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의 그림자를 그만두었을 (116)화 (116/120)
  • 외전 4화

    순간 에녹이 멈칫했다.

    이네스가 에녹과 시선을 맞추며 배시시 미소 지었다.

    “요새…… 단둘이 있는 시간이 무척 적었잖아요.”

    술기운이 뒤섞인 나직하고 달콤한 목소리.

    따끈한 숨.

    촉촉하게 젖은 붉은 입술.

    그 모든 것이 숨이 막히도록 유혹적이어서…….

    “그러니까, 오늘은.”

    가느다란 팔이 에녹의 목을 휘감았다.

    그녀가 훅 몸을 붙여 오며 나긋하게 속삭였다.

    “당신에게 개인적으로 축하받고 싶은데…….”

    “…….”

    “안 될까요?”

    에녹을 끌어안은 양팔에 지그시 힘이 들어갔다.

    에녹은 입술을 달싹거리다가, 미간을 구기고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저는 그냥 가려고 했습니다.”

    “알아요.”

    “저를 붙든 건 이네스…….”

    “안다니까요?”

    이네스가 웃으며 소곤거렸다.

    푸른 눈동자가 고뇌에 차 잘게 흔들렸다.

    그런 에녹을 바라보며, 이네스는 그의 고민을 조금 덜어 주기로 결심했다.

    ‘……!’

    말랑하고 따스한 입술이 에녹의 입술을 덮쳤다.

    사실 엄밀히 따지자면, 키스라기보다는 입술을 짓누르는 것에 가까웠다.

    아무래도 술기운 때문에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여 그런 것 같지만,

    “…….”

    에녹의 이성을 깔끔하게 날려 버리기에는 충분했다.

    “앗!”

    에녹은 손을 뻗어 이네스를 번쩍 안아 들고는, 그대로 마차에서 내렸다.

    화들짝 놀란 이네스가 그의 몸에 바짝 달라붙었다.

    옷감 너머로 느껴지는 따끈한 체온, 부드러운 살결, 그리고 여체 특유의 우아한 굴곡까지.

    “…….”

    에녹은 어금니를 꽉 깨물며 성마른 걸음걸이로 성큼성큼 정원을 가로질렀다.

    곧장 타운하우스로 들어선다.

    하녀들은 두 사람에게 인사를 올리는 대신 눈치 빠르게 몸을 숨겼다.

    사실 이전에도 몇 번이나 겪었던 일이었기에 대처는 쉬웠다.

    에녹은 익숙하게 타운하우스의 복도를 걸어 들어가, 이네스의 침실을 찾아냈다.

    달칵.

    방문이 닫혔다.

    이네스의 발끝에서 반쯤 벗겨진 구두가 달랑거리다가 바닥으로 툭 떨어져 내렸다.

    툭.

    그 자그만 소리가 이상하게 신경을 건드린다.

    “……에녹?”

    이네스가 조그맣게 에녹을 불렀다.

    에녹은 어슴푸레하게 가라앉은 시선으로, 한참을 이네스를 내려다보았다.

    커다란 손이 꼼꼼하게 틀어 올린 갈색 머리카락을 더듬고.

    머리카락을 고정시켰던 진주 핀을 빼낸다.

    후드득-.

    긴 머리채가 폭포처럼 쏟아져 내렸다.

    에녹은 풍성한 갈색 머리채 안으로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한참을 장난치듯 목덜미를 집요하게 쓸어내린다.

    어쩐지 야릇한 기분에, 이네스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읏…….”

    한참을 이네스의 목덜미를 지분거리던 길고 우아한 손가락이, 발그레한 뺨의 동그란 곡선을 천천히 덧그렸다.

    턱선을 따라 내려가다가, 느긋하게 쇄골을 어루만지자.

    이네스가 반사적으로 어깨를 움찔 움츠렸다.

    에녹이 피식 웃었다.

    “당신이…… 먼저 시작했잖아요.”

    습윤한 목소리가 이네스의 귓가를 어루만졌다.

    “내가 이럴 줄 몰랐던 것도 아니면서.”

    그 말을 끝으로, 에녹은 이네스의 드레스 자락을 끌어내렸다.

