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의 그림자를 그만두었을 (115)화 (115/120)
  • 외전 3화

    ‘아, 이런.’

    이네스는 속으로 식은땀을 흘렸다.

    분명 입가에는 화사한 미소를 걸고 있는데도, 에녹의 표정이 어쩐지 싸늘해 보였다.

    “제 프러포즈 반지에 얽힌 비화는, 굳이 백작에게 말해 주실 필요는 없는 것 같습니다만.”

    하지만 헬레나도 만만치 않았다.

    눈썹을 슬쩍 치켜올리는가 싶더니, 뚱한 얼굴로 되물은 것이다.

    “그건 서식스 공작이 아니라 내가 판단하는 거죠.”

    “왕비 전하.”

    “솔직히 말하자면, 서식스 공작이 얼마나 유난인지 브라이어튼 백작도 알아야만 해요.”

    왕비가 혀를 차며 말을 이었다.

    “그래야만 브라이어튼 백작이 조금이라도 공작을 말려 줄 것 아니에요?”

    “제가 무슨 어린애도 아니고, 무슨…….”

    “어린애도 아닌 사람이, 무려 형수이자 왕비인 나를 찾아와 왕가의 보석을 달라고 졸랐나요?”

    뼈를 때리는 질문에, 에녹은 그만 말문이 막혀 버렸다.

    헬레나는 두 눈을 가늘게 뜨며 말을 덧붙였다.

    “그리고 서식스 공작은 오로지 브라이어튼 백작의 말만 듣잖아요. 다른 사람의 말은 귓등으로도 안 들으면서.”

    “…….”

    “그건 성인다운 태도인가요?”

    “…….”

    괜히 헬레나의 입을 막으려다 역으로 공격당한 에녹이, 억울함과 불만이 뒤섞인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한참을 그렇게 에녹을 구박한 후에야 헬레나는 관대하게 화제를 돌려주었다.

    “하여간, 결혼식 준비는 잘되고 있나요?”

    “……왕비 전하를 번거롭게 할 정도는 아닙니다.”

    “하기야, 프러포즈 하나만으로도 이렇게 수선을 피웠는데 당연히 잘해야죠.”

    “…….”

    이네스는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간신히 억눌러 삼켰다.

    마치 누나가 말썽을 부린 남동생을 꾸짖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가?

    ‘가끔 보면, 에녹은 어째 국왕 폐하와 왕비 전하께는 무척 약한 것 같단 말이지.’

    그때 에녹과 이네스의 시선이 마주쳤다.

    “브라이어튼 백작.”

    에녹이 마치 자신을 구원해 달라는 듯, 간절하게 입을 열었다.

    “백작께 춤을 한 곡 청하고 싶습니다.”

    “기꺼이요.”

    다행스럽게도 이네스는 흔쾌히 에녹의 손을 맞잡아 주었다.

    이네스를 에스코트하여 댄스홀로 나아가면서 에녹은 내심 이제는 잔소리 지옥에서 벗어날 수 있을 거라고 기대했으나…….

    “에녹.”

    이네스의 엄격한 부름을 듣는 그 순간.

    에녹은 제 고난이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직감했다.

    ❀ ❀ ❀

    이번 곡은 경쾌한 왈츠였다.

    에녹과 이네스는 댄스홀에 서서 정중하게 예를 갖춘 후, 스텝을 밟기 시작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에녹은 무척 들떠 있었다.

    오로지 에녹만을 물끄러미 올려다보는 영민한 진녹색 눈동자, 그리고 그에게 자연스럽게 기대 오는 가벼운 무게.

    이네스가 에녹의 품에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무척 흡족했다.

    다만 문제는, 그 들뜸이 이네스의 질문 하나로 산산조각 났다는 것이었는데.

    “아까 왕비 전하께서 하신 말씀이 사실인가요?”

    “…….”

    에녹은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

    그러면서도 실수 하나 없이 그녀를 리드하는 그 모습이라니.

    이네스는 헛웃음을 지으며 재차 물었다.

