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의 그림자를 그만두었을 (104)화 (104/120)
  • 104화

    ‘어셔 후작 그 새끼, 자기가 왕립예술협회장이랍시고 우쭐거리기는…….’

    그날은 쌀쌀했던 겨울이었다.

    당시 라이언의 시중을 드는 게 당연했던 이네스는, 당연하게 그의 코트부터 받아 들었다.

    묵직한 코트에서 올라오는 짙은 술 냄새와 여자의 향수 냄새가 코를 찔렀다.

    ‘실력도 안 되는 게, 제가 회장이면 다야?!’

    분에 찬 라이언이 재차 왈칵 성을 냈다.

    코트를 정돈하던 이네스가 조심스럽게 라이언에게 물었다.

    ‘라이언, 무엇 때문에 그렇게 화가 난 거야?’

    ‘그렇잖아! 그 자식에게 잘 보이겠다고 먹인 술이 몇 병인데, 내 부탁 하나조차 못 들어줘?!’

    라이언이 두 눈을 부릅떴다.

    ‘회장직만 아니면 별것도 아닌 자식이!’

    ‘진정해, 라이언.’

    ‘내가 진정하게 생겼어?! 사람들은 모두 그 자식에게 속고 있는 거라고!!’

    화가 머리 꼭대기까지 난 라이언이, 위협적으로 팔을 휘두르며 말을 이었다.

    ‘실력도 안 되는 게, 도제들을 착취해 가면서 자기 작품을 뽑아내고 있는 거라니까?!’

    순간 이네스가 움찔 어깨를 굳혔다.

    그때는 이미 이네스가 라이언의 대리 화가 노릇을 하고 있던 시절이었으므로.

    하지만 당시의 이네스는 라이언을 열렬히 사랑하고 있었기에.

    라이언에게 버림받는 것을 극도로 두려워했었기에…….

    ‘당신도 그러고 있잖아.’

    그렇게 항변하는 대신, 이네스는 제 남편을 향해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그, 그래?’

    ‘아, 그렇다고! 아이디어를 뺏는 건 다반사고, 심지어는 꼬맹이 하나를 제자랍시고 아래에 넣어 놨는데.’

    라이언이 이네스에게 얼굴을 들이대며 이죽거렸다.

    짙은 술 냄새가 훅 풍겼다.

    ‘어셔 후작이 그 꼬마를 제자로 들인 이유가 뭔 줄이나 알아?’

    ‘뭔데?’

    ‘세밀화를 잘 그려서야!’

    라이언이 씩씩거렸다.

    ‘그래 봤자 열 살짜리 꼬맹이인데 견제할 게 따로 있지!’

    그렇게 언성을 높인 후, 이내 들으란 듯이 혀를 찬다.

    ‘뭐, 그래도 기가 막히게 잘 그리기는 하더라. 거의 사물을 복사하는 것처럼 그리던데?’

    그러고는 이네스 쪽으로 곱지 않게 눈을 흘겼다.

    ‘그러니까 당신도 좀 더 노력하란 말이야.’

    ‘응?’

    ‘이번 그림은 해외 예술제에 출품할 생각이니까, 정성을 팍팍 들여서 그리라고. 알았어?’

    라이언이 보란 듯이 양어깨를 우쭐거렸다.

    ‘내가 잘되어야 당신도 빛을 보지.’

    ‘……응, 알고 있어.’

    그날, 이네스는 밤늦게까지 잠을 이루지 못했다.

    남편인 라이언의 이름에 가려, 자신의 그림을 제 것이라고 말조차 하지 못하는 스스로의 처지와.

    스승인 어셔 후작의 이름에 가려, 제 재능을 제대로 펼치지조차 못하는 이름 모를 도제가.

    ……어쩐지 겹쳐 보인 탓이다.

    당시에는 그랬었지만.

    “세밀화.”

    이네스가 홀린 듯이 중얼거렸다.

