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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그림자를 그만두었을 (106)화 (106/120)
  • 106화

    ‘제가 이 일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다면, 분명 후작님의 명예에도 큰 해가 될 거예요. 장담할게요.’

    결국 어셔 후작은 짜증을 내면서도 샬럿이 남긴 주소로 향했다.

    그러면서도 의아했던 것은.

    ‘고작해야 하루 이틀 별장을 빌리는 건데, 어째서 번거롭게 가명까지 사용했지?’

    그리하여 도착한 별장에서는 끔찍한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제, 제이슨 남작 영애. 이건……!’

    온갖 호화스러운 안주가 펼쳐진 술상 위로는 피처럼 붉은 와인이 엎어져 있었다.

    뚝뚝 떨어지는 와인이 바닥의 카펫을 천천히 물들였다.

    하지만 가장 놀라운 광경은, 바닥에 쓰러져 있는 라이언이었다.

    뭘 먹었는지 입가에 거품이 일어 있었다.

    ‘고트 자작 영식, 괜찮은가?! 이게 무슨!!’

    어셔 후작은 황급히 라이언을 구호하려 했으나 이미 늦었다.

    라이언의 숨은 이미 멎은 상태였다.

    어셔 후작이 황망하게 시선을 들어 샬럿을 바라보았다.

    ‘설마, 고트 자작 영식을 해한 게 제이슨 남작 영애인가?!’

    하지만 어셔 후작의 경악은 제 알 바 아니라는 양, 샬럿은 그저 순진하게 두 눈을 깜빡일 따름이었다.

    ‘네, 제가 죽였는데요.’

    ‘뭐라고?!’

    어셔 후작은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것처럼 띵해졌다.

    동시에 샬럿이 천진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오히려 라이언이 죽는 편이 낫잖아요?’

    ‘그게 무슨 헛소리……!’

    ‘라이언이 증여 증명서를 위조한 배후로, 어셔 후작님을 정확히 지목했던 건 알고 계세요?’

    폐부를 찌르는 질문에, 어셔 후작이 뻣뻣하게 굳어졌다.

    그런 어셔 후작을 재미있다는 양 바라보며 샬럿이 생글생글 아이처럼 웃었다.

    ‘그렇지 않아도 라이언은 깃털처럼 입이 가벼운 사람인데, 라이언이 제멋대로 떠들어 대기라도 하면 저만 위험해지겠어요? 후작님도 위험해지지.’

    ‘그, 그래도……!’

    ‘그래서 제가 라이언이 절대 입을 열지 못하도록 깔끔하게 처리한 거잖아요. 후작님께서는 제 마음도 모르시고, 정말.’

    예쁜 입술을 뾰족하게 내밀며 샬럿이 툴툴거렸다.

    그러기를 잠시.

    샬럿이 두 눈동자를 반짝 빛냈다.

    ‘애초에 라이언의 시체를 아예 말끔하게 없애 버리면 제일 좋겠지만, 그러면 아들에게 집착하는 고트 자작 대부인이 어디까지 들쑤시고 다닐지 모르니까 말이에요.’

    ‘잠깐만, 제이슨 남작 영애. 그건…….’

    ‘그러니까 고트 자작 대부인이 의심하지 않도록, 사고로 죽은 것으로 적당히 꾸며 내야 하는데.’

    그러고는 포르르 한숨을 내쉬며 말을 잇는다.

    ‘그래서 후작님께서 해 주셔야 할 게 있어요. 대부분의 시체는 법의관에게 조사를 받잖아요?’

    ‘그, 그건 그렇지만.’

    ‘그러니 후작님이 법의관을 매수하든 어쩌든 해서, 사망 확인서를 떼어야 해요.’

    어셔 후작이 두 눈을 부릅떴다.

    그런 어셔 후작을 향해, 샬럿이 나른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뭐, 서명도 조작하신 분인데 그 정도야 그리 어렵지는 않으실 것 같지만…… 그래도 혹시나 걱정하실까 봐 말씀드리면.’

    ‘제이슨 남작 영애, 도대체가…….’

    ‘전 라이언을 죽일 때 독극물을 쓰지 않았어요. 그러니 시신을 검시한다 한들 그렇게까지 수상한 정황이 나오지는 않을 거예요.’

    샬럿이 어셔 후작을 마주 보며 환하게 미소 지었다.

    광기 어린 미소였다.

    ‘그저 아주 조금만, 우리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사망 확인서를 떼면 된다는 소리예요.’

    그러고는 재차 못을 박듯 질문을 던진다.

    ‘저, 도와주실 거죠?’

    그리고 어셔 후작은 결국 샬럿의 제안을 거절하지 못했다.

    ‘제기랄, 저 계집과 손을 잡은 것부터가 잘못이었어.’

    만면에 해사한 미소를 머금은 샬럿을 응시하며, 어셔 후작은 이를 갈았다.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더 이상 주워 담을 수 없는 것이다.

    “어쨌든, 이제부터는 눈에 띄는 행동은 하지 마. 알았어?!”

    사납게 윽박지른 어셔 후작이 도망치듯 밖으로 빠져나갔다.

    샬럿은 장난치듯 그 뒷모습에 대고 인사를 건넸다.

    “조심히 들어가세요!”

    쾅!

    문이 부서져라 닫혔다.

    동시에 샬럿의 눈동자가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들킬 일은 없을 거야, 절대로.”

    샬럿은 스스로를 세뇌하듯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녀의 손에서는 여전히 다이아몬드 팔찌가 눈이 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 ❀ ❀

    늦은 밤.

    오늘 라이언의 장례식을 치른 고트 자작가는 쥐 죽은 듯한 고요함에 휩싸여 있었다.