    “정말로 왕가의 보석을 달라고 하셨어요? 제 프러포즈용으로요?”

    “그것이…….”

    에녹은 무척 곤혹스러운 얼굴이었으나, 이네스는 봐주지 않았다.

    그녀가 물끄러미 에녹을 바라보았다.

    한참의 눈싸움 끝에.

    결국 패배한 쪽은 에녹이었다.

    “……그래도 인생에 단 한 번 있는 프러포즈 아닙니까. 당연히 그 정도는 드려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네에?”

    이네스는 그만 스텝을 밟던 것조차 잊고, 목소리를 높였다.

    ‘아, 이런.’

    하마터면 에녹의 발을 밟을 뻔했다.

    이네스는 속으로 혀를 차면서 에녹을 타박했다.

    “아니, 누가 프러포즈에 왕가의 보석까지 받아와요?”

    “…….”

    “게다가 그렇게 유서 깊은 보석을 달라고 하면 어떡하나요.”

    “…….”

    “왕비 전하께서 어찌나 곤란하셨으면 제게까지 말씀을 하셨겠어요?”

    ……뭐, 솔직히 곤란하다기보다는 그냥 에녹을 놀려먹고 싶으셨던 것 같기도 하지만.

    이네스는 헬레나에 대한 떨떠름한 감상을 애써 억눌러 삼켰다.

    ‘어쨌든 이런 일이 다시 생겨서는 안 되잖아?’

    정말로 프러포즈 한 번에 그 유서 깊은 보석들을 받았다가는, 이네스 스스로부터가 놀라서 기절할 것 같으니까 말이다.

    그렇게 이네스의 잔소리는 한참 동안 이어졌다.

    그를 묵묵히 듣던 중.

    에녹이 불쑥 되물었다.

    “그래서, 싫으십니까?”

    “네?”

    에녹은 묘하게 주인에게 꾸중을 들은 강아지 같은 표정이 되어 있었다.

    “왕가의 보석이 싫으시냐는 말씀입니다.”

    “어…….”

    순간 이네스는 말문이 턱 막히는 것을 느꼈다.

    솔직히 싫은 건 절대 아니었다.

    예전에 라이언에게서 ‘사치스럽다’며 가스라이팅을 당하며 산 것도 그렇거니와.

    무엇보다도 에녹이 헬레나에게 그런 무리한 요구를 할 정도로, 자신을 진지하고 소중하게 생각해 주는 게 기뻤다.

    “그, 그래도 그러면 안 돼요.”

    계속 무어라 항변할 것처럼 입술만 달싹이더니, 결국은 조그맣게 중얼거린다.

    순간 에녹의 눈동자에 이채가 돌았다.

    에녹은 이네스를 향해 고개를 숙이고는, 씩 눈매를 휘어 보였다.

    “싫지는 않으신가 보군요.”

    “…….”

    이네스는 그만 말을 잃었다.

    그와 함께 얼굴이 점점 더 붉어지다 못해, 이제는 손을 대면 새빨간 물이 묻어날 정도였다.

    그런 이네스가 참을 수 없이 사랑스러워서.

    “하하.”

    에녹은 그만 소리 내어 웃고 말았다.

    그러자 이네스가 뾰로통하게 입을 열었다.

    “그래도 엘브리시의 약속은 안 돼요.”

    에녹이 웃다 말고 움찔했다.

    이네스는 못을 박듯 말을 덧붙였다.

    “로알의 바다, 필브론의 숨결, 아브게니아의 숲.”

    “저, 이네스…….”

    “다 안 돼요.”

    이네스는 두 눈을 가늘게 뜨며 딱 잘라 냈다.

    에녹은 조금 시무룩해졌다.

    ❀ ❀ ❀

    그 시각.

    국왕 부부, 에드워드와 헬레나는 샴페인을 홀짝이면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글쎄, 귀족원 회의에서 백작이 굉장히 깐깐하다고 말했더니.”

    에드워드는 익숙하게 제 동생의 흉을 보았다.

