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의 그림자를 그만두었을 (114)화 (114/120)
  • 외전 2화

    이네스는 잠시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헬레나는 쉬이 대답하지 않는 이네스를 걱정스럽게 바라보았다.

    ‘역시 많이 힘든 걸까.’

    그리고 그때.

    이네스의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음…… 아예 부담스럽지 않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죠.”

    하지만 ‘부담스럽다’라고 말하는 것치고는 꽤나 시원시원한 음색이었다.

    이네스가 헬레나를 마주 보며 방긋 미소 지었다.

    “그래도 왕비 전하께서 말씀하셨듯이, 저는 여성들이 여태껏 가지 못했던 길을 처음으로 가 보는 사람이니까요.”

    “……브라이어튼 백작.”

    “복잡하게 생각하면 할수록, 걸음을 떼어놓기가 더욱 겁이 나더라고요.”

    이네스의 미소가 조금 더 짙어졌다.

    “그러니까 그냥, 최선을 다해서 열심히 해 보려고요.”

    “…….”

    “조금 실패하더라도, 돌아간다고 해도…… 제 행동 하나하나가 앞으로도 의미가 있을 거라고 믿으면서요. 그리고.”

    이네스는 짧게 숨을 몰아쉬었다.

    살짝 시선을 아래로 떨어뜨리며 나직하게 중얼거린다.

    “제가 다소 잘못된 길로 향한다 한들, 서식스 공작 각하께서 계속 제 곁에 계셔 주실 테니까요.”

    “서식스 공작이요?”

    “네.”

    진심이었다.

    이네스가 흔들리고, 멈춰서고, 지쳐 주저앉고 싶을 때마다.

    에녹은 언제나 그녀 곁에 있어 주었다.

    그녀가 다시 기운을 차릴 때까지 기다려 주었고, 그녀를 진심으로 응원했다.

    그러니까…….

    ‘괜찮아.’

    에녹만 이네스의 곁에 있어 준다면 다 괜찮았다.

    다만 그녀의 진솔한 대답은 다소 뜻밖의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순간 헬레나의 눈동자 위로 짙은 장난기가 스친 것이다.

    “이런, 서식스 공작은 참 좋겠네요.”

    “네?”

    “조만간 아내가 될 사람이, 이렇게 진심으로 서식스 공작을 믿어 주고 있잖아요?”

    “…….”

    순간 이네스의 양 뺨이 잘 익은 사과처럼 발그스름하게 달아올랐다.

    뭐, 헬레나의 말 자체가 거짓은 아니었다.

    그들은 2년이 넘는 시간 동안 계속 연애를 이어 나갔고.

    거의 약혼 비슷한 관계로 발전했었다.

    게다가 최근에는…….

    “나, 다 알아요. 서식스 공작에게 프러포즈를 받았다죠?”

    헬레나가 짓궂게 물었다.

    그렇지 않아도 붉어졌던 이네스의 얼굴은, 이제 바늘로 콕 찌르면 터질 정도가 되었다.

    “그, 그걸 왕비 전하께서 어떻게…….”

    “아니, 반지가 있잖아요.”

    헬레나가 턱짓으로 이네스의 약지에 끼워진 다이아몬드 반지를 가리켰다.

    “그렇게 대놓고 반지를 끼고 있는데, 설마 모르리라고 생각한 건 아니죠?”

    “…….”

    그러네.

    나 반지를 끼고 있었네…….

    이네스는 황망한 표정으로 제 손가락을 내려다보았다.

    에녹에게 반지를 받고 나서, 너무 기쁜 나머지 단 한 번도 몸에 떼어 놓고 싶지 않았고.

    그러다 보니 반지를 낀 일상에 지나치게 익숙해지고 만 것이다.

    ‘아니 뭐, 프러포즈를 받았다는 걸 숨기려는 건 아니었지만.’

    이렇게 대놓고 이야기를 듣게 되니 너무나도 부끄럽다!

