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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그림자를 그만두었을 (109)화 (109/120)
  • 109화

    <이네스 브라이어튼은 핸슨 백작에게 5만 골드를 양도받았음을 확인한다.>

    ……그 영문 모를 문구까지도.

    그리고 그때.

    “펠릭스.”

    어셔 후작이 손짓으로 펠릭스를 불렀다.

    “예, 후작님!”

    펠릭스가 후다닥 어셔 후작 앞으로 달려갔다.

    미간을 찌푸리며 펠릭스를 바라보던 어셔 후작이 저를 따라오라며 손짓을 했다.

    아틀리에 건물 뒤편으로 돌아가자, 커다란 마차가 펠릭스 앞에 놓여 있었다.

    창문 바깥에는 덧문이 닫혀 있어서 흡사 감옥처럼 보였다.

    동시에 어셔 후작이 툭 말을 내뱉었다.

    “너, 잠깐 어디 좀 가 있어야겠다.”

    그 순간 펠릭스는 예감했다.

    소년이 누리던 찰나의 평화는 이제 산산조각 났다는 것.

    그 ‘어디’가 어디지?

    나는 다시 돌아올 수는 있는 건가?

    겁에 질린 펠릭스가 떨리는 목소리로 어셔 후작을 불렀다.

    “어셔 후작님, 하지만…….”

    “어딜 또박또박 말대꾸를 하려 들어?!”

    어셔 후작이 사납게 두 눈을 부라렸다.

    그렇게 펠릭스는 반항조차 하지 못하고 마차 안에 처박혔다.

    “조용히 처박혀 있으면 언젠가 어련히 데리러 갈까. 응?”

    그 살벌한 협박을 끝으로.

    쾅!!

    마차 문이 부서져라 닫혔다.

    “여, 열어 주세요!”

    놀란 펠릭스가 마구 문을 두드렸으나 전혀 소용없었다.

    그렇게 빛조차 새어 들어오지 않는 어두운 마차 안에 실려서, 한참을 달린 끝에.

    펠릭스는 어느 시골 마을의 조그만 집에 감금되었다.

    ❀ ❀ ❀

    그 후.

    펠릭스는 단 한 발자국도 집 밖으로 나갈 수가 없었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모를 험상궂은 장정들이 삼엄하게 주변을 경계하는 한편, 펠릭스를 감시했다.

    하루, 이틀, 사흘, 일주일…….

    한 달이라는 시간이 느릿느릿 굼벵이처럼 흘렀다.

    그동안 펠릭스는 장정들의 서슬 퍼런 시선에 갇혀 꼼짝도 하지 못했다.

    바깥출입은커녕 가벼운 산책조차 할 수 없었다.

    ……독방에 수감된 죄수도 이렇게까지 외부 출입이 금지되지는 않을 텐데.

    “저, 저는 언제쯤 밖으로 나갈 수 있을지…….”

    참다못한 펠릭스가 용기를 내어 그렇게 물어보았으나,

    “…….”

    장정들은 무생물을 바라보는 듯, 그저 무심한 시선으로 펠릭스를 내려다볼 뿐.

    그 어떤 대답도 해 주지 않았다.

    “저어, 그…….”

    무어라 더 말을 붙여보려던 펠릭스가 주춤 뒤로 물러났다.

    마치 벽을 마주 보고 있는 것처럼 답답했다.

    장정은 귀찮다는 양 눈짓으로 방문을 가리켰다.

    “안으로 들어가라.”

    “네에…….”

    양어깨를 축 늘어뜨린 펠릭스가 몸을 돌리려던 그때.

    쾅!

    밖에서 무언가가 부서지는 소리가 성대하게 울렸다.

    ‘뭐, 뭐지?!’

    화들짝 놀란 펠릭스가 두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동시에 장정이 와락 언성을 높였다.

    “뭐 해? 안으로 당장 들어가지 않고!!”

    콰득!

    누군가가 거세게 문에 발길질을 했다.

    문짝이 날아가고, 그 너머로 사람들이 물밀듯이 뛰어 들어왔다.

    모두 제복을 차려입은 치안대원들이었다.

    “치, 치안대원들?!”

    “치안대가 도대체 여기에는 왜!”

    장정들이 온몸을 긴장시키며 치안대원을 노려보았다.

    그와 함께, 치안대원 중 한 명이 느긋한 걸음걸이로 앞으로 나섰다.

