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1화
그렇게 에반스 학원이 개교하고 랭커스터에도 느리지만 착실하게 변화의 바람이 불어왔다.
처음 평민과 여성이 학원에 입학할 때에는,
‘정말로 평민들과 뒤섞여서 교육을 받는단 말이에요?’
‘레이디들이 학교를 다닌다니…….’
‘무슨 일이 있을 줄 알고요. 헛바람이나 들어서는.’
그런 식으로 혀를 차거나, 뒤에서 수군거리는 사람들도 꽤 있었으나.
첫 번째 재학생 전시회를 성공적으로 치러내고, 해외 유수의 예술가들을 계속해서 선생님으로 초빙해 내자, 에반스 학원에 흰눈을 뜨던 사람들도 조금씩 반응이 유해지기 시작했다.
‘뭐, 그래도 교과 과정은 휼륭하다고 하니까요.’
‘장학금 제도도 잘 정비해 두어서, 다른 학교보다 부담이 적기는 해요.’
‘우리 애도 최근 에반스 학원에 가고 싶다고 하던데…….’
그러던 중.
새로운 변화가 일어났다.
부패한 왕립예술협회에 대한 사람들의 끊임없는 항의가 이어졌고.
마침내 국왕 에드워드가 왕립예술협회에 대한 개혁을 단행한 것이었다.
가장 먼저 진행한 건 왕립예술협회에 대한 전수조사였다.
예술적 성취 없이 부당하게 연금을 취득하거나, 왕립예술협회의 이름으로 여러 가지 이득을 얻어 온 회원들은 모조리 정리되었다.
새로이 생긴 공석은, 신분과 성별에 구애받지 않고 예술적 성취가 뛰어난 회원으로 채우기로 결정됐다.
당장에 모든 결원들을 채우려 들기보다는, 회원들을 면밀히 살펴서 합당한 사람들을 골라 넣겠다고.
그리하여 오늘.
근 5년 만에 랭커스터 왕실의 중앙 홀이 개방되었다.
중앙 홀은 무척 상징적인 장소였다.
왕국에서도 손꼽히는 주요 요인의 임명식이 열릴 때에나 개방되는 곳으로, 중앙 홀에서 임명식을 치르는 것 자체가 굉장히 영광스러운 일로 여겨진다.
붉은 주단이 길게 깔린 화려한 홀.
그 끝, 단상 위에 국왕 에드워드가 서 있었다.
그 아래에 정중하게 고개 숙인 여인은…….
“브라이어튼 백작.”
저를 부르는 엄숙한 음성에, 이네스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어 올렸다.
에드워드가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예술의 다양성을 확장시키고, 에반스 학원을 개교함으로써 더 많은 이들에게 교육의 기회를 준 공로를 인정하여.”
시종이 깍듯한 동작으로 에드워드를 향해 상자를 내밀었다.
왕가의 문양이 박힌 고급스러운 상자였다.
붉은 벨벳으로 내부가 마감된 상자 안에서, 금으로 만든 훈장이 샹들리에의 불빛을 머금어 번뜩였다.
에드워드는 훈장을 양손으로 집어 들었다.
“이에 훈장을 수여하며, 제12대 예술협회장으로 임명한다.”
이네스의 목에 훈장을 걸어 주며, 에드워드가 선언했다.
“영광입니다, 폐하.”
이네스는 가슴에 손을 얹고 무릎을 가볍게 굽혀 보였다.
“믿음에 누가 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짝짝짝-.
커다란 박수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중 가장 열렬히 박수를 치고 있는 사람은 바로 에녹이었다.
“…….”
이네스는 다시 한번 국왕에게 예를 갖춘 후, 몸을 돌려 긴 주단을 걸어 나갔다.
새파란 시선이 이네스의 걸음 하나하나를 핥듯이 따라붙는다.
그리고.
‘아.’
순간 이네스가 눈을 깜빡였다.
애정과 믿음이 가득 담긴 푸른 눈동자가 그녀에게 속삭이고 있었다.
‘당신이 자랑스럽습니다.’
……라고.
이네스의 얼굴 위로 천천히 미소가 번졌다.
환한 미소였다.
❀ ❀ ❀
화려한 샹들리에 불빛이 연회장 아래로 눈이 부시도록 쏟아져 내렸다.
달큼한 음악이 흐르고, 신사와 숙녀들은 손에 손을 잡고 댄스홀로 나섰다.
춤을 추는 레이디들의 치맛자락이 활짝 핀 꽃송이처럼 흐드러졌다.
새로운 예술협회장 취임을 축하하는 축하 파티.
“브라이어튼 백작.”
이네스의 파트너로 파티에 참석했던 에녹은 득달같이 달려온 에드워드에게 끌려가고.
샴페인 한 잔을 홀짝이던 이네스가 헬레나를 맞이했다.
“왕비 전하를 뵙습니다.”
정중하게 예를 갖추는 이네스를 향해, 헬레나가 방긋 웃어 보였다.
“그러고 보면 브라이어튼 백작은 유독, ‘처음’이라는 말과 인연이 깊네요.”
“아, 그런가요?”
……그 정도였던가?이네스가 머쓱하게 대답했다.
헬레나가 쿡쿡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럼요. 여성의 몸으로 처음 교류전의 임원이 되었고, 그 후에는 에반스 학원을 세워서 교장 선생님이 되었고…….”
헬레나가 웃음 섞인 목소리로 말을 맺었다.