    이네스는 괜히 얼굴에 손부채질을 하며 시선을 피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러던 중.

    헬레나가 은밀한 목소리로 이네스에게 말을 붙였다.

    “그런데 브라이어튼 백작, 그거 아세요?”

    “…….”

    또 무슨 말씀을 하시려고 저렇게 목소리를 낮추시는 거지?

    이네스는 불경하다는 것조차 잊고,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헬레나를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면, 에드워드 국왕 폐하께서 매번 에녹을 놀려먹으시는 것 같던데.

    아무래도 부부는 닮는다고, 헬레나도 가끔 보면 장난기가 상당했다…….

    “그 프러포즈 반지에 얽힌 비화 말이에요.”

    헬레나가 눈매를 쌕 휘며 입을 열었다.

    이네스가 저도 모르게 귀를 쫑긋 세웠다.

    “프러포즈 반지의…… 비화요?”

    “네.”

    헬레나가 보란 듯이 커다랗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네스는 꼴깍 마른침을 삼키며 제 반지를 내려다보았다.

    샹들리에 불빛을 머금어 화려하게 빛나는 다이아몬드 반지.

    요모조모 뜯어보아도 그냥 예쁘기만 한데…….

    “사실 저는 서식스 공작이 브라이어튼 백작에게 프러포즈할 것을 몇 달 전부터 알고 있었답니다. 왜냐하면…….”

    잠시 말끝을 늘이던 헬레나가, 손으로 뺨을 감싸고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기가 막힌 척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면서 말을 잇는다.

    “서식스 공작이 갑자기 나를 찾아와서는 왕가의 보석을 내놓으라고 하지 뭐예요.”

    “와, 왕가의 보석이요?”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충격적인 비화에, 이네스가 기겁하여 입을 딱 벌렸다.

    그런 이네스를 앞에 둔 채 헬레나는 친애하는 시동생이 갑자기 제게 알현 신청을 했던 날을 떠올렸다.

    ‘서식스 공작이 나를 찾아왔다고?’

    응접실에서 에녹을 맞아들이면서도, 헬레나는 다소 어리둥절했다.

    제 형을 귀찮아해서라도, 별 용건이 없으면 왕궁에는 얼씬도 하지 않는 에녹이었다.

    그런 에녹이 형의 마수에 걸려들 위험까지 감수하면서, 굳이 헬레나에게 알현 신청을 할 이유가…….

    그리고 헬레나를 마주한 에녹은, 대충 안부 인사 한 마디만을 건네고서는 다짜고짜 선언했다.

    ‘반지가 필요합니다.’

    헬레나는 조금 멍해지고 말았다.

    ‘바, 반지요? 그걸 왜 나한테…….’

    하지만 에녹의 폭탄 발언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진지한 얼굴로 재차 질문을 던진 것이다.

    ‘그래서 말씀드리는데, 혹시 엘브리시의 약속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

    그 뜬금없고 무리한 요청에, 헬레나는 그만 말문이 막히는 것을 느꼈다.

    ‘……서식스 공작, 지금 제정신인 것 맞아요?’

    그렇게 입술만을 달싹이기를 한참.

    헬레나는 기가 차서 되물었다.

    엘브리시의 약속.

    랭커스터 왕국에서도 귀중하게 취급하는 왕가의 보물이었다.

    4캐럿의 최상급 페리도트를 가운데에 두고, 질 좋은 다이아몬드로 주변을 촘촘히 둘러쌌다.

    그 값어치만으로도 상상을 초월하지만, 그 보석의 가치는 그저 가격만으로 책정되는 게 아니었다.

    랭커스터와 북쪽으로 잇닿은 소왕국, 엘브리시와의 오랜 분쟁 끝에 두 국가가 서로 평화회담을 하면서 교환한, 역사가 깊은 보석인 것이다.

