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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그림자를 그만두었을 (107)화 (107/120)
  • 107화

    “방금 고트 자작가에서 사람이 왔었어요.”

    “……고트 자작가에서?”

    순간 이네스의 시선이 날카로워졌다.

    메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이 편지를 주고 가더군요. 고트 자작 대부인께서 보내신 거라고, 꼭 가주님께서 확인해 주시기를 간청드린다고요.”

    비록 이네스가 메리에게 자세한 사항을 공유하지는 않았지만, 메리 또한 최근 상황이 기묘하게 돌아간다는 것은 감으로 알고 있었다.

    “아무래도 중요한 편지인 것 같아서, 이른 아침에 찾아뵙는 실례를 범했네요. 죄송합니다.”

    “별말을 다 하네.”

    씩 눈매를 휘어 보인 이네스가, 바쁜 손길로 페이퍼 나이프를 들어 편지의 겉봉을 잘라 냈다.

    “이렇게 전해 줘서 고마워, 그만 물러가 봐도 좋아.”

    “알겠습니다, 가주님.”

    메리가 못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이네스를 돌아보았다.

    “그래도 너무 무리하지는 마세요. 아셨죠?”

    “그럼, 당연하지. 혹여나 내가 쓰러지기라도 하면, 메리가 날 붙들고 삼박 사일은 잔소리를 할 거 아냐?”

    “정말, 그걸 아시는 분께서 밤을 새우세요?”

    밉지 않게 이네스를 타박한 메리가 방을 빠져나갔다.

    이네스는 편지로 시선을 떨어뜨렸다.

    빠르게 내용을 훑어 내린다.

    그리고.

    ‘좋아.’

    이네스가 두 눈을 빛냈다.

    아무래도 라이언의 시신을 제대로 조사해 볼 기회를 얻게 된 것 같다.

    ❀ ❀ ❀

    사람들의 시선이 닿지 않는 야심한 밤.

    고트 자작 대부인의 허락 아래, 은밀하게 라이언의 무덤이 파헤쳐졌다.

    그 후.

    라이언의 관이 향한 곳은 랭던 외곽의 부검소였다.

    ❀ ❀ ❀

    이네스는 잰걸음으로 석조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라이언의 시신을 부검하기로 한 곳이었다.

    ‘으, 추워.’

    이네스가 가볍게 어깨를 움츠렸다.

    최근 날씨는 꽤 따스했는데도, 기분 탓인지 부검소의 공기는 유난히도 썰렁하게 느껴졌다.

    “아, 오셨습니까.”

    이네스를 가장 먼저 맞이한 사람은 에녹이었다.

    “어서 오십시오, 브라이어튼 백작님.”

    뒤이어 라이언을 검시한 법의관이 이네스에게로 인사를 건넸다.

    “부검은 모두 끝났습니다. 부검한 결과는 안쪽에서 공유드리겠습니다.”

    “고생하셨습니다, 법의관님.”

    이네스도 법의관을 향해 고개를 숙여 보였다.

    법의관이 두 사람을 앞서 걷기 시작했다.

    “안으로 안내하겠습니다.”

    그렇게 법의관의 뒤를 따르던 차.

    에녹 곁에 바짝 붙어 선 이네스가 조그맣게 소곤거렸다.

    “정말 고마워요, 에녹.”

    이네스가 에녹을 올려다보며 배시시 웃어 보였다.

    “에녹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라이언의 시신을 이렇게 빠르게 부검할 수는 없었을 거예요.”

    최근 날씨는 계속 따스했기에, 라이언의 시신이 빠르게 부패할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빠르게 부검소를 수배하고, 실력 있는 법의관까지 데려올 수 있었던 건 모두 에녹 덕이었다.

    에녹 또한 이네스를 향해 마주 미소 지었다.

    “고맙다는 인사는 됐습니다. 제가 이네스를 돕고 싶었던 것뿐인걸요.”

    “하지만 이건 제 일…….”

    무심결에 그렇게 대답하려던 이네스가 합 입을 다물었다.

    어느새 에녹이 뾰족한 눈초리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맞다, 내 일 네 일을 따지지 말자고 했었지?’

    아이고.

    이네스는 등 뒤로 식은땀을 흘렸다.

    다행히도 에녹은 이네스의 말실수에 대해 크게 타박을 할 생각은 없어 보였다.

    대신 에녹은 미간을 좁히며 말을 돌렸다.

    “무엇보다도 그렇게 치면, 이네스가 고트 자작 대부인에게 시신 검시를 허락받은 게 더 대단하지요.”

    망자의 시신을 부검하는 건 유족의 동의가 있어야만 가능하다.

    필요하다면 해부까지 해야 하는데, 아무리 죽음의 원인을 밝히기 위해서라지만 망자의 시신을 훼손하는 데에 거부감을 느끼는 유가족이 상당히 많았으니까.

    그 깐깐하고 제 아들 귀한 줄만 알던 고트 자작 대부인이, 어떻게 용케 제 아들을 검시하는 것을 허락했나 싶었다.

    그러자 이네스가 어색하게 웃었다.

    “사실 전 별로 한 게 없는걸요. 그냥 필요하다면 조사에 도움을 주겠다고 말했을 뿐…….”

    “그것 자체가 이미 무언가를 한 거지요.”