    “아이를 불법적으로 감금하고 있다는 신고가 들어와서, 조사차 나왔습니다만.”

    치안대원의 시선이 멍하니 서 있는 펠릭스에게로 가 닿았다.

    “아무래도 거짓 신고는 아닌 것 같군요.”

    그 말을 시작으로, 장정의 커다란 몸이 허공을 가로질렀다.

    “으아악!!”

    쿠당탕!!

    장정은 흡사 구겨진 걸레 같은 몰골로 벽에 처박혔다.

    그 후 난전이 벌어졌다.

    비명과 신음이 울려 퍼지고, 장쾌한 타격음이 주변을 가득 메우는 가운데.

    펠릭스는 구석에 틀어박힌 채 바들바들 떨었다.

    워낙에 치안대와 장정 사이의 싸움이 격렬한 탓에, 그 누구도 펠릭스의 안위를 살펴 줄 수가 없었다.

    펠릭스가 떨리는 시선으로 열린 문을 바라보았다.

    ‘나, 나가야만 해.’

    너무 오랫동안 이 집에 갇혀 있었다.

    지금이 아니면 밖으로 나갈 기회는 영영 오지 않을 것이다.

    그리하여 펠릭스가 젖 먹던 힘까지 쥐어 짜내어, 후들거리는 몸을 일으켜 세우려 할 때.

    “너 이 새끼, 어디로 튀려고 들어?!

    장정 중 한 명이 용케 펠릭스가 움직이는 것을 눈치채고 언성을 높였다.

    펠릭스가 흠칫 그 자리에 굳어졌다.

    “가만히 있지 못해!!”

    채찍 같은 목소리가 귓가를 후려갈긴다.

    펠릭스는 자라처럼 목을 움츠렸다.

    그런데.

    “얘, 이리 와!”

    누군가가 펠릭스를 다급하게 불렀다.

    ‘응?’

    퍼뜩 놀란 펠릭스가 번쩍 고개를 들어 올렸다.

    한 아리따운 여성이 문틈 사이로 불쑥 몸을 들이밀더니, 당연하다는 듯이 이쪽으로 달려온다.

    아무리 치안대원들이 장정들을 막고 있다지만, 그래도 위험할지도 모르는데.

    망설이는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게다가.

    ‘저 사람…… 브라이어튼 백작님 아냐?!’

    어깨 위로 부드럽게 흘러내리는 다갈색 머리카락, 온화하게 빛나는 진녹색 눈동자.

    그리고 사슴처럼 우아한 외양까지.

    신문에서 몇 번이나 봤던 그 모습 그대로이지 않은가.

    귀부인은 냅다 펠릭스의 손을 움켜쥐고 난전 사이를 빠져나갔다.

    “여기 있으면 위험해, 얼른 나가자!”

    “어, 예?”

    펠릭스는 얼떨결에 귀부인에게 손을 잡힌 채 그대로 끌려 나갔다.

    그리고.

    ‘아!’

    가장 먼저 시야에 들어오는 건, 눈이 부시도록 환한 햇살.

    얼마 만에 해 보는 외출인지 모르겠다.

    맑은 공기가 폐부를 가득 메운다.

    그와 함께 귀부인이 휙 펠릭스를 돌아보았다.

    상냥하게 안부를 물어 온다.

    “너, 괜찮니?”

    “어…….”

    주변의 살벌한 소음들과는 전혀 거리가 먼, 그야말로 깃털 이불처럼 포근한 목소리였다.

    오로지 펠릭스의 안위만을 염려하는, 걱정스러운 표정과 시선.

    게다가 마주 잡은 손에서 번져 오는 따스한 온기까지.

    처음이었다.

    오로지 펠릭스를 위해, 위험까지 감수하고 저런 험한 곳까지 들어온 사람은.

    “그, 그게.”

    펠릭스는 반사적으로 죄송하다고 말하려 했다.

    자기 때문에 저 싸움판 한가운데까지 들어오다니, 너무 면목이 없고 미안하다고.

    그러나 귀부인이 다음으로 한 말에, 펠릭스는 그만 말문이 턱 막히고 말았다.

    “많이 무서웠지? 그래도 잘 참았어.”

    펠릭스는 헛숨을 삼켰다.

    여태껏 펠릭스의 주변에는 그를 윽박지르거나, 화를 내는 어른들만이 있었을 뿐.

