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화 (6/65)
  • 빈센트와 시온은 나를 2층의 햇볕이 잘 드는 방 하나로 안내했다. 침대와 책상, 테이블과 의자 몇 개… 평범하기 짝이 없는 방이었다.

    “네 방이야.”

    시온이 빙그레 웃으면서 말했다.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빈정거렸다.

    “와, 진짜 쓸데없는 짓을 했네. 내가 정말 여기서 지낼 거라고 생각한 건 아니지?”

    물론 시온은 내 비난에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을 지어 보이면서 한술 더 떴다.

    “말 나온 김에 여기서 머물래? 솔직히 요하네스 노아비크랑 너랑 같이 있는 걸 보니까 살 떨리던데.”

    “그 살 떨리는 모습 들키기만 해 봐.”

    나는 차갑게 대꾸했다.

    “안 그래도 수상하다고 의심받고 있는데 정말 들킬 수도 있을 것 같으니까.”

    “와, 엘로이즈.”

    시온이 감탄하며 웃었다.

    “너 지금 진짜 요하네스 노아비크 같은 표정이었어. 북부 가서 못된 것만 배워 왔네? 나쁜 짓 배우고 싶으면 말하지 그랬어, 내가 더 잘 가르칠 수 있는데.”

    나는 그 능글맞은 얼굴을 가만히 쏘아보았다. 시온에게 말리기 시작하면 한도 끝도 없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세상 쉬워 보이는 남자지만 사실상 ‘에이스’를 무너트린 남자였다. 내가 미심쩍은 눈으로 침묵을 지키고 있자 빈센트가 담담하게 말했다.

    “혹시나 들켰을 때를 대비해서 우리가 온 거야, 엘로이즈.”

    “뭐?”

    “만일 정체를 들키면 도망칠 곳이라도 있어야 하잖아.”

    “그래서 여기로 도망치라고?”

    “응.”

    빈센트는 아무렇지도 않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내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이자, 빈센트가 씩 웃으며 구석에 있던 옷장 문을 열었다. 남부의 노출이 심한 드레스와 보기만 해도 민망한 속옷들이 가득 차 있었다.

    “이거 시온이 채웠어? 여기 내 방은 맞아? 시온 방 아니고?”

    내가 질색한 얼굴로 묻자 시온이 절대 아니라며 팔짝 뛰었다. 내가 미심쩍은 얼굴로 빈센트를 바라보자 그가 평상시와 같은 무뚝뚝한 얼굴로 그 민망한 옷들을 모두 구석으로 몰았다.

    “잘 보기나 해.”

    그러고는 옷장 벽에 걸쳐진 작은 못을 건드렸는데, 동시에 옷장 벽이 뒤로 밀리더니 아래로 향하는 계단이 나왔다.

    “어… 이거….”

    “따라와.”

    빈센트는 씩 웃으며 먼저 앞장을 섰다. 나는 빈센트와 시온을 따라 그 비밀 계단을 내려갔다. 얼마 내려가지도 않아서 꽤 넓은 방이 나왔다.

    “혹시나 요하네스에게 정체가 들키면 여기로 도망쳐 와.”

    마치 견고한 요새처럼 저택 안에 숨겨져 있는 비밀 방이었다. 창문이 없어서 오랫동안 있기에는 무리가 있을 것 같았지만 나 같은 처지에 비밀 공간 하나가 있다는 건 꽤 마음이 든든한 일이었다.

    “밖의 소리도 잘 들리니까 적당한 때 빠져나가기도 쉬울 거야.”

    “와.”

    나는 씩 웃으며 작은 방에 들어찬 몇 가지 아기자기한 살림들을 바라보았다. 혹시라도 오래 머물게 될까 봐 물과 간이 식량들이 쌓여 있었고 칼과 가위, 거울과 여벌 옷은 물론 몇 권의 책까지 구비되어 있었다.

    “심지어 이것도 있네.”

    나는 그 잡다한 살림들 속에서 홀린 듯이 새로운 총을 집어 들고 씩 웃었다.

    이게 아까 빈센트가 말한 ‘테디’임에 틀림없었다.

    “되게… 예쁜데? 총 같지 않다.”

    지금까지 내가 써 온 총들은 모두 새카맣고 무거운 것들이었다. 그러나 이번에 빈센트가 내 몫으로 마련한 총은 마치 예술 작품처럼 예뻤다. 흰 몸체에 고급스러운 목각 부조가 새겨진 기다란 장총은 보면 볼수록 아름답기까지 했다.