“이제는 첫 여성 예술협회장으로 취임했잖아요.”
으음.
듣고 보니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이네스는 어색하게 뺨을 긁으며 미소 지었다.
“모두 국왕 폐하와 왕비 전하, 그리고 서식스 공작께서 많이 도와주신 덕이죠.”
그러자 헬레나는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런 말 말아요.”
“왕비 전하?”
“이 모든 성과는 브라이어튼 백작이 노력해서 이루어 낸 거예요.”
헬레나의 목소리에 미세하게 힘이 실렸다.
“스스로의 성취를 굳이 깎아내릴 필요는 없어요. 백작이 스스로의 성취를 깎아내리는 건, 모든 여성들의 가능성을 깎아내리는 것과 마찬가지이니까요.”
“…….”
이네스는 말문이 턱 막히는 것을 느꼈다.
“듣기로는, 브라이어튼 백작이 최근 귀족원 회의에 꼬박꼬박 참석하여 의견을 개진한다고 하던데.”
그러고는 생글 눈웃음을 지어 보인다.
“백작도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어서 그렇게 행동하는 것 아닌가요?”
“그…….”
정곡을 찔린 기분에, 이네스는 저도 모르게 말끝을 흐렸다.
친애하는 형에게 누가 될까 봐, 의도적으로 정치에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던 에녹과는 다르게.
이네스는 귀족원 회의에서 최대한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는 편이었다.
그녀는 여러모로 여성 가주들에 대한 ‘선례’였고.
그를 알고 있었기에, 최대한 가주로서 주체적이고 적극적인 행보를 보이는 편이 이네스 이후의 후대 여성 가주들에게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브라이어튼 백작은 귀족원 회의에서 상당히 엄하다면서요?”
“아, 꼭 그런 것만은 아니…….”
“아니긴요. 어찌나 깐깐하게 구는지, 다른 귀족들이 질색을 한다고요.”
헬레나가 두 눈을 반짝 빛냈다.
“잔소리가 어마어마하다죠?”
“네? 오해세요. 아무리 그래도 그렇게까지는…….”
어째 찔린 얼굴이 되어 허둥지둥 변명하는 모습을 보아하니, 맞는 것 같은데.
헬레나는 에드워드의 재미있어 죽겠다는 목소리를 다시 떠올렸다.
‘요새 귀족원 회의에서 브라이어튼 백작을 구경하는 맛이 쏠쏠합니다.’
‘백작을…… 구경해요?’
‘가끔 예고 없이 귀족원 회의에 들이닥치면, 백작 앞에서 귀족들이 쩔쩔매고 있거든요.’
어리둥절한 헬레나 앞에서 에드워드가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예산안이며 안건 하나하나를 어찌나 꼼꼼하게 따져 보던지, 그 말 많던 귀족들도 입 하나 뻥끗하지 못하더라고요.’
그러고는 씩 눈웃음을 지어 보인다.
‘그 콧대 높은 귀족들의 분한 얼굴을 보는 게, 얼마나 재미있는지 몰라요.’
‘……정말, 폐하께서도 악취미시네요.’
그러면서도 함께 웃어 버렸었는데.
“왕비 전하께서 생각하시는 그런 정도는 아니에요. 그냥 여성 가주는 무척 적으니까, 조금 모범을 보이려고 하는 것뿐…….”
이네스가 민망한 얼굴이 되어 변명을 늘어놓았다.
헬레나는 그런 이네스를 곁눈질로 바라보았다.
저 선량해 보이는 얼굴 어디에 그런 엄격함이 숨어 있는지 모를 일이다.
때마침 두 여자의 주변으로 귀족들 한 무리가 걸어왔다.
“왕비 전하를 뵙습니다.”
헬레나를 향해 정중하게 인사를 올리던 귀족들은, 이네스를 보자마자 질색하는 표정이 되었다.
“……브라이어튼 백작께서도 계셨군요.”
“그, 왕립예술협회 회장으로 취임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이네스는 예의 바르게 마주 인사했으나, 귀족들은 꼬랑지에 불이 붙은 개들처럼 후다닥 사라져 버렸다.
심지어는 이네스와 눈이 마주친 귀족들 몇몇은, 혀를 차며 절레절레 고개를 저을 정도였다.
“어째 제 오해는 아닌 것 같은데요?”
그 멀어지는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헬레나가, 장난스럽게 이네스에게로 되물었다.
이네스는 차마 대답하지 못하고 두 눈만 질끈 감았다.
그런 이네스에게 헬레나가 재차 질문을 던졌다.
“그래서 기분은 어때요?”
“네? 기분이라니…….”
“부담스럽지는 않느냐는 소리예요.”
담담한 목소리였다.
“아무래도 브라이어튼 백작을 유심히 지켜보는 시선들이 많잖아요?”
여성으로서 최초로 교류전의 진행위원이 되었고.
해외에서 개인전을 열었고.
학교를 설립했으며.
교장이자 교육자로서 수많은 아이들을 가르쳤다.
그것만으로도 부담스러울 텐데, 이네스는 왕국 역사상 손에 꼽힐 정도로 드문 여성 가주이기도 하다.
헬레나는 왕비이자 국모로서 의무를 짊어지는 데에 익숙한 사람이었고, 그래서 더더욱 저 지위들의 무게를 알 수밖에 없었다.
‘……아마도 무척 버거울 테지.’
그래서 헬레나는 이네스가 못내 걱정스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