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화 (5/65)
  • “아… 그건…. 라르딘 님께서 노예를 보육원에서 샀기 때문입니다. 뒤탈이 없도록 말입니다. 특별한 능력이 있는 아이들이라면 더 비싸게 샀죠. ‘에이스’의 역사가 길지 않아 생긴 일입니다.”

    “그럼 ‘에이스’의 노예라면… 나이가 다 네 또래라는 말로 생각해도 되나.”

    “아, 아마도요.”

    제프가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요하네스는 다시 한번 확인하듯 말했다.

    “…40대나 50대의 여자가 노예로 부려졌을 가능성은 없다는 거겠지.”

    “그런 가능성은… 없습니다. ‘에이스’에서는 어린애들을 데려와 고립시키는 것을 가장 효율적이라고 생각했으니까요. 보통 그 나이대의 사람들은… 간부급입니다.”

    “그렇군.”

    그가 옅게 미소를 띤 채로 제프에게 나긋나긋하게 말을 걸었다.

    “그래도 ‘푸른 루비’에 대해서 아는 게 있으면 말해 봐. 엿들은 것이라도 있을 것 아냐.”

    “어… 음… 그건 상급자분들만 아시는 정보여서… 극비 사항이라 저희는 잘 알지 못합니다.”

    제프는 요하네스를 흘끗흘끗 바라보며 대답했다. 나름대로 친절한 요하네스의 태도에 조금 안심한 듯도 했다.

    “먼발치에서 본 적도 없어?”

    “저, 저는 부엌데기였습니다. 부엌에만 갇혀 지내던 제가 뭘 알겠습니까. 주, 주방장님이라면 몰라도 저희는 밖에 나가지도 못했습니다.”

    “그래? 그럼 그 주방장은 어딨지?”

    “포, 폭파 사고 때… 돌아가신 걸로 압니다… 아마도요.”

    요하네스는 그대로 얼굴에 띠었던 미소를 싹 지웠다.

    사실 처음에 꽤 다정하게 대해 준 것은 중반부에 분위기를 바꾸어 상대를 더 긴장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이런 전략은 보통 기가 약한 사람을 빠르게 복종시키는 데에 잘 먹혔다.

    “글쎄, 제프.”

    그가 음산한 얼굴으로 표정을 굳히며 천천히 일어났다.

    “내가 그걸 믿을 거 같은가?”

    “네, 네?”

    과연 요하네스가 단번에 분위기를 바꾸자 제프가 화들짝 놀라 잔뜩 몸을 움츠렸다. 자리에서 일어난 요하네스는 마치 거인 같았고 제프는 그 풍채에 지레 겁을 먹어 다리를 덜덜 떨기 시작했다.

    “모종의 폭파 사고로 인해 ‘에이스’의 간부들이 다 죽고 완전히 와해 되었다는 사실은 우리도 잘 알지. 그리고 그 거대한 폭발에서 살아남은 네가… 고작 부엌데기라고?”

    “하, 하지만 그, 그것이 사실….”

    “친애하는 제프, 지나가는 어린애가 있다면 아무나 잡고 물어봐.”

    요하네스는 천천히 제프에게 다가가기 시작했고, 제프는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치다가 뒤에서 버티고 있던 페이건의 몸에 부딪히고 말았다.

    “어둠의 조직이 폭발했는데, 주방장은 죽고 부엌데기가 살아남는 게 말이 되냐고.”

    요하네스가 황금색 눈을 번득이며 비릿하게 웃었다. 제프는 거의 호흡 곤란을 일으킬 것같이 떨면서 무릎을 꿇었다.

    “하, 하지만 저, 정말로 그게 사실입니다! 정말로…. 그냥 갑자기 본원이 폭발했고, 저희 같은 노예들은 그저 이때다 싶어 도망간 것뿐입니다. 무슨… 무슨 테러 같은 것 아닐까요? ‘에이스’는 적이 많으니까….”

    “아하.”

    요하네스는 순식간에 웃음을 지우고 선득하게 눈썹을 치켜올렸다.

    “아랫것들만 다 살아남은 테러라니 참 놀랍군. 보통은 반대인데 말이야.”

    “그, 그게!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이유가 있습니다!”

    요하네스는 잠시 침묵을 지켰다. 그 침묵이 못마땅함의 표현이라고 생각했는지 제프가 빠르게 자신이 말할 수 있는 다른 것들을 모두 쏟아 내기 시작했다.