    회귀 전, 빈센트는 권총도 훨씬 더 늦게 발명해 냈었고 이렇게 예쁜 총은 만든 적도 없었다. 역시 남부에서 연구에 전념하니 결과물이 잘 나오는 것 같았다. 반대로 생각하면 회귀 전에 나를 건사하는 일이 쉽지만은 않았다는 뜻이었다.

    마치 무심한 가장처럼 보석만 던져 줘서 몰랐는데, 생각해 보니 살림 꾸리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이제 와서 보니 정말 미안한 일이었다. 같은 조건에서 두 번 살아야만 보이는 것들이 있었다.

    빈센트가 으스대며 말했다.

    “실탄도 들어 있어. 만일에 대비해서.”

    “아, 그래?”

    그 말을 듣고 보니 생각나는 것이 있었다. 나는 품속에서 권총을 꺼냈다.

    “이거 잘 썼어. 원거리 명중률은 좀 떨어져도 소지하기에는 좋더라.”

    “아.”

    빈센트가 반갑다는 듯이 눈을 빛냈다.

    “공작성에서는 딱히 몸수색을 당할 일이 없었는데, 공작저는 공작성보다 좁기도 하고 또 황성에 드나들 때 무기 소지를 검사할 수도 있을 것 같아서. 딱히 쓸 일도 없는 것 같으니 이건 여기 둘게.”

    “줘 봐.”

    내가 책상 서랍 안에 권총을 두려고 하는데 빈센트가 손을 내밀어 권총을 가져갔다.

    “원거리 명중률이 문제라면 시간을 두고 더 개조해 보게. 사실 나도 아직 미완성이라고 생각하고 있기는 했어.”

    “마음대로 해.”

    빈센트와 내 손이 스쳤다. 어쨌든 무기를 직접 다루고 만지는 손이었다. 굳은살이 잔뜩 박여있는 데다가 화상 자국도 꽤 많았다. 내가 그의 손을 한참 동안이나 보고 있자 빈센트가 머쓱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장갑을 안 꼈네. 집이라.”

    “안 끼는 게 당연한 거지. 뭐 하러 불편하게 끼고 있어?”

    남부에 머무는 동안 빈센트는 밖에 나갈 때 꼭 장갑을 꼈다. 남들에 대해 떠들기 좋아하는 남부 사람들이 빈센트의 손을 보고 며칠 동안이나 공공연하게 ‘수도에서 정말 험한 일을 하다가 왔나 보다.’라며 쑥덕거렸기 때문이다.

    자신의 손이 이야깃거리가 될 것이라는 생각도 못했던 빈센트는 그때 좀 놀라서 장갑을 끼기 시작했고 이제는 완전히 버릇이 되었다.

    “그리고 굳은살 좀 박여 있는 게 어디가 어때서.”

    나는 씩 웃으며 그의 손을 툭툭 쳤다.

    “능력의 상징이지.”

    “맞아.”

    시온이 거울을 툭툭 치며 끼어들었다.

    “내 얼굴도 능력의 상징이고. 나는 타고난 거니까 능력보다는 재능이라고 표현해야 하나?”

    정말 말 같지도 않은 소리였지만 그래도 분위기가 환기됐다. 내가 다시 피난처 아닌 피난처를 둘러보고 있는데 시온이 말투를 바꾸어 진지한 어조로 말했다.

    “그래서 엘로이즈, 공작성에서 네가 원하던 건 찾았어? 난 그게 제일 궁금한데.”

    “아니.”

    나는 팔짱을 끼며 심각하게 대답했다.

    “나 혼자 찾을 수 없다는 것만 깨닫고 왔어. 결국 요하네스나 레오의 손을 빌려야 할 것 같아.”

    “어린애는 빼.”

    빈센트가 질렸다는 얼굴로 말했다. 이미 레오가 아주 거슬린다는 표정이었다.

    “어떤 돌발 행동을 할지 몰라. 이렇게 중요한 일의 계획에 포함시키는 건 무리야.”

    “…나도 그렇게 생각하긴 해.”

    레오에게 부탁하는 것은 나 역시 최후의 보루로 생각하고 있었다. 일단 아이를 이용한다는 것이 양심에 찔리기도 했지만, 빈센트 말대로 아이는 어떤 돌발 행동을 할지 몰랐다.

    내가 충분히 친해졌다고 생각해서 부탁을 한다고 하더라도 ‘보물의 방은 안 돼요!’라며 바로 요하네스에게 이를 수도 있는 일이었다. 어쨌든 레오는 노아비크 공작성의 후계자였고 내가 아무리 레오와 가깝다고 하더라도 금지된 일을 해 줄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런 마음의 짐을 지우고 싶지도 않았고.

