있겠지. 그런데 오랜만에 본 애를 그렇게 몰아붙여야 했냐?”

    “…다른 남자가 아니라 요하네스 노아비크니까….”

    “헛소리하지 마. 엘로이즈 말마따나, 쫓긴 건 엘로이즈지 네가 아니야.”

    “…….”

    “나한테까지 숨길 필요 없어. 난 이 분야의 전문가니까. 알 것 아냐.”

    “잘났다.”

    빈센트는 퉁명스럽게 대꾸한 뒤 머리카락을 헤집었다. 시온과 대화하기 싫다는 듯, 그는 성큼성큼 걸어서 엘로이즈가 몸을 눕혔던 소파에 바로 쓰러지듯 몸을 묻었다.

    “언제부터인데.”

    시온이 그의 앞에 잽싸게 앉아서 추궁하듯 물었다.

    “대강 눈치는 채고 있었지만, 이 정도로 깊은 감정인 줄은 몰랐는데. 아니, 요하네스 노아비크 앞에서도 감정을 못 숨기면 어쩌겠다는 거야?”

    시온의 힐난하는 말에 빈센트가 한숨을 쉬며 안경을 벗고 눈을 문질렀다.

    “…나도 몰랐어.”

    어린 날 엘로이즈에 대한 기억은 선명했다. 그 나이대의 애들이 많은 것을 기억하지 못한다지만 빈센트는 어릴 때부터 머리가 좋았다.

    시작은 평범했다. 같은 보육원에서 자라는 사이좋은 친구. 또래들 사이에서 겉돌며 혼자 이상한 것들을 만드는 남자애와 모두가 좋아하는 밝고 명랑한 여자애. 그러다가 ‘에이스’에 동시에 팔려 간 뒤 갑자기 그들은 이상한 운명 공동체가 되고 말았다.

    빈센트는 ‘에이스’에서 이런저런 일을 했지만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은 엘로이즈의 무기를 만드는 것이었다. ‘에이스’ 내에서도 ‘푸른 루비’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아는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 각종 난무하는 추측 속에 빈센트만이 진실을 알고 있었다.

    ‘푸른 루비’는 큰 눈을 도르르 굴리면서 울기도 잘 울고 웃기도 잘 웃는 평범한 여자애였다. 보육원의 아이들 중에서는 가장 예쁜 금발을 가지고 있었고 동그란 눈이 마치 강아지 같은 소녀.

    “빈센트, 공깃돌 좀 만들어 주라!”

    그 애는 나름대로 착하고 친절하며 또래들과도 잘 지냈다. 남자아이들과 잘 어울리지 않는 빈센트에게 이것저것 요구하기도 했다. 빈센트는 그런 순진한 요구가 싫지 않았다.

    “너 정말 잘 만든다… 어쩜 이렇게 다 크기가 똑같지? 우리 다른 애들한테도 자랑하자. 네가 이렇게 솜씨가 뛰어나다고.”

    “자랑은 됐고… 그냥 더 필요한 것 있으면 말해.”

    “진짜? 그래도 돼?”

    “어. 어차피 이런 거 만드는 건 나도 재밌으니까. 네 물건 만들어 주는 건 귀찮지도 않아.”

    엘로이즈의 친구들은 많았지만, 빈센트의 친구는 엘로이즈뿐이었으므로 빈센트는 정말이지 그녀만을 위한 잡동사니를 만들었다.

    함께 ‘에이스’로 잡혀간 순간, 그는 그 작은 여자애를 위해 총을 만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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