    그 멍한 목소리에, 에녹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이네스를 돌아보았다.

    “이네스?”

    “세밀화…… 세밀화예요!”

    그 순간, 이네스가 고개를 번쩍 들어 올렸다.

    그 당시에는 그저, 어셔 후작의 이름 모를 어린 제자를 안타까워하고 끝났으나.

    지금은 달랐다.

    “들은 적 있어요. 어셔 후작의 어린 제자 중에, 세밀화를 무척 잘 그리는 아이가 하나 있다고요.”

    “세밀화는 갑자기 왜…… 설마.”

    순간 에녹의 눈동자가 날카로워졌다.

    “어셔 후작의 제자를 서명 위조범으로 의심하고 있는 겁니까?”

    “확실하지는 않아요. 하지만.”

    이네스가 에녹의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며 단호하게 말했다.

    “가능성이 높다고는 생각해요.”

    어셔 후작의 제자.

    서명 감별사를 감쪽같이 속여 넘길 수 있을 실력자이면서도, 외부에 노출된 적 없어 다른 사람에게 들킬 염려가 없다.

    서명 위조범이 갖춰야 할 모든 조건이 꼭 들어맞지 않는가.

    게다가 어셔 후작은 왕립예술협회장으로서, 학교 설립 문제 때문에 이네스에게 악의를 품고 있다.

    그러니 제자를 이용하여 서명을 위조할 동기도 있었다.

    이네스의 명예에 흠집을 내기 위해서 말이다.

    “일리 있는 말씀입니다.”

    에녹 또한 결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일단, 어셔 후작의 제자들을 유심히 살펴봐야겠군요.”

    ❀ ❀ ❀

    라이언의 장례식 당일.

    고트 자작 대부인은 거의 식음을 전폐하고 누워 있었다.

    머릿속에는 이네스와 나누었던 대화가 계속해서 반복 재생되고 있었다.

    ‘고트 자작 영식이 사망한 것은 유감이고, 자작 대부인께서 슬퍼하시는 것도 이해하지만.’

    자작 대부인을 바라보던 서늘한 눈빛.

    온기라고는 하나도 없는 목소리.

    ‘그렇다고 자작 대부인께서 제게 찾아와 화풀이를 하실 이유는 없어요.’

    자식을 잃은 어미 앞에서 어떻게 이리도 매정할 수가!

    자작 대부인은 분노로 바르르 어깨를 떨었다.

    ‘다만 아주 만약에, 고트 자작 영식의 죽음에 대해 무언가 미심쩍은 부분이 생겨서 진상을 알아보고 싶다면…… 그에 대해 도움을 줄 용의는 있어요.’

    ‘명확하게 말하지만, 고트 자작 영식에 대한 애정이 남아서가 아니에요.’

    ‘혹여나 이번 사건에 제 이름이 불미스럽게 끼어들게 되어, 브라이어튼의 명예에 누가 될까 봐 그를 염려해서예요.’

    끝까지 제 가문의 명예만을 중시하던 그 모습까지, 끔찍한 냉혈한 같으니라고!

    자작 대부인은 바득바득 이를 갈았다.

    ‘내가 네까짓 거에게 도움받을 줄 알아?!’

    그리고 그때.

    똑똑.

    짧은 노크 소리가 울렸다.

    “…….”

    자작 대부인은 두 눈을 질끈 감을 뿐, 그 노크에 응답하지 않았다.

    그러자 조용히 문이 열리고, 뚜벅뚜벅 발걸음 소리가 울린다.

    자작 대부인이 누운 침대 앞에 발이 멈추고.

    “어머니.”

    침중한 목소리가 고트 자작 대부인을 불렀다.

    고트 자작이었다.

    “이제 나가셔야 합니다.”

    “…….”

    “라이언의 장례식이 치러질 거예요. 이제 라이언을 보내 줘야만…….”

    “보내?!”