    장례식을 치르면서 피로가 누적되어 있었기에, 다들 초저녁부터 곯아떨어진 탓이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잠을 이루지 못하고 천장을 노려보는 사람이 하나 있었으니.

    그는 바로 고트 자작 대부인이었다.

    ‘샬럿 그 계집애, 도대체 뭐였지.’

    자작 대부인은 오늘 있었던 일을 되짚어 생각해 보았다.

    샬럿이 갑작스럽게 장례식장에 난입했고, 라이언을 진심으로 사랑했다며 펑펑 울음을 터뜨렸다.

    샬럿의 말대로라면, 이번 장례식은 사랑하는 사람과 영원히 이별하는 자리였다.

    그런데, 사랑하는 사람의 관이 구덩이에 파묻히는 장면을 바라보며.

    ……그렇게 섬뜩하게 웃을 수 있단 말인가?

    ‘그 미소…….’

    고트 자작 대부인의 뇌리에, 샬럿의 만면에 걸려 있던 해사한 미소가 다시 한번 떠올랐다.

    ‘분명 라이언의 죽음을 기뻐하고 있었어.’

    자작 대부인은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여태까지 고트 자작 대부인의 분노는 오로지 이네스에게로 쏠려 있었다.

    라이언과 이혼하면서 고트 자작가를 위기에 몰아넣은 이네스가 너무나도 미웠던 것이다.

    반면, 자작 대부인은 샬럿을 은근히 무시했었다.

    고작해야 라이언의 정부였던 계집애 아닌가.

    그런 미천한 계집이 해 봤자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분명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었지만…….

    ‘아주 만약에, 샬럿이 라이언의 죽음에 관련이 있는 거라면?’

    불현듯 뇌리에 스친 의심에, 고트 자작 대부인은 바짝 얼어붙었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정말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고트 자작 대부인은 어떻게든 그 음모론을 떨쳐 내려 고개를 마구 휘저었다.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의심은 끈질기게 머릿속에 자리 잡는다.

    ‘하지만 만약에 라이언의 죽음이 정말로 타살이라 한들, 우리 가문에서는 다방면으로 조사하기 어려워.’

    브라이어튼의 지원을 잃은 후, 예전의 사업체들을 건사하는 것조차 어려워하는 고트 자작가였다.

    가문이 소유했던 부동산까지 몇 채나 팔아넘긴 마당에, 라이언의 죽음에 대해 은밀히 조사할 여력이 있을 리 없다.

    ‘분하지만…… 어쩔 수 없어.’

    고트 자작 대부인은 스르륵 자리에서 일어났다.

    비틀비틀 책상 쪽으로 다가가 편지지를 꺼내 든다.

    펜을 움켜쥔 손등 위로, 뼈 마디마디가 도드라지도록 힘이 들어갔다.

    한참을 고민하던 자작 대부인이 편지의 머리말을 휘갈겨 썼다.

    <친애하는 브라이어튼 백작에게.>

    얼굴을 붉히며 헤어졌던 며느리에게 조사를 부탁하는 것이, 수치스럽다고 해도 어쩔 수 없었다.

    ‘라이언…… 내 귀한 아들이 어떻게 죽은 건지, 어떻게든 알아내야겠어.’

    고트 자작 대부인은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며 재차 펜을 놀리기 시작했다.

    ❀ ❀ ❀

    아직 아침이라기보다는 이른 새벽에 가까운 시간.

    이네스는 어셔 후작의 도제들에 대한 자료들을 살펴보고 있었다.

    ‘……최근 도제들 중, 바깥출입을 하지 않는 아이가 있다고.’

    도제의 이름은 펠릭스.

    평민이라 성은 없다.

    나이는 열두 살.

    일찍이 부모님을 잃고 의지할 곳이 없어서, 어셔 후작이 후견인 겸 제자로 거둬들였다고 기록되어 있었다.

    최근 바깥출입을 전혀 하지 않는다는 점을 제외하면, 사실 그리 특별할 것은 없는 아이였다.

    다만 그 부분이 기이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어셔 후작은 경계심이 심한 성격이라서, 자신의 아틀리에에 제자들 외의 다른 사람들이 오가는 것을 극도로 싫어한다고 했었는데.’

    그래서 아틀리에의 잡일들을 도맡아 하는 사람이 바로 펠릭스라고 했다.

    화방에서 물건을 사 온다든지, 잔심부름을 한다든지, 다른 도제들이 귀찮은 일들을 떠맡긴다든지.

    이런저런 이유로 발에 불이 나도록 밖을 오가던 아이였는데, 갑자기 이렇게 바깥출입이 뚝 끊긴다고?

    진녹색 눈동자가 의심으로 가늘어졌다.

    ‘일단 이 펠릭스란 아이의 행방을 알아보아야겠는데.’

    이네스는 의자 팔걸이를 손톱으로 톡톡 두드리며 생각에 잠겼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똑똑.

    갑자기 들려온 노크 소리에, 이네스는 퍼뜩 상념에서 깨어났다.

    “들어와.”

    그와 함께 메리가 방 안으로 발을 들였다.

    이네스가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메리를 바라보았다.

    “메리, 아침부터 웬일이야?”

    메리가 미간을 좁히며 이네스에게 되물었다.

    “가주님이야말로 설마 이 시간까지 주무시지 않은 건가요?”

    “아, 뭐…….”

    이제 어마어마한 잔소리를 듣겠네.

    이네스는 내심 마음을 단단히 다져 먹었다.

    하지만.

    “휴우.”

    한숨을 푹 내쉰 메리가 사뿐사뿐 이네스 쪽으로 다가왔다.

    그러고는 공손하게 편지 한 통을 내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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