    창문 너머로 비치는 새하얀 달빛 아래로 상아색의 어깨가 드러났다.

    에녹의 목울대가 커다랗게 움직였다.

    “에, 녹.”

    이네스가 젖은 목소리로 에녹을 불렀다.

    그를 말끄러미 올려다보는 녹색 눈동자를 보자 이상하게 목이 탔다.

    “예, 이네스.”

    입으로는 순순히 대답하면서도 에녹은 그녀의 눈꺼풀에 입술을 떨어뜨렸다.

    “아…….”

    이네스가 두 눈을 질끈 감는 게 느껴졌다.

    눈꺼풀을 시작으로 이마, 뺨, 코, 입술…….

    온갖 곳에 키스가 비처럼 쏟아졌다.

    그녀의 목덜미를 이를 세워 깨물자, 이네스가 작살에 꿰인 물고기처럼 파드득 어깨를 떨었다.

    “잠깐, 에녹…….”

    “예.”

    대답은 빠짐없이 하면서도, 에녹의 행동은 거침없이 이어졌다.

    에녹은 이네스에게 키스하는 것을 멈추지 않으면서, 한 손으로 목을 조이는 크라바트를 잡아 뜯듯 풀어냈다.

    “너무, 너무 빠르…….”

    “축하해 달라고 했잖아요.”

    뭉그러진 음성이 울렸다.

    여린 살갗에 입술을 맞댄 채로 대답한 탓이다.

    잠시 후, 에녹이 나른한 미소로 이네스를 내려다보았다.

    “이제 와서 물러나려 들면 안 되죠.”

    그 말을 끝으로, 에녹이 그녀의 벗은 어깨를 이로 잘근잘근 깨물어댔다.

    이네스가 숨을 헐떡였다.

    시야가 새하얗게 물들고, 온몸이 데일 듯이 뜨겁게 달아오른다.

    그게 기억의 마지막이었다.

    ❀ ❀ ❀

    다음 날.

    “아으…….”

    이네스가 앓는 소리를 내며 몸을 뒤척였다.

    어젯밤에 몇 번이나 절정에 다다랐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다만 너무나도 짙은 쾌락에, 나중에는 거의 흐느끼다시피 그만하라며 애원했었던 것만 희미하게 뇌리에 남아 있다.

    물론 에녹은 그녀의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던 것 같다.

    그 증거로 온몸이 울긋불긋했다.

    간밤 에녹이 이네스를 이리 굴리고 저리 굴린 탓이다.

    ‘정말…… 처음에는 꽤 신사적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이네스는 제 곁에서 잠든 에녹을 흘끗 곁눈질로 돌아보았다.

    그녀가 실제로 겪어 본 바.

    의외로 에녹은 독점욕도 강하고, 잠자리에도 굉장히 적극적이었다.

    그에게 시달리다 못해 우는 소리를 낼 정도로.

    ‘내가 잘못했네, 내가.’

    이네스는 재차 입안으로 앓는 소리를 흘렸다.

    술기운에 에녹을 도발해서는 안 됐다.

    게다가 오늘은 중요한 외부 일정도 있는데…….

    “……이네스.”

    때마침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울렸다.

    단단한 팔이 가느다란 허리를 휘감자, 이네스가 흠칫 어깨를 굳히며 에녹을 내려다보았다.

    “안 돼요, 벌써 늦었다고요. 일어나야만 해요.”

    이네스는 부러 엄중한 목소리를 내어 대답했다.

    “펠릭스를 데리러 가야 해요.”

    “……아, 그렇지.”

    에녹이 부스스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헝클어진 금발, 그리고 졸음이 가득 찬 짙푸른 눈동자.

    이네스는 저도 모르게 꼴깍 마른침을 삼켰다.

    ‘왜 에녹은 저렇게 흐트러진 모습까지 잘생겼을까?’

    저런 흐트러진 모습은 아주 드물게 볼 수 있기에.

    오히려 색다르게 느껴지는 것 같기도 하고…….

    ‘이건 내 잘못 아니야. 에녹이 워낙 잘생겨서 사람을 설레게 만든 탓이지!’

