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의 그림자를 그만두었을 (119)화 (119/120)

외전 7화

슬프게도 이네스의 예감은 적중했다.

‘아, 정말.’

에녹과 침실에서 보냈던 간밤.

이네스는 자신의 체력이 어느 정도인지, 어디까지 밀어붙여지면 정신을 잃을 수 있는지 몸소 깨달았다.

‘어째서 이런 느낌은 단 한 번도 빗나가지를 않는 걸까?’

이네스는 침대에 구겨지듯 누운 채, 베개에 얼굴을 묻고는 끙끙 앓았다.

“이건 너무하잖아요…….”

어제 장을 보고, 미리 빌려 두었던 별장으로 돌아왔을 때만 해도 괜찮았다.

원목으로 만들어져 따스하게 느껴지는 실내의 정경, 푹신한 소파와 햇빛이 환하게 들이치는 너른 창.

그리고 창 너머로 보이는 호수의 풍경까지.

별장은 이네스의 마음에 쏙 들었다.

이네스는 여독을 풀겠다는 핑계로 마음껏 뒹굴거렸고, 에녹은 그런 그녀를 가만히 두었다.

그 후 저녁 식사를 할 때까지만 해도 꽤 괜찮았었다.

에녹은 낮에 사 왔던 생선을 솜씨 좋게 손질하여, 커다랗게 생선 살만을 발라냈다.

생선 살에 밀가루 반죽을 입힌 후 버터에 지져 내자 고소한 냄새가 기가 막혔다.

그 후, 아삭하게 익힌 아스파라거스와 구운 토마토, 깍둑썰기 한 주키니 호박을 버터에 볶아서 가니쉬로 곁들였고.

아삭아삭한 샐러드, 베이컨과 마늘을 듬뿍 넣은 오일 파스타, 화이트 와인도 함께 내 왔다.

‘세상에, 에녹이 요리를 할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어요…….’

이네스는 감탄하면서도, 내심 이 멋들어진 요리가 맛있을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아무리 그래도 에녹은 왕자님이니까.

설마하니 요리까지 잘할 거라는 생각은 하지 못한 것이다.

적당히 먹을 만하기만 하면 온갖 칭찬을 쏟아 내리라 마음의 준비를 해 둔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어마어마하게 맛있었다!

음식들은 하나같이 훌륭했다.

전문 요리사가 요리했다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이네스는 이것저것 맛있게 먹었고, 에녹은 마치 아버지라도 된 양 그녀가 먹는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음식과 와인의 조합은 아주 훌륭했고, 그래서 곁들인 와인이 조금 과했고.

그 후, 정신을 차려 보니.

‘제발, 제발 그만 좀…….’

침대에서 정신없이 흐느끼고 있었다…….

“괜찮으십니까?”

“…….”

이네스는 침대에 모로 누운 채 원망스럽게 에녹을 노려보았다.

누구는 허리가 끊어질 것만 같은데, 어째서 그 원흉인 저 남자는 저렇게 멀쩡한 얼굴을 하고 있는 거지?

게다가 지금의 에녹은 상당히 기분이 좋아 보였다.

마치 먹이를 잔뜩 집어먹은 맹수라도 된 양.

그리고 이네스는 에녹의 저 흡족한 표정을 보자마자 이상하게 속이 뒤집어졌다.

아마도 간밤 에녹에게 지나치게 시달렸던 탓이리라.

“신사이신 줄 알았는데요.”

이네스가 불퉁하게 쏘아붙였다.

그러자 에녹이 어깨를 으쓱이며 뻔뻔하게 대꾸했다.

“물론 전 신사지요.”

“네에?”

“신사여서 그 정도로 참은 겁니다.”

그게…… 참은 거라고?

이네스는 그저 기가 막혔다.

힘없이 베개에 머리를 기대며, 이네스가 한숨을 섞어 중얼거렸다.

“하아, 씻고 싶다…….”

말라붙은 타액과 체액 때문일까, 온몸의 피부가 빳빳하게 당겨 왔다.

아마…… 간밤의 격렬한…… 그 과정 때문일 테지.

순간 에녹이 두 눈을 반짝 빛내는가 싶더니, 대뜸 이네스에게 물었다.

“씻겨 드릴까요?”

“아뇨.”

이네스는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 혼자 씻을 수 있어요.”

하지만 말뿐이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이네스가, 그대로 비틀거리며 풀썩 주저앉았다.

그도 그럴 것이, 온몸에 힘이 한 톨도 없었으니까.

에녹이 미간을 좁힌 채 쓴웃음을 지었다.

“아무래도 아닌 것 같습니다만.”

“…….”

이네스는 한참을 침묵했다.

그러고는 의심스러운 시선으로 에녹을 바라보았다.

“그, 에녹이 직접 씻겨 주시면 말이에요.”

“예.”

“욕실에서…… 아니죠?”

에녹이 움찔했다.

“아닌 거 맞죠?”

“…….”

“저희, 얌전히 몸만 씻고 나오는 거죠?”

“…….”

이네스는 집요하게 에녹을 노려보았다.

에녹은 결국 고개를 떨어뜨리며 기나긴 한숨을 내쉬었다.

“참도록 노력은 해 보겠습니다.”

“노력만으로는 안 돼요. 약속.”

이네스는 새끼손가락을 내밀며 위협적으로 흔들어 보였다.

에녹은 한참을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그를 내려다보다가, 쓴 약을 삼키는 어린아이 같은 표정으로 제 손가락을 걸었다.

이네스는 냅다 에녹의 목을 끌어안았다.

“그럼 저 욕실까지 좀 데려다주세요. 도저히 못 걷겠어…….”

“…….”

