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5화
펠릭스는 조심스럽게 마차 시트에 몸을 기댔다.
어찌나 푹신한지 흡사 구름 위에 앉아 있는 것만 같다.
이네스가 질문을 던졌다.
“그래서, 하고 싶은 일은 생각해 뒀니?”
“저, 저는 역시.”
펠릭스는 괜히 손가락만 꼼지락거렸다.
정말로 이 말을 해도 될까?
이미 물심양면으로 날 도와주신 분인데.
여기서 더 욕심을 내도 되는 걸까?
‘하지만.’
펠릭스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림을 배우고 싶어요.”
아이의 눈동자가 결연하게 빛났다.
“제가 이번에 잘못한 건 알아요, 하지만…….”
그래, 저럴 수밖에 없지.
이네스는 우물쭈물 말을 잇는 펠릭스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사실 이네스는 펠릭스의 대답을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
처음 연필을 잡고, 연필이 도화지를 스칠 때의 사각거리는 감촉에 익숙해지면.
사물이, 풍경이, 인물이, 그 모든 것들이 내 손끝에서 펼쳐질 때의 즐거움을 알게 되면.
……도무지 그림에서 벗어날 수 없어진다.
온 신경이 그쪽으로만 쏠리는 것이다.
“좋아. 네가 원한다면 그렇게 하도록 해.”
이네스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흔쾌한 대답에, 펠릭스의 얼굴이 초여름의 하늘처럼 맑게 개었다.
“교도관이 그러기를, 펠릭스 네가 글공부를 꽤 열심히 했다고 하던데?”
“네, 이제 읽고 쓸 줄은 알아요.”
“다행이네. 선생님은 이미 물색해 뒀으니 걱정하지 말고.”
이네스가 짓궂게 말을 덧붙였다.
“대신 내년에 입학하려면, 앞으로도 공부를 열심히 해 둬야 할 거야.”
“네, 알겠습니다.”
“모자란 부분들을 뒤늦게 채우려면 꽤 힘들 텐데, 괜찮겠어?”
“그럼요!”
펠릭스는 기쁜 얼굴로 커다랗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던 중.
‘어라?’
어쩐지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슬쩍 고개를 돌린 펠릭스는. 물끄러미 자신을 바라보는 에녹과 눈이 마주쳤다.
그림처럼 아름다운 신사는 묘하게 불만스러운 표정이었다.
‘……내 얼굴에 뭐가 묻기라도 했나?’
펠릭스가 괜히 옷소매로 제 뺨을 문질렀다.
“쯧.”
그러자 에녹이 혀를 차며 시선을 돌렸다.
불쑥 입을 연다.
“무언가 어려운 문제가 생기기라도 한다면, 당장 내게 연락하도록.”
“가, 감사합니다, 서식스 공작 각하.”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표정만 보면 무언가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이 있는 듯한데.
의외로 펠릭스를 챙겨 주겠다는 제안을 하는 것이다.
에녹이 재차 신신당부를 했다.
“브라이어튼 백작은 이런저런 일로 바쁘니까, 웬만하면 내게 먼저 연락하도록 해. 알아들었나?”
“예? 예에…….”
펠릭스는 어리둥절하게 대답했다.
그제야 에녹은 조금 만족한 표정이 되었다.
❀ ❀ ❀
서식스 공작과 브라이어튼 백작의 결혼.
왕국에서도 손꼽히는 명가들의 결합인 만큼, 호사가들의 입술은 멈출 줄을 몰랐다.
“두 분의 결혼을 위해 아이네르 대사원을 개방했다죠?”
아이네르 대사원.
대대로 국왕과 왕비, 그리고 왕세자와 왕세자비의 국혼이 치러진 대사원이었다.
대사원에서의 결혼을 허락한 것 자체가, 국왕 부부가 두 사람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는지를 증명했다.
“확실히 왕실에서 두 분을 무척 신경 쓰시기는 하는 거 같아요.”
“사실 서식스 공작께서는 초혼이시고, 브라이어튼 백작은 재혼이시잖아요.”
“뒤에서 그 문제를 걸고넘어지면서 쑥덕거리는 사람들이 꽤 있었던 것으로 아는데…….”
“뭐, 지금은 그런 말들은 쏙 들어갔잖아요?”
하기야 국왕과 왕비가 두 사람의 관계를 인정한다는데, 누가 무어라 할 것인가.
호사가들은 계속해서 즐거운 대화 삼매경에 빠져들었다.
“그건 그렇고, 브라이어튼 백작께서는 결혼 후에도 백작위를 그대로 유지한다면서요?”
“세상에, 정말 대단하긴 하네요.”
곳곳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그렇다면 두 분의 후계는 잘하면 브라이어튼 백작위와 서식스 공작위를 상속받을 수도 있다는 거 아니에요?”
“그러게요, 정말 대단하네요.”
또한 예술계에서도 두 사람을 향한 축하 인사가 쏟아졌다.
교류전에 참석했던 예술가들은 물론이고, 이네스의 개인전에 참석했던 칼도로프의 귀족들까지도 결혼을 축하한다며 말을 전해 왔다.
애틀리 후작 부부는 비록 거리가 멀어서 직접 결혼식에 참석하지는 못했지만, 그 대신 선물과 직접 쓴 축하카드를 보냈다.
안드레아의 동글동글한 글씨가 빼곡하게 쓰여 있는 편지도 함께였다.
그리하여 현재.
모두의 관심을 받는 세기의 신부는 지금…….
‘어쩌지, 긴장이 돼서 토할 것 같아.’
신부 대기실에 앉은 이네스가 커다랗게 심호흡을 했다.
