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의 그림자를 그만두었을 (112)화 (112/120)

112화

이네스가 뒤를 돌아보았다.

“아, 에녹. 왔어요?”

깔끔한 정장 차림의 에녹이었다.

성큼성큼 곁으로 다가온 에녹이, 그녀의 뺨을 쓸어내리며 걱정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요새 좀 쉬고는 있는 겁니까? 눈 밑에 그늘이 졌는데요.”

“음…….”

괜히 눈동자를 굴리며 에녹의 시선을 피하던 이네스가, 이내 배시시 미소 지었다.

“그래도 대부분의 일은 깔끔하게 마무리되었으니까요.”

“그렇게까지 몸을 혹사시켰는데, 일이라도 깔끔하게 마무리되지 않으면 그게 더 억울하지요.”

……저렇게 생글생글 웃는 얼굴로 사람의 양심을 푹푹 찌르는 것도 재주다.

하지만 저 부분에서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으므로, 이네스는 얌전히 입술을 다물었다.

사실 에녹이 저렇게 말하는 이유가 있었다.

입학 지원자가 생각 이상으로 많다는 점을 알게 된 이네스는, 밤잠조차 줄이며 학교 설립에 열정적으로 매진한 것이다.

지난번 학교 부지를 구매하는 부분에서 홍역을 치렀으므로, 그녀는 기존의 학교를 인수해서 보수하는 방향을 선택했다.

그리하여 무려 2년 만에 학교를 개교하는 쾌거를 이루어 낸 것이다.

그 와중 펠릭스의 출소도 신경 써야만 했다.

내년에 학교에 입학한다고 쳐도, 아이의 거취를 정하며 입학 전까지 글을 가르치는 등.

이런저런 일거리가 산더미였던 것이다.

‘아마 에녹이 도와주지 않았더라면, 분명 과로로 몇 번은 쓰러졌겠지…….’

이네스는 속으로 반성했다.

다행히도 에녹은 더 이네스를 질책하지는 않았다.

대신 시계를 힐끔 살펴보고는 이네스에게 팔을 내민다.

“일단 나가죠. 오늘은 당신이 주인공인 날인데, 늦어서야 되겠습니까?”

“제가 주인공인 날이라.”

그 팔에 손을 얹으며, 이네스가 방긋 웃었다.

“정말 기대되는걸요.”

그럴 수밖에 없었다.

오늘은 그녀가 2년간의 시간과 노력을 모조리 쏟아부은 에반스 학원의 개교식이었으니까.

❀ ❀ ❀

햇빛이 따사롭게 내리쬐는 오후.

이네스는 긴장된 얼굴로, 개교식을 축하하러 온 귀빈들 앞에 섰다.

“안녕하세요, 이 자리에 서게 되어 정말 영광입니다.”

처음 연설을 시작할 때만 해도, 그녀의 목소리는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비록 교류전이며 개인 전시회를 거치기는 했으나.

이렇게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는 건 아직 익숙하지 않았던 탓이다.

하지만.

‘이네스.’

이네스는 귀빈들 사이에 자리한 에녹을 발견했다.

흔들림 없이 그녀를 응시하는 짙푸른 눈동자는, 그녀를 향한 신뢰로 가득 차 있었다.

그 시선을 마주하자 온몸의 떨림이 조금씩 가라앉았다.

나는 에반스 학원을 설립한 교장이야.

그러니 이들에게 믿음직스러운 모습을 보여야만 해.

……그리고 여태까지 나를 믿고 지지해 준 에녹에게도.

‘부끄러운 모습은 보이고 싶지 않아.’

짧게 심호흡을 한 이네스가 두 눈을 꾹 감았다가 다시 떴다.

그녀는 어느새 침착함을 되찾은 상태였다.

“저는 브라이어튼 백작가라는 명문가 출신입니다. 그 훌륭한 환경이 제게 주어졌기에, 환경이 저를 뒷받침해 주었기에. 저는 제 꿈을 이루기 위해 발 벗고 나설 수 있었지요. 그렇기에 더더욱…….”

