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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그림자를 그만두었을 (110)화 (110/120)
  • 110화

    ‘제이슨 남작 영애.’

    샬럿을 마주한 어셔 후작이 비릿하게 웃었다.

    ‘브라이어튼 백작을 이대로 그냥 내버려 둘 생각인가?’

    ‘……무슨 뜻으로 말씀하시는 건가요?’

    ‘백작이 저만 잘났다며 제멋대로 날뛰고 있다는 건, 제이슨 남작 영애가 더 잘 알지 않나.’

    그렇게 되물은 어셔 후작이, 샬럿에게 불쑥 손을 내밀었다.

    ‘어때, 내 손을 잡겠나?’

    두 사람은 처음에는 꽤 괜찮은 파트너인 것처럼 보였다.

    세부적인 목적은 달랐을지언정, 샬럿과 어셔 후작은 둘 다 어떻게든 이네스를 무너뜨리는 것이 목표였으니까.

    어셔 후작은 핸슨 백작을 끌어들여 이네스를 고발할 뇌물 수수죄를 만들어 냈고.

    또한 펠릭스를 이용하여, 뇌물을 주었음을 증빙하는 증여 제작서도 제작했다.

    샬럿은 고발자 역할을 맡았다.

    하지만 처음에는 잘 진행되는 것 같던 고발 사건은, 중간에 라이언이 끼어들면서 뜻밖의 국면을 맞았다.

    라이언은 증여 증명서가 거짓이라는 사실을 눈치채고, 샬럿을 협박했고.

    샬럿은 그에 눈이 뒤집혀 라이언을 살해해 버린 것이다.

    ‘저, 도와주실 거죠?’

    결국 어셔 후작은 제 보신을 위하여, 울며 겨자 먹기로 샬럿을 도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어찌 된 영문인지, 원수지간에 가까웠던 고트 자작가와 브라이어튼 백작가가 협력하여 라이언의 시신을 부검했다.

    그리하여 라이언이 살해당했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치안대가 몰려와 시골에 숨겨 두었던 펠릭스까지 찾아낸 것이다.

    어셔 후작과 샬럿은 일이 잘못되었음을 직감했다.

    ‘제기랄!’

    두 사람은 해외로 도망치려 했으나 이미 늦었다.

    기민하게 움직인 치안대는 어셔 후작과 샬럿은 물론, 이번 일에 연관된 증인들도 모조리 확보했다.

    심지어 샬럿과 어셔 후작은, 도주할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로 계속 감옥에 갇혀 있어야만 했다.

    그리하여 현재, 국왕이 직접 주재하는 재판

    샬럿과 예술협회장, 그리고 핸슨 백작은 약간이라도 죄를 덜기 위해서 미친 듯이 서로를 물어뜯고 있었다.

    “저라고 제이슨 남작 영애가 고트 자작 영식을 죽일 것을 예상했겠습니까?”

    어셔 후작이 와락 언성을 높였다.

    “저도 피해자입니다! 제이슨 남작 영애가 저를 협박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도왔을 뿐이라고요!”

    “피해자라고요?!”

    그 말에 발끈한 샬럿이 어셔 후작을 노려보았다.

    “그렇게 치면, 애초에 어셔 후작님이 이네스가 뇌물을 받았다고 거짓말만 하지 않았어도 되잖아요!”

    샬럿이 후작을 향해 마구 삿대질을 했다.

    “오히려 내가 당신 때문에 인생을 조진 거야, 알아?!”

    “당신? 지금 말 다 했어?!”

    “내가 못 할 말 했어?”

    두 사람은 이제 법정이라는 사실까지 까맣게 잊고, 옥신각신 말다툼을 하기 시작했다.

    그를 보다 못한 국왕, 에드워드가 한심하다는 목소리로 외쳤다.

    “다들 정숙하시오!!”

    “…….”

    “…….”

    어셔 후작과 샬럿은 화들짝 놀라 입을 다물었으나, 서로를 불만스럽게 노려보는 시선만큼은 거둘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 틈을 타, 핸슨 백작이 얼른 입을 열었다.

    “저, 저는 그냥 도박 빚을 갚을 기회를 준다고 해서…… 저희 영지를 판매하는 데에 협조했을 뿐입니다.”

    “핸슨 백작!”

    기겁한 어셔 후작이 두 눈을 부라렸으나, 핸슨 백작은 후작 쪽을 돌아보지조차 않았다.

    그 대신 에드워드를 올려다보며 간절하게 애원했다.

    “국왕 폐하께서도 아실 겁니다. 제가 어셔 후작님께 빚을 지고 있는 것 말입니다.”

    에드워드는 더 말해 보라는 것처럼 턱만 까닥였다.

    그에 용기를 얻은 핸슨 백작이 빠르게 말을 이었다.

    “어셔 후작님께서는 브라이어튼 백작께서 제 영지를 학교 부지로 선택하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학교가 세워지면 그 주변에 인프라가 형성될 거고, 그러면 가격이 오른 영지를 팔아서 빚을 갚으면 된다고요. 저는 그냥 그 제안에 협조한 것뿐입니다.”

    “아니, 저 작자가 뚫린 입이라고 제멋대로 지껄이기는!!”

    어셔 후작은 핸슨 백작의 말을 틀어막기 위해 마구 날뛰었으나, 치안대원들에게 금방 제압당했다.

    “사실 제 입장으로는 거절할 필요조차 없는 좋은 제안 아니겠습니까? 게다가 증여 증명서는 그냥 서명하라고 해서 서명했을 뿐, 그 서명에 남겨져 있는 브라이어튼 백작의 서명이 거짓이라고는 생각조차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핸슨 백작은 눈동자를 굴리며 힐끔 어셔 후작을 돌아보았다.