    “폭발이 크게 있고 나서, 회색 로브를 걸친 남자가 기다렸다는 듯이 나타나 도망가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에게 전해 주라고… 우리 위의 사람들은 다 죽었다고. 그래서 빠르게 도망칠 수 있었습니다. 마치 그 폭발 사고를 예견한 것처럼….”

    제프가 눈을 굴리며 말을 이었다.

    “아마 ‘푸른 루비’가 살아 있다면 그들이 조력자일 겁니다. ‘푸른 루비’도 그 조언을 듣고 살아남았을지도 모르는 일이니까요. 아, 아니면 ‘푸른 루비’가 주동자일 수도 있고….”

    “그 남자의 인상착의는 기억나나.”

    “아뇨… 말씀드렸다시피 회색 모자가 달린 로브를 둘러쓰고 있었습니다. 다만, 안경을 쓰고 있었던 것이 기억납니다.”

    안경은 딱히 드문 물건이 아니었다. 눈이 나쁜 사람들은 꽤 있었고 가격이 비싸지도 않았으니까. 그러나 ‘안경’이라는 말에 요하네스의 뇌리에는 아까 만난 빈센트가 바로 떠올랐다. 또 순식간에 불쾌해졌다.

    “그, 그리고 또….”

    다시 한번 어두워진 요하네스의 얼굴에 제프가 곧바로 더 몸을 움츠리며 말을 쏟아 냈다.

    “아! 그리고 손에 굳은살이 엄청났습니다! 군데군데 화상 자국? 같은 것도 있었고요!”

    “…그래? 화상 자국이면 주방에서 일하는 사람 아닌가?”

    “음, 주방 노예는 확실히 아닙니다. 제가 바로 주방의 노예였으니까요. 서로 소통이 허락되지는 않았어도 누가 누군지는 다 알았습니다.”

    “그럼 가능성 있는 곳이 어딘데.”

    “무기고에서 일하는 남자인 것 같기도 하고…. 하지만 체격이 아주 크지는 않았으니 대장간 일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아니면 소속된 곳과는 아예 상관없는 상처일 수도 있지요.”

    제프는 최선을 다해 말을 쏟아 낸 후 숨을 헉헉거렸다. 한참 동안 정적이 흘렀다. 그의 이마에 식은땀이 가득했다. 부담스러운 시간이 지난 후에야 요하네스의 명령이 떨어졌다.

    “…일단은 가 봐.”

    짧고 간결했지만 제프가 너무나 원하던 말이었다. 요하네스의 냉담한 시선을 받으며 그가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아직 풀어 주는 건 아니다. 시간을 줄 테니 내게 줄 정보가 더 있는지 자세히 생각해 보도록 해. 며칠 후에 다시 한번 만나도록 하지.”

    “예, 예!”

    “억울해하지 마. 수하들이 네 정보에 꽤 괜찮은 값을 쳐줄 테니. 하지만 그게 거짓이라는 것이 밝혀지면 몇 배로 대가를 치러야 할 거다.”

    세예나는 다시 제프를 끌고 방 밖으로 나갔다. 다시 방에는 요하네스와 페이건만 남았다. 요하네스가 페이건에게 차가운 표정으로 지시했다.

    “그때 시온 르노아로에 대해서는 전부 조사했다고 했지? 이번에는 빈센트 엘리어트에 대해서 조사해 와.”

    ⚜ ⚜ ⚜

    나는 빠른 걸음으로 이웃집에 들어갔다. 과연 시온과 빈센트는 입구에서부터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뭐야, 언제부터 기다린 거야? 그냥 편하게 쉬고 있지….”

    “저녁 먹고 온다며. 저녁 시간부터 계속 기다렸어.”

    이제야 좀 자세히 보니 시온의 얼굴은 확실히 좀 그을려 있었다. 남부에서 정말로 활발하게 삶을 즐긴 것이 틀림없었다. 반면 빈센트의 얼굴은 예전과 똑같았는데 그는 시온과는 정반대로 집에만 틀어박혀 있었던 것이 확실했다.

    “왜 이렇게 늦은 건데?”

    시온이 못마땅한 듯 미간을 찌푸렸다.

    “그 집 인간들이 감금하고 안 보내 주던?”

