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의 그림자를 그만두었을 (118)화 (118/120)
  • 외전 6화

    “흠흠.”

    두 사람의 묘한 분위기에, 주례를 맡은 대신관이 괜히 헛기침을 하며 분위기를 환기했다.

    이네스와 에녹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에녹이 반사적으로 에드워드와 헬레나의 눈치를 살폈다.

    웃음을 참지 못하는 헬레나, 그리고 한심하다는 표정의 에드워드가 보였다.

    그러던 중.

    ‘아차.’

    하필이면 에드워드와 시선이 마주쳤다.

    에드워드는 두 눈을 가늘게 뜨며 대신관 쪽으로 미세하게 턱짓을 해 보였다.

    결혼식에 집중하라는 뜻이었다.

    ‘……이런.’

    에녹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그는 예언가도 아닌데, 결혼식이 끝나자마자 스스로에게 어떤 미래가 닥칠지 알 것만 같았다.

    아마도 친애하는 형님께 잔소리 폭탄을 맞겠지…….

    에녹은 황급히 시선을 돌려 대신관을 바라보았다.

    “오늘 여신 앞에서 새로운 부부가 평생의 연을 맺으려 합니다.”

    대신관은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척 입을 열었다.

    “에녹 피츠로이 폰 랭커스터.”

    에녹이 자세를 바르게 하며 대답했다.

    “예.”

    “그대는 이네스 브라이어튼을 아내로 맞아들여, 애정과 헌신을 바칠 것을 맹세합니까?”

    “맹세합니다.”

    흔들림 없이 차분한 목소리였다.

    이네스는 에녹의 옆얼굴을 곁눈질로 바라보았다.

    ‘나, 정말로 에녹과 결혼하는구나.’

    새삼스럽게 그런 실감이 났다.

    “이네스 브라이어튼.”

    대신관이 이네스를 불렀다.

    “예.”

    이네스가 마른침을 삼키며 대신관을 마주 보았다.

    “그대는 에녹 피츠로이 폰 랭커스터를 남편으로 맞아들여, 애정과 존중을 바칠 것을 맹세합니까?”

    “맹세합니다.”

    이네스는 최대한 또렷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에녹이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진다.

    “그렇다면 예물을 교환하십시오.”

    성장 차림의 시종이 곁으로 다가왔다.

    양손에는 붉은 벨벳에 금술로 마감한 천이 깔린 은쟁반을 들고 있었다.

    무심결에 그 위에 놓인 결혼반지를 바라보던 이네스가, 순간 경악했다.

    ‘잠깐, 저 반지는……?’

    빛을 머금어 화려하게 반짝이는 최상급 페리도트와, 그 주변을 둘러싼 다이아몬드.

    그리고 백금으로 만들어진 링까지.

    ‘저, 저거…… 엘브리시의 약속 아니야?!’

    이네스는 기겁하여 에녹을 바라보았다.

    엘브리시의 약속은 왕가가 소유한 보석 컬렉션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보석이었다.

    그 증거로, 놀란 토끼 눈이 되어 이쪽을 바라보는 하객들이 상당했다.

    아무래도 보석을 알아본 탓일 터.

    ‘심지어 반지로 다시 세공까지 했어?’

    듣기로, 엘브리시의 약속은 처음에는 브로치로 제작되었다고 했다.

    다이아몬드로 감싼 페리도트 주변으로, 물결을 형상화한 섬세한 은제 조각을 덧붙여 두었었다고.

    하지만 지금은 그 은제 조각은 간데없었다.

    매끈한 백금 링이 흡사 이네스를 놀리기라도 하듯 반들거릴 뿐.

    “결국 엘브리시의 약속을 받아낸 거예요?”

    이네스가 다급하게 속삭였다.

    물론 에녹은 못 들은 척, 은쟁반 위의 엘브리시의 약속, 아니, 결혼반지를 집어 들 따름이었다.

    “이네스, 손을.”

    에녹은 흡사 꿀을 바른 양 달콤하게 말했다.

    ‘아하, 아예 대답조차 안 하시겠다?’

    이네스는 기가 찬 얼굴로 에녹에게 왼손을 내밀었다.