    에녹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고트 자작 대부인에게 도와주겠다고 제안을 했잖습니까?”

    “네? 아니 그건…….”

    “고트 자작 가문과의 악연을 생각하면, 그런 권유를 하는 것 자체가 쉽지 않았을 텐데.”

    에녹이 싱긋 눈웃음을 지었다.

    “대견하군요.”

    “…….”

    그저 말 한마디 했을 뿐인데 칭찬을 받는 기분이란 아주 머쓱했다.

    그래도 나쁜 기분은 아니었기에.

    솔직히 말하면 괜히 기분이 좋아졌기에, 이네스는 괜히 어깨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그리하여 도착한 곳은 커다란 탁자와 의자 몇 개만이 놓여 있는 살풍경한 방이었다.

    “두 분, 이쪽으로 앉으시지요.”

    이네스와 에녹은 법의관과 마주 앉았다.

    법의관은 능숙한 동작으로 서류들을 꺼내 놓았다.

    라이언의 시신을 부검한 자료들이었다.

    “일단 공작 각하께서 말씀하신 대로, 혈액 검사와 해부를 함께 진행하였습니다.”

    동시에, 이네스가 힐끔 에녹을 곁눈질로 바라보았다.

    ‘에녹이 정말 신경을 많이 써 줬구나.’

    혈액 검사 마도구.

    가격이 어마어마하게 비쌌기에, 보통은 사고사로 들어온 시신에게는 사용하지 않는 물건이었다.

    그럼에도 저 물건을 사용했다는 것 자체가, 에녹이 이번 부검을 물심양면으로 지원했다는 증거였다.

    그리고 그때.

    법의관이 폭탄을 떨어뜨렸다.

    “일단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저는 이 죽음에 외부의 압력이 가해졌다고 생각합니다.”

    이네스가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살해당했다고 보시는 건가요?”

    “제 소견으로는 그렇습니다.”

    법의관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고트 자작 영식은 술에 취해서 호수에 빠지는 바람에 사망했다고 했었지요?”

    “네, 그랬지요.”

    “보통 익사한 시신은 기도에서 물이 발견됩니다. 익사 자체가 물이 기도를 막아서 숨을 쉬지 못하고 죽는 것이니 당연하지요.”

    법의관이 조곤조곤 말을 이었다.

    “하지만 고트 자작 영식의 기도는 아주 깨끗했어요. 물기는 전혀 없었습니다.”

    “그 말씀은…….”

    “물에 빠져서 사망한 게 아니라, 이미 사망한 상태에서 물에 빠졌다는 뜻이지요.”

    이네스와 에녹은 빠르게 시선을 교환하고는, 다시 법의관에게로 시선을 고정시켰다.

    “게다가 체내의 알코올 농도도 그리 높지 않아요.”

    “술에 취하지 않았다는 뜻인가요?”

    “예. 다소 정신이 몽롱해질 수는 있어도, 이성을 잃을 정도의 농도는 전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렇게 대답한 법의관이 서류를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또한 수상한 점은 더 있습니다. 시신에서 수면제 성분이 과량 검출되었는데, 이 수면제의 주재료는 토고 꽃입니다.”

    “토고 꽃?”

    “기본적으로는 신체를 이완시키는 약효를 가진 꽃이에요.”

    이네스는 서류 쪽으로 시선을 떨어뜨렸다.

    가느다란 줄기 위로, 보랏빛 동그란 꽃송이가 올망졸망하게 매달린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겉보기로는 전혀 무해해 보인다.

    “토고 꽃을 사용한 수면제는 기본적으로 안전하지만, 특정한 상황에서는 독극물로 작용할 수도 있습니다.”

    “특정한 상황이라면…….”

    “카페인과 함께 섭취하면 몸이 이완되는 것을 넘어서서, 자발적인 호흡을 하지 못하게 만들어요.”

    설마?

    에녹과 이네스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법의관이 한숨을 섞어 말을 맺었다.

    “그리고 고트 자작은 술안주로 초콜릿을 먹었더군요. 배 속에서 초콜릿이 검출되었어요.”

    “……최소 살인에 대한 고의가 있었다는 뜻이군요.”

    “또한 아마 저 이전에 검시했던 법의관은 이 사실을 몰랐을 겁니다. 배 속을 갈라 보지 않는 이상 무엇을 먹었는지는 알기 어렵고, 보통 유족들은 부검을 꺼리는 편이니까요.”

    법의관이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물론 그렇다 한들 기도에 물이 들어가지 않았다는 것을 밝히지 않았으니, 그 부분이 수상하기는 합니다. 그를 알아보지 못한다는 건 법의학자로서의 기본 소양조차 없다는 뜻이니까요.”

    “처음 부검을 진행했던 법의관도 미심쩍다, 이건가?”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만…… 저는 일개 법의관일 뿐이니 여기까지만 언급하겠습니다.”

    법의관은 서류를 정리해 두 사람 앞으로 내밀며 말을 맺었다.

    “정리하자면, 고트 자작 영식께서는 저 수면제와 카페인의 결합 때문에 질식사한 것으로 보입니다.”

    “고맙습니다. 큰 도움이 되었어요.”

    그 서류를 받아들며, 이네스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정말로…… 라이언이 살해되었을 줄이야.’

    누군가가 차가운 손으로 등을 쓸어내리기라도 한 것처럼 섬찟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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