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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그림자를 그만두었을 (108)화 (108/120)
  • 108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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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네스와 에녹은 자리를 옮겨 단둘이 대화를 나누었다.

    “아마도 공범이 있었을 겁니다.”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던 에녹이 불쑥 입을 열었다.

    “고트 자작 영식은 건장한 체구를 가진 남성입니다. 남자건 여자건 간에, 혼자서 영식을 옮기기는 어려워요.”

    “협력자가 있었다는 말씀이신가요?”“예. 상식적으로 자작 영식은 제 몸을 제대로 가누지도 못하는 상태였을 텐데, 그렇다면 혼자서 영식을 옮기는 건 더더욱 불가능해지죠.”

    “……확실히 그렇겠네요.”

    익사가 아니라, 누군가에 의해 라이언이 살해당한 게 명확한 정황.

    아직은 범인이 누구라고 완전히 확정된 것은 아니다.

    다만 이 시점에서, 라이언에게 해를 가할 가장 큰 동기를 가진 사람은.

    ‘샬럿.’

    이네스는 미간을 좁혔다.

    만약 샬럿이 정말로 라이언을 해쳤다고 가정한다면.

    가냘픈 체구의 여성인 샬럿이 덩치 큰 라이언을 혼자 옮기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니, 그 조력자도 함께 찾아내야 할 텐데.

    “그렇다면 일단 고트 자작 영식의 사망 전날 행적을 조사해 봐야겠네요.”

    “그건 이미 제가 찾아보고 있습니다.”

    에녹이 말을 받았다.

    “고트 자작 영식이 살해당한 게 확실하니, 치안대에도 도움을 구할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언론에서 이번 일이 살인 사건임을 알리면, 분명 범인들의 귀에도 들어갈 텐데요.”

    “범인을 특정할 때까지만 보도 금지령을 내리면 됩니다.”

    에녹이 걱정 말라는 것처럼 이네스를 다독였다.

    “이래 봬도 엘튼사의 사주이자 왕족 아닙니까. 걱정 마십시오.”

    “…….”

    정말 든든하다니까.

    온기 어린 시선으로 에녹을 바라보던 이네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렇다면 전 펠릭스의 행방을 마저 찾아보도록 할게요.”

    “펠릭스요?”

    “아, 어셔 후작의 제자 이름이에요.”

    순간 에녹의 눈초리가 날카로워졌다.

    “그…… 세밀화를 잘 그린다는 어린 제자 말입니까?”

    “맞아요.”

    이네스의 얼굴이 조금 흐려졌다.

    “다른 제자들은 정상적으로 외부 활동을 하고 있는데, 그 아이만 최근 바깥출입을 전혀 하지 않고 있어요.”

    서로 시선을 맞추던 에녹과 이네스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건의 퍼즐들은 대부분 모인 상황.

    이제 그 퍼즐들을 제대로 맞추는 일이 남아 있었다.

    ❀ ❀ ❀

    “펠릭스!”

    날카로운 외침이 쨍하니 울렸다.

    조그마한 몸집의 남자아이가 바짝 긴장하여 고개를 번쩍 들어 올렸다.

    “예, 어셔 후작님!”

    그러자 후덕한 외양의 중년 사내가, 얼굴을 잔뜩 찡그리며 소년을 노려보았다.

    “왜 이렇게 굼떠? 사람이 불렀으면 빨리빨리 움직이지 않고!”

    “죄송합니다, 후작님!”

    소년, 펠릭스가 꿀꺽 마른침을 삼키며 고개를 숙여 보였다.

    마땅찮은 시선으로 소년을 위아래로 뜯어보던 어셔 후작이, 들으란 듯이 쯧쯧 혀를 차며 몸을 돌렸다.

    “따라와라. 시킬 일이 있다.”

    “예, 예!”

    펠릭스는 후다닥 어셔 후작의 뒤를 따랐다.

    그리하여 도착한 곳은.

    ‘어라?’

    펠릭스는 오묘한 기분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여긴 어셔 후작님의 집무실 아냐?’