    에녹은 부드럽게 그녀의 손을 맞잡고, 약지에 반지를 끼웠다.

    그 후.

    에녹은 이네스의 반지를 낀 약지 위에 입을 맞췄다.

    흡사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존경을 바치듯, 경건한 키스였다.

    이네스는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예전에도 이런 적이 있었지.’

    에녹의 이름으로 개최했던 전시회에 그림을 출품했을 적.

    구름처럼 모여든 관객들의 시선은 아랑곳없이, 에녹은 이네스의 손등에 정중하게 키스했었다.

    그때는 여성 화가로서 입지가 불안했던 이네스를 배려하기 위함이었지만…….

    ‘그의 아내가 되어, 다시 한번 이렇게 키스를 받을 줄은 몰랐어.’

    이네스는 어쩐지 조금 가슴이 간지러워졌다.

    “으.”

    한편 두 사람의 다정한 모습을 보고 있던 에드워드가 질색을 했다.

    “아니, 저렇게까지 눈꼴시게 굴 필요가 있습니까?”

    물론 하나뿐인 동생이 제 짝을 만나 행복하기를 바랐던 건 진심이었다.

    하지만 형제의 닭살 돋는 행각을 보고 있자니, 생리적으로 속이 메슥거리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에드워드 당신도 참.

    헬레나가 입을 가리며 쿡쿡 숨죽여 웃음을 터뜨렸다.

    한편 에드워드가 질색을 하거나 말거나, 결혼식은 착실히 진행되고 있었다.

    이네스는 은쟁반에서 에녹 몫의 반지를 집어 들었다.

    에녹의 반지는 이네스가 직접 골랐다.

    깨알만 한 푸른 사파이어가 중앙에 박힌 심플한 디자인으로, 움직일 때 걸리는 부분 없이 매끄러웠다.

    에녹이 최대한 몸에서 떼어놓지 않기를 바라는 바람을 담아서, 실생활에서도 번거롭지 않은 디자인으로 선택했다.

    “손, 주세요.”

    이네스의 말에, 에녹은 그녀의 손바닥 위로 조심스럽게 제 손을 겹쳤다.

    마침내 이네스가 에녹에게 반지를 끼워 주고.

    “만민을 굽어살피시는 여신의 이름으로, 두 사람이 부부가 되었음을 선포합니다.”

    대신관이 우렁찬 목소리로 선포했다.

    “와아-!”

    “축하드립니다!!”

    하객들이 박수갈채를 보냈다.

    대사원 밖에서 축포가 터지는 소리가 아스라하게 울렸다.

    국왕과 왕비가 새로이 탄생한 두 부부에게로 다가갔다.

    “서식스 공작, 브라이어튼 백작.”

    왕비, 헬레나가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며 생긋 눈웃음을 지었다.

    “행복을 빌어요.”

    동시에 에드워드가 에녹을 노려보며 툴툴거렸다.

    “하다하다 엘브리시의 약속까지 빼앗아가다니. 그거 국보인 건 알지?”

    역시, 엘브리시의 약속이 맞구나…….

    이네스는 터져 나오려는 한숨을 억눌러 삼켰다.

    “그 보석, 공작부인에게 선물하니까 좋냐?”

    에녹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대답했다.

    “예, 좋습니다.”

    “…….”

    에드워드는 한참을 불만스럽게 에녹을 바라보더니, 뚱하니 중얼거렸다.

    “뭐, 이왕 결혼한 거. 행복하게 잘 살아라.”

    “감사합니다.”

    에녹은 다시 한번 활짝 웃었다.

    티끌 하나 없이 환한 미소였다.

    그런 아우가 정말로 행복해 보였기에.

    ‘어휴, 앓느니 죽지.’

    에드워드는 다시 한번 심술을 부리려다 말았다.

    ❀ ❀ ❀

    에녹과 이네스가 잡은 신혼여행지는 엘브리시의 한적한 호반 도시였다.

    두 사람의 결혼이 랭커스터 내에서 워낙에 떠들썩했기에, 사람들의 시선을 최대한 피할 수 있는 곳으로 간 것이다.

