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의 그림자를 그만두었을 (120)화 (120/120)

외전 8화

에녹과 이네스는 느지막이 밖으로 빠져나왔다.

오후 세 시를 조금 넘은 시간.

환한 햇빛이 만물 위로 공평하게 쏟아져 내렸다.

걸음을 옮기던 이네스가 힐끔 에녹을 곁눈질로 올려다보았다.

‘귀여워.’

에녹은 현재 도시락이 담긴 왕골 바구니를 들고 있었다.

바구니 위로는 빨간색 체리 무늬가 콕콕 박힌 천을 덮어 두었다.

거기다 천 위로 삐죽 튀어나온 주스 병까지.

그 모습 자체가 뭔가 굉장히 안 어울리는데, 그 안 어울리는 모습이 묘하게 귀엽게 느껴진다고나 할까…….

“이네스?”

때마침 이네스의 시선을 느꼈는지, 에녹이 흘끗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제 얼굴에 뭐라도 묻었습니까?”

“크흠, 아, 아니에요.”

이네스가 황급히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배를 타고 싶다고 하셨지요? 그렇다면 보트 선착장으로 가야겠군요.”

“네, 그렇게 해요.”

이네스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괜히 에녹 쪽에 시선을 주지는 못했다.

어쩐지 조금 부끄러워서였다.

그러자 에녹이 집요하게 이네스를 부르기 시작했다.

“이네스.”

“네.”

“이네스.”

“아니, 왜 자꾸 부르는 거예요?”

대답은 꼬박꼬박 하면서도 이네스는 여전히 에녹을 돌아보지 않았다.

처음에는 부끄러워서 그런 거였는데, 이제는 괜한 오기가 생기고 만 것이다.

그러자 에녹이 물끄러미 그녀를 내려다보는가 싶더니, 불쑥 입을 열었다.

“그래도 제가 얼굴은 좀 생겨서 다행입니다.”

……갑자기?

이네스가 저도 모르게 뜨악한 얼굴이 되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에녹은 유들유들하게 말을 이을 따름이었다.

“방금 전까지, 제가 잘생겨서 쳐다본 것 아닙니까?”

“…….”

“그리고 지금은 제가 너무 잘생겨서 차마 쳐다보지를 못하는 거고요.”

이네스는 기가 막힌 표정으로 에녹을 돌아보았다.

그러자 에녹이 씩 눈매를 휘어 보인다.

“아, 이제야 절 돌아봐 주시는군요.”

이네스가 와락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자 에녹이 키득키득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도 정말 다행이지 않습니까?”

“뭐가요?”

“적어도 제 외모가, 이네스의 높은 미의식에 얼추 맞을 정도로는 생긴 것 말입니다.”

에녹이 그녀 쪽으로 고개를 숙이며 장난스럽게 눈을 빛냈다.

“그러니까 당신에게 선택받을 수 있었던 것 아니겠습니까?”

흐음.

이네스가 두 눈을 가늘게 뜨며 에녹을 올려다보았다.

처음에는 분명 이런 이미지가 아니었는데.

실제로 겪어 본 에녹은 생각 이상으로 장난꾸러기인 데다가, 뻔뻔한 구석도 있었다…….

“글쎄요, 저를 너무 얄팍한 사람으로 보시는 것 아닌가요?”

“예?”

“에녹은 그냥 에녹이라 좋은 거랍니다.”

새침하게 대꾸한 이네스가 에녹을 앞질러 성큼성큼 걸어갔다.

“에녹이 배 나온 아저씨였어도, 아니, 호호 할아버지였어도 저는 에녹을 선택했을걸요?”

“…….”

내내 이네스를 놀려먹기에 여념이 없었던 에녹은, 처음으로 침묵했다.

‘뭐야, 왜 이렇게 조용하지?’

무심결에 에녹을 돌아본 이네스는, 순간 제 눈을 의심했다

그도 그럴 것이, 에녹은 귀 뒤까지 새빨개져서는 이네스를 바라보고 있었으니까.