그러자 메리가 득달같이 곁으로 다가와 잔소리를 퍼붓는다.
“가주님, 그렇게 입술을 자꾸 깨무시면 입술화장이 번진다고 말씀드렸었잖아요.”
“아, 응.”
이네스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버릇처럼 잘근거리던 입술에서 힘을 풀자, 메리가 다시 입술 화장을 고쳐 주었다.
다만 바쁘게 움직이는 손과는 달리, 메리는 어쩐지 조금 복잡한 표정이었는데.
“왜 그래?”
이네스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자 메리가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우리 가주님께서 이렇게 또 한 번 결혼식을 올리실 줄은 몰랐네요.”
“음, 나도 몰랐어.”
이네스가 다소 멋쩍게 대답했다.
“그…….”
메리가 입술을 달싹였다.
무언가를 말하려던 그때.
똑똑.
짧은 노크 소리가 울렸다.
“브라이어튼 백작님.”
아이네르 대사원에 상주하는 신관이었다.
이네스가 목소리를 높여 대답했다.
“네, 들어오세요.”
정복을 차려입은 신관이 안으로 들어섰다.
이네스에게 가볍게 예를 갖추고는 정중하게 입을 연다.
“이제 대사원에 들어가실 시간입니다. ”
“아, 네.”
이네스가 황급히 몸을 일으켰다.
메리가 이네스가 움직이기 편하도록 드레스 자락을 정돈해 주었다.
그리고.
“가주님.”
“응?”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막 밖으로 빠져나가려던 이네스가 메리를 돌아보았다.
메리가 젖은 눈동자로 이네스를 응시했다.
“그, 결혼을 축하한다는 인사를 못 드린 것 같아서요.”
“……메리?”
“부디 가주님께서 행복하셨으면…….”
“…….”
이네스는 잠시 침묵했다.
메리가 자신을 얼마나 아끼고 소중하게 생각하는지, 이네스 자신도 모르지 않았다.
그래서일까.
어쩐지 가슴이 뻐근해져 온다.
회귀 전, 그리고 회귀 후.
언제나 그녀의 곁을 지켜 주었던 충성스러운 시녀.
친구이자 부모가 되어 주었던 사람.
잠시 후.
“고마워, 메리.”
이네스는 일부러 더 환하게 미소 지었다.
“나는 지금도 충분히 행복해.”
그제야 메리는 조금 안도한 얼굴이 되었다.
“그러시다면 다행이고요.”
그러고는 손을 뻗어, 이네스의 머리에 쓴 베일에 주름이 가지 않도록 탁탁 털어내 준다.
“하기야, 공작 각하와 함께 계실 때면 매번 웃고만 계시니…….”
“메리, 정말!”
그 짓궂은 말에, 이네스가 밉지 않게 메리를 향해 눈을 흘겼다.
메리가 그녀를 다독였다.
“얼른 가세요. 다들 기다리시겠어요.”
마지막으로 메리의 어깨를 두드려 준 후.
이네스는 몸을 돌렸다.
“다녀올게.”
이네스는 신관의 안내를 받아 신부 대기실 밖으로 빠져나갔다.
달칵.
방문이 닫혔다.
동시에 메리의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
“세상에, 이게 웬 주책인지…….”
메리가 손수건으로 눈가를 콕콕 닦아내며 중얼거렸다.
그래도, 라이언과 함께 있을 때면 언제나 어두운 표정이었던 이네스는.
지금은 티끌 하나 없이 밝게 웃고 있지 않은가.
그러니까.
‘앞으로는 괜찮을 거야.’
막연하지만 그런 확신이 들었다.
그렇게 메리는 한참을 울며 웃었다.
오랫동안 품에서 곱게 키웠던 딸아이를 시집보내는 듯한, 그런 기분이었다.
❀ ❀ ❀
결혼식이 치러지는 아이네르 대사원은 그야말로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었다.
반짝반짝하게 닦인 은촛대 위로 주홍색 불빛이 나비처럼 일렁거린다.
화려한 생화와 비단 리본 장식이 눈이 부셨다.
스테인드글라스를 통과한 햇빛이 오색의 빛깔로 쏟아져 내린다.
제단 뒤편으로는 브라이어튼 백작가와 서식스 공작가의 문장 깃발이 가로로 교차되어 걸려 있었다.
그 앞에 선 에녹은, 자신의 평소 얼굴이 무표정하다는 데에 감사했다.
그렇지 않았으면 이네스를 보자마자 넋을 놓았을 테니까.
“…….”
온몸을 매끄럽게 감싸고 떨어져 내리는 진주 빛깔 웨딩드레스.
머리에는 다이아몬드로 만든 핀을 꽂아서, 안개처럼 물결치는 레이스 베일을 고정시켰다.
에녹이 사랑해 마지않는 진녹색 눈동자가 영민하게 반짝인다.
‘하늘에서 막 강림한 천사 같군.’
너무 상투적인 표현이지만, 에녹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이네스는 꽃으로 장식된 통로를 사뿐사뿐 가로질렀다.
레이스 장갑으로 감싸인 가느다란 손끝을 부드럽게 맞잡으며, 에녹이 나지막하게 그녀를 불렀다.
“이네스.”
이네스가 살며시 에녹을 올려다보았다.
에녹이 재차 소곤거렸다.
“아무래도 저는 무척 운이 좋은 사람 같습니다.”
갑자기?
이네스의 두 눈이 동그래졌다.
언제나 여유로웠던 것과는 다르게, 지금의 에녹의 목소리는 감격으로 희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당신이 내 아내가 된다는 게 꿈만 같아요.”
순간 이네스의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