    이네스는 속으로 고개를 저으며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에녹이 득달같이 그녀를 붙들어 침대에 눕혔다.

    “조금만 더 있다 가죠.”

    “……아니, 잠깐만요. 저희 정말로 늦을 것 같은데요.”

    “조금만 더…….”

    쏟아지는 햇빛이 영 거슬렸는지, 에녹은 부러 두 눈을 질끈 감으며 이네스의 품을 파고들었다.

    이 상황, 뭔가 기시감이 드는데?

    예전에도 분명 이랬던 적이 있었던 것 같은데…….

    이네스는 미간을 찌푸렸으나, 그렇다고 제 허리를 휘감아 오는 에녹의 손길을 거절하지는 못했다.

    “그럼…… 아주 조금만 더 누워 있는 거예요.”

    이네스는 못 이기는 척 에녹의 팔을 베고 누웠다.

    그녀를 가만히 내려다보던 에녹이, 이내 배시시 눈매를 접어 내렸다.

    그 모습조차 황홀하도록 잘생겼다.

    ‘정말, 내가 못 살아.’

    이네스는 속으로 투덜거렸다.

    솔직히 말하자면 거절할 마음이 안 났다는 게 맞았다.

    그도 그럴 것이, 눈앞의 에녹은 너무나도 달콤했으니까.

    설탕으로 빚은 사람이 이러할까.

    이네스는 에녹의 벗은 가슴 위로 이마를 기대며, 흐뭇하게 웃었다.

    ❀ ❀ ❀

    펠릭스는 아침부터 식사를 하지 않아도 배가 불렀다.

    ‘드디어.’

    펠릭스가 기대에 찬 눈빛으로 독방 너머를 바라보았다.

    소년교도소에 수감된 지도 벌써 2년.

    마침내 출소일이었다.

    ‘드디어 나갈 수 있어.’

    펠릭스는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사실 소년교도소의 생활은 그렇게 힘들지는 않았다.

    이네스가 세심하게 신경을 써 줬기 때문이었다.

    교도관들은 꽤 친절했고, 원한다면 글이나 가벼운 교양 관련으로 교육도 받을 수 있었다.

    사회로 돌아가기 위한 교육이었다.

    그럼에도 펠릭스는 항상 이곳에서 나가고 싶었다.

    왜냐하면…….

    ‘그림을 그리지 못한 지 너무 오래되었어.’

    아무리 교도관들이 펠릭스를 호의적으로 대해 준다 한들, 교화시설인 소년교도소에서 그림 공부를 할 수 있을 리 없다.

    펠릭스는 그림에 목말라 있었다.

    연필의 흑연이 도화지를 스치며 사각거리는 소리.

    흑연 특유의 매캐한 냄새.

    다시 연필을 쥐는 상상만 하면, 손바닥이 간질거리는 기분이 든다.

    “펠릭스.”

    “예!”

    교도관의 부름에, 펠릭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출소다.”

    그 무뚝뚝한 선언에, 펠릭스의 얼굴이 불이 켜지기라도 한 것처럼 환해졌다.

    ❀ ❀ ❀

    오랜만에 쬐는 햇빛이 눈부셨다.

    소년교도소 밖으로 빠져나온 펠릭스가 슬쩍 고개를 들어 올렸다.

    저 멀리, 신사와 귀부인이 서 있었다.

    에녹과 이네스였다.

    “브라이어튼 백작님!”

    펠릭스가 냉큼 이네스 곁으로 달려왔다.

    이쪽을 돌아본 이네스가, 밝은 미소로 펠릭스를 반겼다.

    “잘 지냈어, 펠릭스?”

    “네!”

    펠릭스가 열렬히 고개를 끄덕였다.

    “대화는 가면서 하고, 일단 마차부터 타자.”

    그렇게 말한 이네스가, 당연하다는 것처럼 펠릭스에게 손을 내밀었다.

    잠시 머뭇거리던 펠릭스는 조심스럽게 그 손을 맞잡았다.

    부드러운 손길이었다.

    아이를 대하는 어른의 손길.

    ……어쩐지 가슴 깊은 곳이 따스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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