    “……어셔 후작님께서 정말로 브라이어튼 백작님께 뇌물을 건넸다고 말씀하셨거든요. 후작님도 저에게 빚을 변제받아야 하니 말입니다.”

    “내가 언제!!”

    어셔 후작이 다시 한번 발작을 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핸슨 백작은 에드워드를 향해 비굴하게 웃어 보일 따름이었다.

    “또한 제이슨 남작 영애가 연일 터뜨렸던 폭로 건은, 브라이어튼 백작을 약간 압박하기 위함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압박?”

    “예! 어셔 후작님께서 말씀하시기로는, 브라이어튼 백작이 제 영지를 사 주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않으려 한다고 했습니다. 저야 실제로 뇌물을 건넸다고 믿었으니 저 정도는 해도 될 거라고 생각했어요.”

    구구절절하게 이어진 핸슨 백작의 주장을 요약하자면, ‘그 또한 어셔 백작에게 속은 피해자다’였다.

    핸슨 백작은 마지막으로 자신이 가진 모든 호소력을 쥐어짜 내어 말했다.

    “전 거래 진행에는 일절 관여하지 않았습니다. 실제 거래는 어셔 후작님께서 손수 진행하셨어요. 애초에 저는 어셔 후작님과 채무 관계일 뿐, 그리 친분이 깊지도 않은 제가 뭘 그렇게 잘 알았겠습니까?”

    그런데 그때.

    낭랑한 목소리가 울렸다.

    “저건 거짓말이에요.”

    순식간에 사람들의 이목이 한쪽으로 몰렸다.

    그 시선 끝에 서 있는 사람은 조그마한 소년이었다.

    제게 쏠린 시선들이 부담스러웠는지, 소년은 반사적으로 양어깨를 움츠렸지만.

    그래도 꿋꿋하게 말을 이었다.

    “어셔 후작님과 핸슨 백작님께서 무척 친밀하게 어울리시는 것…… 제가 봤어요.”

    “페, 펠릭스?!”

    저도 모르게 펠릭스의 이름을 부르짖었던 어셔 후작이, 이내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이러면 안 됐다.

    최대한 펠릭스를 모른다고 발뺌했어야 했는데!

    힐끔 곁눈질로 어셔 후작을 바라보던 펠릭스가 이내 허리를 바르게 세웠다.

    “저는 어셔 후작님의 도제이자…….”

    꿀꺽.

    펠릭스의 목울대가 긴장감으로 커다랗게 움직였다.

    그럼에도 펠릭스는 말을 멈추지는 않았다.

    “……브라이어튼 백작님의 서명을 위조한 사람입니다.”

    방청객들의 얼굴에 경악이 서렸다.

    “세상에, 서명 위조라니…….”

    “정말로 브라이어튼 백작이 누명을 쓴 게 사실인가 보네요.”

    사람들이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동시에 혀로 메마른 입술을 적신 펠릭스가, 최대한 또렷한 목소리를 내어 입을 열었다.

    “지금부터 증언을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그 후.

    펠릭스는 담담한 어조로 여태까지 자신이 보고 들었던 모든 것들을 이야기했다.

    어셔 후작과 핸슨 백작은 오랜 시간 친분을 유지했다는 것.

    그 관계는 단순히 채무 관계로 얽힌 것을 넘어서서, 절친한 친구처럼 보였다는 것.

    그러던 어느 날, 어셔 후작이 펠릭스를 불러다 서류에 이네스의 서명을 베껴 넣도록 시켰다는 것.

    비록 글을 배우지 못해 그 서류의 내용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몰랐지만, 적어도 ‘5만 골드’라는 거금이 적혀 있는 건 확실하다는 것.

    그러고는 날이 갈수록 초조해하는 모습을 보이더니, 갑자기 펠릭스를 인적 없는 시골에 감금해 두었다는 것까지…….

    “저건 다 거짓말이야!”

    어셔 후작이 발작적으로 외쳤으나, 그 누구도 후작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펠릭스가 물러나고, 다음 사람이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저 사람은!’

    샬럿과 어셔 후작의 얼굴이 나란히 창백해졌다.

    그는 바로 라이언의 사망 확인서를 떼 주었던 법의관이었으니까.

    “저는 고트 자작 영식의 시신을 처음으로 살펴보았던 법의관입니다.”

    법의관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어셔 후작님께서는 익사라는 소견서를 내 달라고 요청하셨습니다. 제가 살펴본 바로는, 고트 자작 영식의 시신에서는 익사자라면 당연히 발견되어야 할 기도 속의 액체가 없었으나…….”

    법의관이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어셔 후작님께서는 익사로 사망 진단을 내리기 위해 제게 상당량의 금품을 건네셨고, 저는 그 제안을 받아들였습니다.”

    “그게 무슨 개소리야?!”

    “저건 헛소리예요, 우릴 모함하려고 저러는 거라고!!”

    어셔 후작과 샬럿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비명을 내질렀다.

    그러면서도 본능적으로 느껴지는 이 절망감이란.

    ‘모두…… 끝났어.’

    샬럿은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었다.

    저 멀리 탁자 위에 미리 수거해 온 증거품들이 늘어놓아져 있었다.

    그중에서도 다이아몬드 팔찌가 시야에 들어왔다.

    마치 샬럿을 놀리기라도 하듯 눈이 부시도록 반짝거린다.

    그 빛을 차마 마주 보지 못하고, 샬럿은 두 눈을 꽉 감았다.

    캄캄한 시야가 마치 자신의 미래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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