이네스는 귀빈들의 시선을 똑바로 마주 보았다.

“제가 얻었던 기회를 다른 사람들에게도 나누어 줄 수 있기를 바라여, 저는 이 자리에 섰습니다.”

비록 화려한 웅변은 아니었다.

다만 그녀가 여태껏 겪었던 일들을 진솔하게 이야기했기에, 호소력이 있었다.

“물론 저는 여러모로 모자란 사람입니다. 부족한 모습을 보일 수도 있습니다. 다만 이것 하나만큼은 약속드리겠습니다. 많이 배우고, 주시는 조언을 겸허하게 귀담아듣겠습니다.”

이네스는 진심을 다해 말을 맺었다.

“학생들이 저희 학원에서 보내는 시간이 행복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노력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이네스는 깊게 허리를 숙였고.

그와 동시에 우레와 같은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

❀ ❀ ❀

학원 입구를 가로지르는 알록달록한 리본을 가위로 자르는 것으로 개교식은 끝났다.

모든 일정을 마친 이네스는, 에녹 곁에 찰싹 달라붙어 이런저런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제 연설, 이상하지는 않았어요? 괜찮았나요?”

“그럼요. 정말 멋졌습니다.”

“……정말요? 제 기분 좋으라고 그렇게 말씀해 주시는 건 아니고요?”

이네스가 두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며 에녹을 바라보았고, 에녹은 담백하게 답했다.

“저는 일 관련으로는 허투루 말씀드리지 않는다는 것, 아시잖습니까?”

“뭐, 그건 그렇지만…… 어쨌든 괜찮아 보였다니 다행이네요.”

이네스가 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이제 저에게 시간을 내주실 차례로군요.”

“아, 네.”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이네스는 조금 의아했다.

‘이네스, 개교식이 끝난 후에 혹시 제게 좀 시간을 내주실 수 있겠습니까?’

며칠 전 에녹이 그렇게 물어 왔던 것이다.

개교식 이후에는 별다른 일정은 없었기에 그러마고 대답하기는 했지만.

‘……갑자기 마차부터 타게 될 줄은 몰랐는데?’

어리둥절해진 이네스가 에녹에게 물었다.

“저, 우리 어디 가는 건가요?”

그러자 에녹이 슬쩍 입술 끝을 올려 미소 지었다.

기대감과 긴장감이 뒤섞인 장난스러운 미소였다.

“당신에게 주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 ❀ ❀

에녹이 이네스를 데리고 간 곳은, 뜻밖에도 서식스 공작가의 타운하우스였다.

“여기는 왜……?”

이네스가 얼떨떨한 얼굴로 에녹을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이미 사용인들에게는 말이 된 모양인지, 그들은 순순히 두 사람을 안으로 안내했다.

그리하여 도착한 곳은.

“아틀리에?”

이네스가 얼떨떨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갖가지 화구들이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고, 햇빛이 잘 들도록 널찍하게 뚫린 창에는 암막 커튼이 달려 있다.

빛이 그림에 영향을 주지 않도록 세심하게 신경을 기울인 것이리라.

가구 하나하나까지 이용자의 동선을 고려하여 움직이기 편하도록 배치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이.

‘내 취향이야.’

색감과, 구조와, 가구의 디자인 등등.

모조리 이네스의 머릿속에서 빠져나온 것만 같다.

그녀가 직접 아틀리에를 꾸며도, 이렇게 그녀의 취향에 꼭 맞춰서 꾸밀 수는 없을 것이다.

에녹이 다소 긴장된 어조로 질문을 던졌다.

“마음에 드십니까?”

“네, 무척요.”

이네스는 일단 성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에 쏙 드는 건 사실이었으니까.

그러면서도 다소 의문이 드는 건.

‘여긴 에녹의 타운하우스인데, 굳이 내 의견을 물을 필요가 있나?’