그러고는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한다는 말이.

“사람을 그렇게 설레게 하시면 어떡합니까?”

“네에?”

“심장 떨어지는 줄 알았습니다.”

에녹은 그야말로 정색을 했다.

그렇게 말하는 그의 얼굴에는 여전히 붉은 기가 가시지 않았기에.

“뭐예요, 정말.”

이네스는 괜히 툴툴거리면서도 자꾸만 웃음이 나왔다.

❀ ❀ ❀

이네스와 에녹은 느긋한 걸음으로 보트를 빌려 주는 선착장으로 향했다.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던 선착장 관리인이 그들을 맞이했다.

“어서옵쇼!”

“보트를 한 대 빌리고 싶습니다만.”

“예, 한 시간에 10실링입니다. 금액은 선불이고, 추가로 더 배를 이용할 시 나중에 정산하시면 됩니다.”

“그렇다면 일단 세 시간 대여로 하겠습니다.”

에녹과 관리인이 대화를 나누는 것을 흘려들으며, 이네스는 주변을 돌아보았다.

그러던 중.

그녀는 간이 벽에 걸린 그림을 발견했다.

“이 그림은 누가 그린 건가요?”

그러자 내내 무뚝뚝했던 관리인의 얼굴에 활짝 미소가 피어났다.

“그거요? 우리 딸아이가 그린 겁지요. 잘 그렸지요?”

“네, 그러네요.”

이네스가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굳이 관리인의 기분을 상하게 할 필요도 없었거니와, 실제로 재능이 있어 보이기도 했으니까 말이다.

한편 딸아이를 칭찬해 준 게 기분이 좋았는지, 관리인은 물어보지도 않은 사실을 술술 늘어놓았다.

“우리 딸아이가 글쎄, 에반스 학원에 입학하고 싶다고 그럽디다.”

“에반스 학원이요?”

순간 이네스가 귀를 쫑긋 세웠다.

갑자기 자신의 학교 이야기가 나오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따님을 혼자 보내기에는 랭커스터는 너무 멀지 않나요?”

“그래도 기숙사가 있으니까요. 장학금 제도도 잘되어 있다고, 입학금만 내주면 앞으로 손 벌리지 않겠다면서 어찌나 자신만만한지 모릅니다.”

그림을 바라보는 관리인의 시선에는 딸아이를 향한 애정이 가득했다.

“그래도 국내 학교보다는 훨씬 더 학비가 저렴하니 다행이다 싶습니다.”

“저 그림만 봐도, 따님께서 무척 실력이 출중하실 것 같아요.”

“귀부인께서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이것 참…….”

관리인이 코끝을 문지르며 머쓱해했다.

“일단 타죠.”

때마침 에녹이 부드럽게 대화에 끼어들었다.

두 사람은 보트 쪽으로 향했다.

“이네스, 손을.”

에녹이 당연하다는 듯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네스는 그 손을 맞잡고 조심스럽게 보트 위로 몸을 실었다.

나무로 만든 보트가 푸른 물결 위에서 부드럽게 뒤뚱거렸다.

“꺅!”

휘청거리던 이네스가 반사적으로 에녹의 목을 끌어안았다.

그녀를 능숙하게 받아 안은 에녹이 반달처럼 눈매를 휘었다.

“이런, 그렇게 안기고 싶었습니까?”

“……아니거든요?”

어째 점점 더 능글맞아지는 것 같다니까.

이네스는 밉지 않게 눈을 흘기며 보트에 자리 잡고 앉았다.

에녹이 노를 쥐었다.

보트가 부드럽게 호수 위를 가로질렀다.

한참을 노를 저어 호수 가운데로 향하자, 저 멀리 조그만 집들이 호숫가를 따라 올망졸망하게 모여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렇게 풍경을 감상하기를 한참.

“도시락, 언제 먹을 거예요?”

조금 출출했던 이네스가 슬쩍 질문을 던졌다.

그러자 에녹이 부러 서운한 표정으로 이네스에게 되물었다.