    어쨌든… 정말 레오는 끼어들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건 그냥 어른으로서 가져야 할 최소한의 도덕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난… 요하네스와 거래를 하려고 해.”

    나는 천천히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고급스러운 문양이 가득한 흰색 총을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아무래도 디에고 황태자가 신전과 손을 잡고 노아비크 공작령을 대상으로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 것 같아. 어쩌면 악령과 관련된 일을.”

    시온과 빈센트가 나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둘 다 너무 스케일이 크지 않느냐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하기야, 지금 아무리 귀족 행세를 하고 있다지만 우리는 어쨌든 모두 평민 출신이었고 황족은 지나치게 먼 사람이었다.

    하지만 요하네스는 ‘시간의 돌’을 민간인에게 주지 않겠다는 신념이 아주 강했다. 그러므로 그 정도 일을 해결해 주지 않으면 가망성이 없었다.

    “그래서… 내가 그 진실을 파헤쳐서 노아비크 공작령을 위험에서 구해 준 뒤에 요하네스에게 그 대가를 요구할까 해. 그 사람은 자기가 받은 것에 대해서는 대가를 꼭 치르는 성격이거든.”

    물론 그게 다는 아니었다. 애초에 나는 내 목숨만 구하려고 회귀를 한 건 아니었다. 요하네스가 회귀 전 바랐던 소망처럼 끝까지 레오를 살려 주고 싶었다. 이제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 되었더라도, 그래도 그 소망을 지켜 주는 건 내 최소한의 양심이었다.

    어쩌다 보니 레오를 위험하게 만드는 세력이 황실인 것 같다는 추론을 하게 되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초심을 잃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물론 이런 말을 시온과 빈센트에게 할 수도 없었지만.

    “엘로이즈, 혹시 미쳤어?”

    역시 내 말이 끝나자 빈센트가 바로 냉소적으로 대답했다.

    “네가 황가와 신전을 대상으로 대체 뭘 할 수 있다고? 분명히 위험할 게 뻔한 일인데 그걸 다른 누구도 아닌 요하네스 노아비크를 위해 해 주겠다고?”

    “하지만 요하네스는 내가 필요한 걸 갖고 있어. 그건 확실해.”

    레오에 대해 말할 수 없었던 나는 곧바로 나 하나만 이유로 대며 받아쳤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푸른 루비’인데 오래 살기 위해 네 보물이 필요하니 내놓으라고 할 수는 없잖아. 그 사람은 아쉬울 게 없고, 나는 어떻게든 그 사람을 거래하는 자리에 앉혀 놔야 해.”

    “엘로이즈, 황가가 개입되었다며. 성사될지 안 될지 모르는 거래에 목숨을 걸겠다고?”

    “딱히 값비싼 대가는 아니지, 내가 걸 수 있는 건 얼마 안 남은 목숨인걸.”

    나는 나름대로 합리적으로 대답했다고 생각했는데 받아들이는 사람 입장은 그게 아닌 듯했다. 빈센트가 바로 신랄하게 대꾸했다.

    “만에 하나 네가 그 모든 일에 성공한다고 쳐. 그런데 요하네스가 미리 요구하지도 않은 일을 해냈다고 해서 그 사람이 네가 원하는 걸 줄까? 왜 그런 효율적이지 못한 일을 해?”

    “줄 거야.”

    그건 의심의 여지가 없다는 듯,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아까도 말했지만 그 사람은 주고받는 계산에 확실한 사람이야. 가까이 보니까 생각 외로 매사에 정정당당하고 신사적이더라고.”

    빈센트가 아연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신사적? 너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물론 그가 그런 반응을 보이는 건 이해했다. 어쨌든 나는 요하네스 때문에 상당히 스트레스를 받았었고, ‘에이스’ 내에서도 요하네스에 관련된 말만 나오면 ‘난 그 인간한테 잘못한 게 없는데 대체 왜!’ 같은 소리도 많이 했었기 때문이다. 비교적 나와 자주 마주했던 빈센트는 그 오랜 역사를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다른 누구도 아니고 요하네스 노아비크야. 잊었어?”

    “…하지만 사실 요하네스가 나쁜 일을 한 건 없잖아.”

    나는 변명하듯 말했다.

    “나 때문에… 나 때문에 ‘에이스’가 급속도로 성장한 건 맞으니까. 그래서 ‘푸른 루비’가 싫을 수도 있지. 어쨌든 선악을 구분한다면 요하네스가 선이고 나는 악….”

    “엘로이즈.”

    빈센트가 그답지 않게 흥분한 눈으로 내게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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