    내가 이 방에 들어가도 되나 싶어서, 펠릭스가 반사적으로 어셔 후작의 눈치를 살폈다.

    그도 그럴 것이, 펠릭스는 말만 도제지 실제로는 거의 하인과도 같은 취급을 받고 있었다.

    그 증거로, 펠릭스는 어셔 후작을 단 한 번도 ‘스승님’이라고 불러 본 적이 없을 정도였다.

    항상 아틀리에에서 잔심부름만 했을 뿐, 어셔 후작의 개인 공간에는 발조차 들여 본 적이 없었는데.

    달칵.

    집무실 문이 열렸다.

    안으로 들어오라고 눈짓한 어셔 후작이 집무실 안으로 쑥 들어갔다.

    주춤주춤 집무실에 발을 들이던 펠릭스가, 겁을 집어먹은 것조차 잊고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우와.’

    이렇게 고급스러운 방은 처음이었다.

    물건 하나하나가 값비싸 보인다.

    어셔 후작이 소파를 가리켰다.

    “이쪽으로 와서 앉아라.”

    “예, 예.”

    이렇게 부드러운 의자에 앉아도 되는지 모르겠다.

    펠릭스는 잔뜩 긴장한 얼굴로 자리에 앉았다.

    어셔 후작은 아이의 손에 펜을 쥐여 주고는, 서류 두 장을 내밀었다.

    한 장에는 서명이 되어 있었고, 다른 한 장에는 서명이 없었다.

    “여기, 이 서명 보이나?”

    “예.”

    “그 서명, 똑같이 베껴 봐.”

    응?

    순간 펠릭스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어셔 후작을 올려다보았다.

    후작이 짜증스럽게 핀잔을 주었다.

    “뭐 해? 얼른 하지 않고.”

    “그, 하지만…….”

    펠릭스가 조심스럽게 후작의 눈치를 살폈다.

    아직 열두 살밖에 되지 않은 아이이기는 했지만, 펠릭스도 현 상황이 조금 이상하다는 것쯤은 알았다.

    남의 서명을 왜 똑같이 따라 그려야 하는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자 어셔 후작이 왈칵 성을 내며 불쑥 손을 들어 올렸다.

    “지금 감히 내 말에 토를 달아?!”

    당장이라도 한 대 후려칠 것처럼 그 기세가 흉흉하다.

    “아, 아닙니다! 지금 하겠습니다!”

    펠릭스는 어깨를 움츠리며 황급히 펜을 움켜쥐었다.

    그러면서도 내심 걱정되는 마음에, 곁눈질로 더듬더듬 서류의 내용을 읽어 보려 했지만.

    “…….”

    문제는 펠릭스는 글을 배우지 못했다는 점이었다.

    그리하여 펠릭스가 알아본 것은 고작, 서류에 기재되어 있는 금액 정도였다.

    ‘……5만 골드?’

    뭐? 5만 골드라고?

    펠릭스의 두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5만 골드.

    제도 랭던에서도 가장 값비싼 주택을 두어 채는 살 수 있는 금액이었다.

    펠릭스는 평생을 일해도 만져 보지도 못할,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금액.

    그렇게 놀라서 얼어붙어 있던 차.

    어셔 후작이 펠릭스를 마구 채근했다.

    “뭐 해? 당장 움직이지 않고!”

    “예, 예!”

    겁에 질린 펠릭스가 황급히 펜을 놀렸다.

    서명을 베껴 내밀자, 어셔 후작이 와락 눈썹을 찌푸렸다.

    ‘이, 이걸로는 안 되나?’

    펠릭스는 반사적으로 움츠러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날카로운 고함이 터져 나왔다.

    “이것밖에 못 해?!”

    후작이 두 눈을 부라리며 손에 들린 서류를 갈기갈기 찢어 버렸다.

    “모양이 다르잖아! 완전히 똑같아야 한단 말이다!”

    “죄송합니다! 다시 할게요!”

    “게을러 빠져서는, 이럴 때 밥값이라도 안 하면 어쩌란 말이야!!”