“이네스는 저보다도 도시락이 더 좋습니까?”

“어…….”

혹시 기분 나빴나?

하지만 내가 이렇게 허기지는 이유는, 어찌 보면 당신이 어제 날 잠도 재우지 않으며 이리 굴리고 저리 굴려서 그런 건데.

조금 억울하기도 하고, 그래도 조금 눈치가 보이기도 하고.

이네스는 오묘한 표정이 되었다.

피식 웃은 에녹이 턱짓으로 왕골 바구니를 가리켰다.

“농담입니다. 드시죠.”

이네스는 신이 나서 바구니를 열었다.

햄과 치즈를 넣어 만든 샌드위치와 한 입 크기로 손질한 갖가지 과일들, 그리고 주스가 들어 있었다.

어찌나 솜씨가 좋은지, 흡사 파는 것 같다.

‘왕자님이 이렇게 매사에 완벽하면 인간미가 없는데.’

속으로 혀를 차면서 이네스가 에녹을 돌아보았다.

“에녹은 어떤 것을 드실…….”

“뭐든 괜찮으니 먹여 주십시오.”

응?

그 능글맞은 대답에, 이네스가 멍하니 두 눈을 깜빡였다.

“아.”

에녹이 보란 듯이 입을 벌렸다.

이네스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딸기 한 알을 에녹의 입에 넣어 주었다.

그렇게 말끔히 도시락을 비운 후.

빈 도시락통을 정리해 넣으려던 이네스가, 바구니 안에서 무언가를 발견했다.

“이건……?”

스케치북과 연필이었다.

“이네스는 하루라도 그림을 안 그리면 심심해하지 않습니까.”

“그, 그 정도는 아니에요.”

정곡을 찔린 이네스가 다소 멋쩍은 표정을 했다.

에녹이 모르는 척 짓궂게 대꾸했다.

“그렇습니까? 그럼 화구들은 다시 바구니에 넣어 두고…….”

“싫어요.”

혀를 쏙 내밀어 보인 이네스가 냉큼 연필을 쥐었다.

내심 손이 근질거리기는 했나 보다.

연필이 도화지 위를 누비는 소리가 사각사각 울렸다.

에녹은 물끄러미 이네스를 응시했다.

호수 바람에 부드럽게 흩날리는 다갈색 머리카락.

오로지 도화지에 집중하여, 세상 모든 것을 잊은 듯한 진녹색 눈동자.

에녹이 열렬히 사랑해 마지않는 모습이었다.

한참을 그렇게 연필을 놀리던 중.

“어때요, 에녹이랑 닮았죠?”

이네스가 제 스케치를 에녹에게 보여 주었다.

도화지 안에는 노를 쥔 에녹이 자리 잡고 있었다.

에녹은 생경한 기분으로, 환하게 미소 짓는 그림 속의 자신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어째, 이네스가 그린 저는 항상 웃고 있는 것 같네요.”

“그런가요? 저는 보이는 대로 그렸을 뿐인데.”

이네스가 어깨를 으쓱였다.

“마음에 듭니다.”

에녹의 입술 위로 미소가 번졌다.

그림 속 자신과 꼭 닮은, 밝은 미소였다.

❀ ❀ ❀

시간이 흘러 마침내 펠릭스의 입학식이었다.

“신입생들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연단에 선 이네스가 신입생 환영 연설을 했다.

“다소 느려도 좋고, 서툴러도 좋습니다.”

초롱초롱한 눈빛의 아이들 사이로 펠릭스가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펠릭스는 이네스의 지원 아래에 훌륭히 기초 교육을 마치고, 정정당당하게 시험을 거쳐 에반스 학원에 입학했다.

이네스는 뿌듯한 시선으로 펠릭스를 바라보았다.

“각자의 속도로 나아간 끝에, 각자의 성취를 얻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우레와 같은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 박수 소리를 들으며, 이네스는 흡족한 표정을 했다.

행복했다.

-외전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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