그런데 그때.

에녹이 부드럽게 웃으며 답했다.

“그렇다면 다행이군요. 앞으로 이 아틀리에는 당신 거니까요.”

“……네?”

도대체 이 대화의 흐름이 어디로 가는 건지, 이네스는 여전히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동시에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아.’

이네스가 멍하니 두 눈을 깜빡였다.

정말 놀랍게도, 눈앞의 에녹은 다소 긴장한 것처럼 보였다.

마치 첫사랑을 앞에 둔 어린 소년처럼.

“그러니까…… 제 말은.”

평소 유려하게 흘러나오던 말은 흔적도 없었다.

“제 타운하우스가, 아니, 이것 참.”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던 에녹이 쓴웃음을 지었다.

“연습을 꽤 많이 했는데…… 당신 앞에 서니까 머리가 새하얘지네요. 그러니 본론만 말하겠습니다.”

본론?

고개를 갸웃거리던 이네스는, 다음 순간 제 귀를 의심했다.

“사랑합니다, 이네스.”

가, 갑자기 사랑 고백을?

하지만 에녹의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굳이 제 타운하우스에 당신을 위한 아틀리에를 꾸민 건…… 제 집이, 더 나아가 이 타운하우스가.”

에녹이 진중한 시선으로 이네스를 응시했다.

“당신이 편히 쉴 수 있는 공간이 되기를 바라서입니다.”

순간 이네스의 눈동자가 커다랗게 흔들렸다.

“여태까지 당신은 남을 위한 아틀리에만을 꾸몄을 뿐, 그 누구도 당신을 위한 아틀리에를 꾸며 주지 않았으니.”

“…….”

“제가 당신에게 그런 장소를 마련해 주고 싶었어요.”

에녹이 온기 서린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아픈 기억을 모두 지워 내고, 행복한 기억만을 새로 쌓아 올릴 수 있는 곳이요.”

“그 말씀은…….”

“지금 당장 서두르겠다는 뜻은 아닙니다. 다만 당신의 아픈 마음이 모두 회복된다면, 그리하여 언젠가 새로운 사람을 곁에 둘 여력이 생긴다면.”

에녹이 부드럽게 이네스의 손을 잡았다.

다이아몬드 반지가 왼손 약지 위에서 영롱하게 빛났다.

그 위로 입술을 떨어뜨리며, 에녹이 나긋하게 말을 맺었다.

“……저는 당신과 평생 함께하고 싶습니다.”

“…….”

너무 놀라기도 하고, 가슴이 벅차올라서.

이네스는 순간 말을 잃었다.

그 침묵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에녹이 황급히 말을 이었다.

“제 뜻을 강요하는 건 아닙니다. 충분히 기다릴 수 있으니…….”

“에녹.”

그리고 그때.

이네스가 단호하게 에녹을 불렀다.

“저, 거절한다고 하지 않았어요.”

춤추듯 반짝이는 녹색 눈동자가 에녹을 똑바로 올려다보았다.

에녹은 순간 멍해졌다.

“그 말씀은……?”

“좋다는 뜻이에요.”

그렇게 운을 떼어 둔 이네스가, 이내 종알종알 말을 이었다.

“하지만 바로 결혼은 안 돼요. 저는 약혼 기간의 달콤함을 즐기고 싶으니까요.”

“물론이죠.”

“저, 앞으로도 계속 바쁠 거예요. 학교 일도 진행해야 하고, 그림도 계속 그리고 싶어요.”

“나쁘지 않네요. 전 능력 있는 아내를 뒷바라지하며 편안하게 살고 싶으니까요.”

에녹이 장난스럽게 대꾸했다.

한참을 에녹을 뚫어져라 바라보던 이네스가, 눈물 고인 눈으로 환하게 웃었다.

“그렇다면 이제…… 제게 키스해 주세요.”

그리고 에녹은 기꺼이 그렇게 했다.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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