에녹은 번뇌에 가득 찬 눈으로 이네스를 내려다보았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몸으로 이렇게 매달려오는 건 반칙 아닌가.

그러던 중.

이네스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자신이 깔고 앉은 에녹의 아래가 순식간에 단단해졌기 때문이었다.

“안 돼요. 누구 정말로 기절시킬 일 있어요?”

“솔직히 기절까지는 안 할 것 같은데…….”

“해요!”

이네스가 정색을 했다.

“……후우.”

긴 한숨을 내쉰 에녹이 이네스를 번쩍 안아 올렸다.

“일단은 알겠습니다.”

이네스는 에녹의 몸에 기댄 채, 안도인지 포기인지 모를 복잡미묘한 감정을 맛보았다.

앞으로 에녹과의 결혼생활을 이어 가려면, 체력 관리가 필수인 것 같다…….

❀ ❀ ❀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네스는 무사히 욕실 밖으로 빠져나올 수 있었다.

물론 그 전에 몇 번이나 위기가 있기는 했지만.

목이며 어깨며 가슴 등지에 몇 군데 키스 마크가 늘어나기는 했지만!

그래도 일단 욕실에서 엉망진창으로 무너지지 않은 것만으로도 성공적이었다.

“그래서 무엇을 하고 싶으십니까?”

에녹은 그녀의 젖은 머리를 꼼꼼히 말려 준 후, 이네스에게 질문을 던졌다.

이대로 있다가는 다시 한번 침대에 처박힐 위기였기에, 이네스는 황급히 입을 열었다.

“사, 산책이요!”

“산책?”

“네! 모처럼 깨끗하게 씻었잖아요? 햇빛도 쐬고, 좀 걷기라도 하면 좋을 것 같아서요!”

“…….”

에녹은 여전히 시큰둥한 표정이었다.

안 돼, 이대로 침실 안으로 다시 끌려 들어갈 수는 없어!

그러한 마음으로, 이네스는 필사적으로 말을 이었다.

“그, 주변 가게에서 도시락도 사 들고 나가면 좋잖아요? 오면서 봤는데, 도시락 가게가 있더라고요.”

“…….”

“모처럼 호수가 있는 도시로 놀러왔는데, 배도 한 번 타 봐야 하지 않겠어요?”

처음에는 영 불만스러운 얼굴이었던 에녹은, 이네스의 제안이 마음에 들었는지 조금 표정이 풀어졌다.

“그렇다면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순순히 그렇게 대답한 에녹이 곧장 주방으로 들어갔다.

‘뭐야, 뭘 하려고?’

이네스가 종종걸음으로 에녹의 뒤를 따랐다.

“에녹, 뭐 해요?”

“도시락을 챙겨서 배를 타고 싶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탕탕탕-.

도마 위에서 칼이 움직이는 소리가 경쾌하게 울렸다.

능숙하게 당근을 채 썰어 내며 에녹이 대답했다.

“그러려면 도시락부터 만들어야지요.”

“네? 굳이 그럴 필요가 있어요? 사서 먹어도…….”

“아뇨, 이네스.”

고개를 가로저은 에녹이 단호하게 대답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당신이 먹고, 입고, 씻는 모든 것을 제 손으로 직접 하고 싶어요.”

“…….”

이네스는 순간 말문이 막히는 것을 느꼈다.

에녹은 바쁘게 손을 놀리며 양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다만 현실적으로 제가 당신의 의복이나 목욕용품까지 만들 수는 없으니까요.”

“어, 네?”

“그러니 그냥 요리를 직접 하거나, 직접 시중을 들어 드리는 선에서 만족해야겠죠.”

솨아아-.

마지막으로 능숙하게 채소를 씻어 낸 에녹이, 손의 물기를 수건으로 닦아 냈다.

그러고는 그녀가 앉은 식탁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와 유리컵을 내려놓는다.

“일단 이거라도 마시고 있어요.”

“…….”

이네스는 데구루루 눈동자를 굴려 컵을 내려다보았다.

짙은 초록색 액체가 컵 안에 가득 차 있었다.

“……이건 뭔가요?”

“케일과 사과, 양배추를 갈아 만든 주스입니다. 건강에 좋아요.”

이네스는 얼굴을 와락 구김으로써, 자신은 이런 건강음료는 전혀 취향이 아니라는 의사를 표현했다.

그러나 에녹은 완고했다.

“당신은 좀 더 건강을 챙겨야 할 필요성이 있어요.”

“…….”

이네스가 건강 주스를 다 마실 때까지는 전혀 움직이지 않을 기세였다.

결국 포기한 이네스가 건강 주스를 쭉 들이켰다.

‘으.’

이 오묘한 맛은 뭐람.

이네스가 진저리를 치며 컵을 내려놓았다.

동시에 에녹이 그녀의 입가에 묻은 찌꺼기를 엄지로 훔쳐냈다.

“주스 찌꺼기가 묻었네요.”

붉은 혀가 손가락을 핥는 모습이 이상하게 선정적이다.

이네스는 홀린 듯이 에녹을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에녹이 씩 눈웃음을 지었다.

“정말, 이네스.”

“네, 네?”

멍하니 에녹을 응시하던 이네스가 파드득 정신을 차렸다.

에녹이 살짝 고개를 숙여 그녀의 귓가에 입술을 댔다.

나직한 속삭임이 달콤하게 귀에 스며든다.

“제가 이런 날을 얼마나 원했는지 모릅니다.”

쪽.

마지막으로 그녀의 관자놀이에 키스한 에녹이, 다시 요리를 하러 개수대 쪽으로 돌아갔다.

이네스는 얼굴이 확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정말, 내 심장아.

이제 이 정도 애정 표현으로는 그만 날뛸 때도 되지 않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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