    “무슨 소리야. 노아비크 가문이 ‘에이스’인 줄 알아?”

    나는 헛소리하지 말라는 듯 손을 내저으며 바로 집 안으로 들어갔다. 빈센트도 옆에서 따라오며 곧바로 물었다.

    “원하던 건 얻었어? 네 마법진을 지울 수 있는 거라며.”

    내가 소파에 몸을 던지기가 무섭게 두 남자가 쪼르르 와서 내 앞에 앉아 질문을 쏟아부었다.

    “어차피 요하네스는 북부에 갈 일 없으니 결혼해서 공작성으로 간다고 했잖아. 그런데 얼마 안 되어서 갑자기 요하네스가 북부로 올라가서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 그 인간은 갑자기 북부에 대체 왜 돌아간 거야?”

    나는 기지개를 한 번 켠 후 천천히 대답했다.

    “원하던 건 아직이야. 하지만 대충 실마리가 보여. 그리고 요하네스가 북부에 갑자기 올라온 건… 그 인간 속을 내가 어떻게 알겠어?”

    사실 대충 알 것 같았지만 자세하게 설명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그렇게 복잡한 남의 가정사를 굳이 떠벌리고 싶지도 않았다.

    무엇보다 나는 이 일에 시온과 빈센트를 절대 끼우고 싶지 않았다.

    그들 역시 오랫동안 ‘에이스’에 있던 사람들이므로 내 발목을 잡거나 하는 일은 없겠지만, 오히려 도움이 되면 도움이 되었겠지만, 이것은 전적으로 나의 문제였다. 내게는 이들이 남부를 떠나 수도에 온 것 자체가 희생으로 느껴졌다.

    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화제를 돌려서 바로 쏘아붙였다.

    “그리고 대체 여기에는 왜 온 거야? 사실 둘 다 황태자의 탄신 연회 같은 것에 참가할 이유가 없잖아. ‘에이스’의 생존자들이 분명히 수도 곳곳에 퍼져 있을 텐데 왜 굳이 요하네스 앞에 얼굴을 보여?”

    내가 마음에 안 든다는 듯 묻자 시온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건 걱정 안 해도 돼, 엘로이즈. 그날 살아남은 사람들은 모두 최하급 노예들이고, 그들은 다들 갇혀서 자기 일만 했던 사람들이기 때문에 요하네스에게 줄 수 있는 정보가 없어.”

    “하지만….”

    “게다가 ‘푸른 루비’에 대해서는 나도 잘 몰랐던 극비 사항이야. 빈센트는 네게 무기를 공급했으니까 예외라고 쳐도.”

    빈센트와 시온은 최하급 노예는 아니었다. 따지자면 워낙에 조직을 크게 만든 공로가 커서 중간 간부급에 가까웠고, 간부들과도 꽤 소통을 했다고 들었다.

    노예 중에 그토록 빠르게 중간 간부급까지 올라간 사람은 그들 둘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들 둘이 거사를 계획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마찬가지로 노예들과 별다른 접점이 없었다. 시온은 전혀 걱정할 것이 없다는 듯 씩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그들에게 도망가라고 언질을 줄 때도 얼굴을 들키지 않게 끝까지 조심했어. 다들 알아서 잘 숨어 살 테지만 요하네스에게 잡히더라도 썩 질이 좋은 정보를 제공하지는 못할 거야. 걱정 마. 그리고 우리가 온 건 당연히 네가 보고 싶어서야. 그 참에 도움도 좀 주고.”

    그래도 요하네스 노아비크를 만만히 보지 말라며 계속해서 비난하려던 나는 시온의 마지막 말에 눈을 크게 떴다.

    “도움?”

    “그래.”

    시온은 으스대는 얼굴로 소파에 기대어 있던 내게 손을 내밀었다.

    “궁금하지 않아? 우리가 준비한 것.”

    그리고 시온의 손을 탁, 하고 쳐 낸 사람은 내가 아니라 빈센트였다. 빈센트가 천천히 일어나며 내게 말했다.

    “일어나. 직접 보고 얘기해.”

    “뭘 직접 봐?”

    그러면서도 나는 슬그머니 몸을 일으켰다. 빈센트가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앞장서서 저택 안쪽으로 발걸음을 옮겼고, 나는 시온과 티격태격하며 그의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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