    워낙에 두 사람 모두 바빴었기에, 이번 여행의 목적은 온전히 휴식이었다.

    “정말, 엘브리시의 약속을 받은 것도 놀랄 일인데.”

    “…….”

    에녹이 슬그머니 이네스의 눈치를 살폈다.

    미간을 좁히며 에녹을 노려보던 이네스가, 결국 표정을 풀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제가 실제로 엘브리시에 오게 될 줄은 몰랐네요.”

    실제로 도착한 호반 도시는 마치 엽서에 나오는 마을 같았다.

    야트막한 구릉이 굽이굽이 이어지고, 커다란 호수를 중심으로 마을이 형성되어 있었다.

    호수는 하늘의 일부를 떼어 놓은 양 새파랗고 투명하다.

    빨간색, 파란색, 녹색…….

    알록달록하게 색을 칠한 지붕이 흡사 장난감 같다.

    이네스가 에녹을 돌아보았다.

    “그래서 오늘은 뭐 할까요?”

    “음, 일단 장부터 보는 게 어떻겠습니까?”

    장이라고?

    뜻밖의 대답에, 이네스가 허를 찔린 표정을 지었다.

    에녹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녀를 마주 보았다.

    “왜 그렇게 보십니까?”

    “아뇨, 음…….”

    눈동자를 굴리던 이네스가 냉큼 고백했다.

    “사실 저 요리를 못 해요.”

    그러자 에녹이 기가 찬 얼굴로 헛웃음을 지었다.

    “설마 제가 신혼여행까지 와서 이네스에게 요리를 시키겠습니까?”

    신혼여행.

    그 단어가 주는 달콤한 울림에, 이네스는 괜히 얼굴이 달아올랐다.

    하지만 자신이 들떠 있다는 것을 들키기는 싫었으므로.

    이네스는 부러 새침하게 되물었다.

    “그럼 장은 왜 보는 거예요?”

    “그야 이네스를 굶길 수는 없으니까요.”

    에녹이 어깨를 으쓱이며 이네스를 내려다보았다.

    “걱정 마세요, 제가 요리할 겁니다.”

    “……에녹이 요리를 한다고요?”

    “예.”

    이네스는 조금 얼떨떨해졌다.

    랭커스터의 유일한 공작이자, 국왕의 하나뿐인 남동생인 왕자님께서…… 요리를?

    ❀ ❀ ❀

    시장 구경은 생각 이상으로 재밌었다.

    그들이 가장 먼저 들른 곳은, 호수에서 갓 잡아 올린 민물생선과 민물조개를 주로 파는 수산물 시장이었다.

    “이것보다는 저쪽 생선이 좋겠군요.”

    에녹은 크기와 신선도를 꼼꼼하게 따져서 생선들을 구매했다.

    다만, 솔직히 이네스는 아무리 살펴봐도 생선들이 뭐가 다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생선은 무슨 기준으로 고르신 거예요?”라고 슬쩍 물어보았을 뿐인데.

    “비늘에서 푸른빛이 돌고, 눈이 깨끗한 쪽이 신선합니다.”

    “그, 그런가요?”

    “예. 또한 오래된 생선일수록 생선 살에서 탄력이 사라지죠. 그리고…….”

    그 후로도 에녹의 ‘좋은 생선을 고르는 방법론’은 끝없이 이어졌다.

    평민들이 가는 식당에는 한 번도 안 가 봤으면서, 생선의 신선도를 보는 눈은 저렇게 출중하다니.

    이건 좀 이상하지 않아?

    이네스는 알쏭달쏭한 기분으로 에녹을 졸졸 따라다녔다.

    그 후로도 에녹은 계속해서 음식들을 사들였다.

    고기, 우유, 달걀, 버터, 향신료, 갖가지 채소들, 과일까지.

    보다 못한 이네스가 슬쩍 물어보았다.

    “너무 많이 사는 것 아니에요?”

    에녹은 씩 웃기만 할 뿐 대답은 해 주지 않았다.

    ‘이 반응, 도대체 뭐지?’

    이네스는 어쩐지 등골이 오싹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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