    그 순간, 자작 대부인이 튕겨 오르듯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그녀의 눈동자가 이글이글 불타올랐다.

    “보내기는 누굴 보낸단 말이야!”

    “어머니!”

    “내 아들이 그렇게 죽었는데, 그 창창한 나이에 벌써 그렇게 가 버렸는데……!”

    창백한 뺨 위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고트 자작은 망연한 시선으로 꺼이꺼이 울음을 터뜨리는 제 어머니를 내려다보았다.

    그렇게 한참을 울던 고트 자작 대부인이 비틀비틀 자리에서 일어났다.

    옷소매로 거칠게 눈가를 훔친다.

    “내 귀한 아들이 떠난다는데 어떻게…… 어떻게 안 갈 수가 있겠어.”

    “어머니, 제게 기대세요.”

    “됐다.”

    대충 손을 휘저어 보인 자작 대부인이 비틀거리며 계단을 내려갔다.

    밖으로 걸음을 내디디자, 햇살이 환하게 쏟아지는 푸른 하늘이 자작 대부인을 반겼다.

    자작 대부인은 원망스러운 시선으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자작 대부인이 느끼는 절망 따위는 전혀 제 알 바 아니라는 양, 날씨는 눈물이 날 정도로 화창했다.

    라이언은 고트 자작가의 가묘에 묻히기로 했다.

    마차를 타고 가묘로 가는 내내, 자작 대부인은 계속해서 울음을 그치지 못했다.

    “어흑, 흑, 흐윽…….”

    “어머니, 울음 좀 그치시고…….”

    제 어머니를 달래던 고트 자작이, 울컥하여 입술을 당겨 물었다.

    비록 모자라고 멍청한 녀석이었지만 그래도 제 동생이었다.

    창졸간에 유일한 동생이 세상을 떠났는데, 고트 자작이라고 슬프지 않을 리 없었다.

    그리하여 우여곡절 끝에 두 모자는 가묘에 도착했다.

    관을 내리기 위해 미리 파 둔 무덤가로 향하는데, 누군가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두 사람을 불렀다.

    “고트 자작, 그리고 자작 대부인.”

    “아, 어셔 후작님.”

    왕립예술협회장직을 맡고 있는 어셔 후작이었다.

    고트 자작은 마땅찮은 표정으로 어셔 후작을 바라보았다.

    ‘브라이어튼 백작의 대리 화가 건이 터진 이래로, 내 동생과는 연락을 뚝 끊어 버렸으면서.’

    도대체 무슨 염치로 여기까지 찾아왔는지 모르겠다.

    한편, 고트 자작의 불쾌함을 아는지 모르는지.

    어셔 후작은 그저 예의 바른 목소리로 위로의 말을 건넬 따름이었다.

    “심려가 크시겠습니다.”

    “…….”

    하지만 상대는 고트 자작가보다도 훨씬 신분도 높고, 영향력도 큰 귀족이었다.

    결국 고트 자작은 시큰둥한 얼굴로나마 그 위로에 화답했다.

    “염려해 주셔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아닙니다. 이렇게 큰일을 겪었는데…… 부디 힘을 내시지요.”

    그렇게 몇 마디 대화를 나누며, 세 사람은 땅이 다져진 무덤가로 향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건 커다란 관.

    그 안에 누워 있는 파리한 얼굴의 라이언을 발견하자마자, 고트 자작 대부인은 다시 한번 발작하듯 울음을 터뜨렸다.

    “라이언!”

    고트 자작 대부인이 허우적거리며 관 옆으로 다가갔다.

    싸늘하게 식은 라이언의 뺨을 어루만지며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린다.

    “세상에! 내 아들이……!”

    배 속 깊은 곳부터 긁고 올라오는 처절한 울음소리.

    평소 고트 자작 대부인을 그리 좋아하지 않던 사람들조차 동정심을 느낄 정도였다.

    조문객들은 제각기 안쓰러운 시선으로 고트 자작 대부인을 바라보았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