    ‘엘브리시의 약속’이라는 이름부터가 엘브리시와 랭커스터 왕국과의 평화를 상징한다.

    그런데 뭐?

    근 백 년도 넘는 역사를 지닌 왕가의 보물을, 이렇게 갑자기 내어 달라고?

    ‘아니, 이유라도 들어 보죠.’

    헬레나가 미간을 좁히며 에녹을 노려보았다.

    ‘도대체 서식스 공작에게 엘브리시의 약속이 필요한 이유는 뭐예요?’

    ‘왕가가 소유한 보석들 중에서, 브라이어튼 백작의 눈동자 빛깔과 제일 잘 어울릴 것 같습니다.’

    그 뻔뻔한 대답에 헬레나는 2차로 말문이 막혔다.

    그야 페리도트는 연한 연둣빛이니, 브라이어튼 백작의 눈동자와 잘 어울리기는 하겠지만…….

    한편 헬레나의 이야기를 듣던 이네스의 얼굴에는 이제, 붉은 기라고는 전혀 남아 있지 않았다.

    대신 그 얼굴에는 경악만이 가득했다.

    이네스가 떨리는 동공으로 헬레나를 바라보았다.

    “저, 왕비 전하. 제가 잘못 들은 것 같습니다. 방금 왕비 전하께서…….”

    “저는 엘브리시의 약속이라고 했답니다.”

    “에, 엘브리시의…… 약속이요……?”

    이네스의 얼굴은 어느새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하지만 헬레나의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왕가의 보석은 왕비 전하께서 관리하시지 않습니까.’

    에녹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헬레나에게 되물었다.

    그러고는 왕가가 소유한 갖가지 다른 보석을 늘어놓는데…….

    ‘아니면 ‘로알의 바다’도 괜찮겠습니다. ‘필브론의 숨결’은 어떻습니까? 그도 아니면 ‘아브게니아의 숲’도 그럭저럭 나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만…….’

    로알의 바다.

    필브론의 숨결.

    아브게니아의 숲.

    모조리 녹색 보석이면서, 왕실이 소유한 보석들 중에서도 가장 역사가 깊고 귀한 보석들이었다.

    하나하나가 왕가, 더 나아가 랭커스터의 국보로 지정되기에 모자람이 없는 보석들뿐.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 오는 통에, 헬레나는 그만 이마를 짚었다.

    “내가 서식스 공작을 설득하느라 얼마나 고생했는지 알아요?”

    “저, 왕비 전하. 그것이…….”

    “일단은 프러포즈에 그런 과한 보석을 내밀었다가는, 브라이어튼 백작이 부담스러워할지도 모른다고 달래 두기는 했는데.”

    헬레나는 질린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처음에 말을 꺼낸 건 이네스를 놀리기 위함이었지만.

    어째 말을 하다 보니 점점 더 에녹이 지긋지긋해진 것이다.

    “어찌나 고집이 쇠심줄 같은지, 아무래도 조만간 내게서 저 보석들 중 하나는 강탈해 갈 것 같네요.”

    이네스는 입안이 바짝 마르는 것을 느꼇다.

    “그, 그럼 이 프러포즈 반지는…… 어떻게 구하신 건가요?”

    “아, 그거요?”

    헬레나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것도 왕가의 장인에게 맡겨서 제작한 거예요.”

    참고로 왕가의 장인은 오로지 왕가만을 위한 보석만을 제작한다.

    이네스는 아직 에녹과 결혼하기 전이니, 왕족이 아니었고.

    당연히 왕가의 장인에게 보석을 받을 수 있을 리 없다.

    이네스는 흐린 눈으로, 저를 놀리듯 눈부시게 반짝거리는 다이아몬드 반지를 내려다보았다.

    어쩐지 지나치게 세공 솜씨가 뛰어나더라니…….

    그리고 그때.

    “왕비 전하.”

    누군가가 두 여자의 대화에 난입했다.

    에녹이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