    저렇게 그를 다독여 주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으므로.

    그런데 그때.

    저택 주변을 포위하고 있던 치안대원들이 기겁을 하며 이쪽으로 다가왔다.

    “브라이어튼 백작님, 싸움이 벌어졌는데 안으로 들어오시면 어떡합니까? 위험하니까 밖에 계시라고 이미 몇 번이나 말씀을 드렸잖습니까!”

    귀부인은 아차 하는가 싶더니, 민망한 얼굴로 대답했다.

    “저렇게 싸움이 벌어지면 아이가 휘말려서 다칠지도 모르잖아요. 치안대원 분들은 외부를 포위하셔야 하니까 아이를 당장 구출할 수가 없고…….”

    말끝을 흐리는가 싶더니, 냉큼 사과를 건넨다.

    “아이를 모른 척할 수가 없었어요. 미안해요.”

    “아니, 뭐 그렇기는 하지만.”

    “거참…….”

    치안대원들이 제각기 짧게 혀를 찼다.

    그리고 펠릭스는.

    “…….”

    목 깊은 곳에서부터 기어 올라오는 울음을 참느라 애를 쓰고 있었다.

    하지만 그 노력이 무색하게도, 펠릭스는 그만 억눌린 울음소리를 흘리고 말았다.

    “……윽.”

    “응?”

    귀부인이 의아한 얼굴로 펠릭스를 내려다보았다.

    진녹색 눈동자가 동그래짐과 동시에, 펠릭스는 기겁하여 목소리를 높였다.

    “죄송해요!”

    “뭐가 죄송해?”

    귀부인은 드레스 자락이 바닥에 끌리는 것조차 아랑곳없이, 자리에 쪼그려 앉아 펠릭스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무서웠잖아. 내가 너와 똑같은 입장이었어도 울었을걸?”

    “그, 그래도.”

    정말로 울어도 되나.

    펠릭스는 눈물이 그렁그렁 고인 눈으로 슬그머니 귀부인의 눈치를 살폈다.

    지금까지 펠릭스가 겪어 보았던 어른들은, 펠릭스가 울 기미만 보여도 귀찮아하는 표정을 노골적으로 드러냈었다.

    사실 귀찮아하는 것 정도는 온화한 반응이었다.

    수틀리면 윽박지르는 것은 물론, 손이 올라가는 것까지 당연했었는데…….

    “그러니까 마음껏 울어도 돼.”

    귀부인은 안쓰러운 표정으로 펠릭스의 등을 다독였다.

    “괜찮아, 앞으로는 무서운 일은 없을 테니까…….”

    제 등을 두드리는 그 손길이 무척 다정해서.

    때마침 치안대원들에게 끌려 나오는 무서운 장정들을 보고 있자니, 새삼스럽게 이제 더 이상 무서워할 필요 없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밀려드는 안도감에, 펠릭스는 그만 큰 소리로 울음을 터뜨렸다.

    ❀ ❀ ❀

    사건의 정확한 전말은 대충 이러했다.

    이네스가 학교를 세우겠다고 발표한 이후.

    왕립 예술협회에서는 이네스가 세우려는 학교에 커다란 위협을 느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네스가 학교를 세우려는 취지는 성별과 신분에 관계없이 교육의 기회를 주기 위함이었으니까.

    ‘지금도 교류전과 해외 개인전 덕에 랭커스터의 명예를 드높였다면서, 브라이어튼 백작의 인기는 하늘을 찌를 정도로 높은데…….’

    ‘만약 브라이어튼 백작이 학교를 세움으로써, 그 학교의 졸업생들을 자신의 사단으로 만들기라도 한다면?’

    게다가 왕립예술협회에 대한 여론은 날로달로 최악으로 치닫는 상태.

    왕립예술협회장인 어셔 후작은 제 자리보전에 대한 강력한 위기감을 느꼈다.

    그리하여 어셔 후작이 찾아낸 사람이 바로 샬럿이었다.

    때마침 샬럿은 복수심과 좌절감에 휩싸인 상태였다.

    이네스와 라이언에게 어떻게든 복수하려 이리저리 돌아다녔으나, 찾아갔던 모두에게 문전박대를 당한 것이다.

    그런 샬럿은, 어셔 후작에게 꽤 훌륭한 도구로 보였다.

    브라이어튼 백작을 끌어내릴 용도로 쓰기에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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