    그렇게 손이 부르트도록 서명을 베끼고, 베끼고, 또 베낀 끝에.

    시간이 흐르고, 해가 완전히 저문 후에야 펠릭스는 집무실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휴우.”

    녹초가 된 펠릭스가, 터덜터덜 복도를 가로지르다 말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하루 종일 펜을 쥐고 있던 손가락이 욱신거린다.

    ‘오늘은 정말 이상한 날이야.’

    아니, 정확히는 약 한 달 전부터 내내 이상한 일을 겪게 되는 듯하다.

    처음 시작은 스승이 웬 귀족과 계속 만남을 가졌던 것이었다.

    얼핏 듣기로, 그 귀족의 이름은 핸슨 백작이라고 했다.

    그 백작님을 만날 때면, 어셔 후작은 대체로 기분이 좋아 보였기에.

    무엇보다도 핸슨 백작과 방탕하게 어울리느라, 펠릭스에게 전혀 관심조차 두지 않았으므로.

    펠릭스는 핸슨 백작이 방문하는 것을 은근히 기다리기도 했다.

    왜냐하면 그때만큼은 어셔 후작이 자신에게 화를 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더니 갑자기 오늘…… 나를 불러내셔서 서명을 베끼게 하셨지.’

    이네스 브라이어튼.

    펠릭스는 그 이름을 곱씹어 보았다.

    귀족들 세계에는 까막눈에 가까운 펠릭스였지만, 그래도 브라이어튼 백작이 누구인지는 알고 있었다.

    어셔 후작이 매번 이를 갈며 브라이어튼 백작에 대한 험담을 늘어놓았기 때문이었다.

    ‘예술계에는 데뷔한 지 얼마 되지도 않는 주제에, 서식스 공작과의 친분을 앞세워 잘난 척하기는!!’

    사실 그 말에는 어폐가 있었다.

    브라이어튼 백작은 이혼 전부터 고트 자작 영식의 대리 화가로 활동했었으니까.

    그 말은즉, 고트 자작 영식의 경력은 모조리 브라이어튼 백작이 만들었다는 뜻이다.

    그러나 어셔 후작은 아무래도 브라이어튼 백작에게 대단한 유감을 갖고 있는 모양이었다.

    ‘교류전? 해외 전시회? 그깟 게 뭐라고!!’

    어셔 후작은 분을 이기지 못하고 의자 팔걸이를 주먹으로 쾅쾅 내리쳤다.

    ‘예술가입네 하고 잘난 척하는 것을 봐줬더니, 이제는 학교를 만들겠다고 설쳐?!’

    ……분명 그랬었는데.

    어째서 브라이어튼 백작의 서명을 베끼게 했을까?

    마지막으로 완성된 서명은, 서명을 베낀 펠릭스 자신이 봐도 무척 똑같아 보았다.

    ‘그래, 이 정도는 되어야지.’

    그제야 어셔 후작은 흡족하게 웃었다.

    서류를 냉큼 품에 챙겨 넣는 후작의 모습이 뇌리에 아른거렸다.

    그리고 펠릭스를 밖으로 내보내며 신신당부하던 목소리도.

    ‘오늘 있었던 일은 그 누구에게도 말해서는 안 된다. 알았나?’

    이유 모를 불안감이 전신을 잠식했다.

    “…….”

    입 안이 바짝바짝 마르는 기분에, 펠릭스는 어깨를 움츠리며 종종걸음을 쳤다.

    그리고 며칠 후.

    “들었어? 브라이어튼 백작 말이야!”

    “학교 부지를 구매하면서 뇌물을 받았다며?”

    아틀리에의 다른 도제들은 삼삼오오 모여 이야기꽃을 피웠다.

    대화 주제는 브라이어튼 백작의 뇌물 수수건.

    ‘이게 어떻게 된 거지?’

    펠릭스는 구석에서 불안하게 눈동자를 굴렸다.

    불현듯 브라이어튼 백작의 서명을 베껴 넣었던 서류가 생각이 난 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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