    “에녹이 뭐라는 줄 알아요?”

    “뭐라고 하던가요?”

    “제 약혼녀가 워낙에 유능해서 말입니다.”

    에드워드는 들으란 듯이 에녹의 말투를 따라하고는, 질색을 하며 얼굴을 찌푸렸다.

    “정말 누가 보면 자기만 약혼녀 있는 줄 알겠습니다. 지겨워서 원…….”

    헬레나는 그런 제 남편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머쓱해진 에드워드가 헬레나에게 되물었다.

    “왜 그렇게 보십니까?”

    “그냥 기쁘시면 기쁘다고 말씀하셔도 된답니다.”

    헬레나의 웃음 섞인 목소리에, 에드워드는 순간 기가 막힌 얼굴이 되었다.

    “……기뻐요? 제가요?”

    “그럼요.”

    하지만 헬레나는 부드럽게 고개를 끄덕일 따름임.

    “지금도 웃고 계시잖아요?”

    “…….”

    에드워드는 순간 허를 찔린 얼굴이 되었다.

    손으로 황급히 입가를 더듬어 보니, 헬레나의 말 그대로였다.

    에드워드는 저도 모르는 새 흐뭇하게 웃고 있었다.

    “……이런.”

    에드워드가 미간을 좁히며 슬쩍 고개를 돌렸다.

    그의 시선 끝에는 에녹과 이네스가 서 있었다.

    반짝이며 부서져 내리는 샹들리에의 빛 아래에서, 이네스와 에녹은 오로지 서로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물론 이네스도 즐거워 보였으나, 가장 즐거워 보이는 사람은 단연 에녹이었다.

    에녹은 무척 행복해 보였다.

    마치 온 세상의 행복을 제 품 안에 그러안기라도 한 것처럼.

    “뭐…… 저 녀석이 저런 표정을 짓는 건 처음 보니까요.”

    결국 에드워드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조금 더 나이를 먹은 형이 져 줘야지요. 안 그렇습니까?”

    “누가 뭐래요.”

    헬레나가 어깨를 으쓱이며 쿡쿡 웃었다.

    두 부부는 그렇게, 흐뭇한 시선으로 춤추는 두 사람을 오래오래 바라보았다.

    ❀ ❀ ❀

    별이 총총하게 떠오르는 늦은 밤.

    이네스와 에녹은 연회장에서 빠져나와, 타운하우스로 향하는 마차에 몸을 실었다.

    “……생각보다 좀 늦었네요.”

    이네스가 잠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평소 이렇게 늦게까지 연회장에 남아 있는 편은 아니었으나.

    오늘은 이네스 본인이 주인공인 파티였기에, 어쩔 수 없이 끝까지 자리를 지켰다.

    특히 여기저기서 권하는 술을 거절하지 못하고 한 잔 두 잔 마셨더니, 머리가 핑핑 도는데…….

    “이네스, 괜찮습니까?”

    에녹이 걱정스럽게 이네스를 내려다보았다.

    “정말 형님도 참, 이렇게 사람에게 술을 먹이면 어쩌자는 건지.”

    ……솔직히 에녹이 나보다 훨씬 더 많이 마셨는데.

    어째서 저 사람은 저렇게 말끔한 얼굴을 하고 있는 거지?

    이네스는 진지하게 궁금했다.

    분명 에드워드와 헬레나가 그녀에게 술을 권할 때마다, 에녹이 족족 빼앗아다 마셨었는데?

    “브라이어튼 타운하우스에 도착했습니다. 오늘은 푹 쉬시고…….”

    에녹이 그녀를 부축해서 일으키려 했다.

    두 사람은 아직 결혼 전이었고, 그래서 아직 동거는 하지 않았다.

    그를 알면서도, 이렇게 헤어져야 한다는 게…….

    ‘아쉬워.’

    그리고 보통 술기운은 사람에게 만용을 부릴 용기를 주고는 한다.

    “에녹.”

    그리하여 이네스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에녹을 불렀다.

    “오늘 꼭…… 돌아가셔야 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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