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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그림자를 그만두었을 (103)화 (103/120)
  • 103화

    “그때 고트 자작 영식이 당신에게 재결합 요청을 했잖습니까.”

    이네스에게 당시의 일을 전해 들은 에녹은, 피가 거꾸로 솟는다는 게 어떤 기분인지 처음 알았다.

    ‘어째 이야기하면 할수록 에녹이 점점 화가 나는 것 같은데.’

    비록 입술은 호선을 그리고 있지만, 웃음기라고는 전혀 없는 눈이라거나.

    은근히 힘이 들어간 턱이라거나…….

    ‘음.’

    이거야 원, 그냥 빨리 용건을 말하는 편이 나을 것 같다.

    이네스가 황급히 말을 이었다.

    “고트 자작 대부인이 말하기를, 라이언은 사실 샬럿에게 큰돈을 받은 적이 있대요.”

    “돈 말입니까?”

    비록 라이언을 향한 생리적인 불쾌감에 시달리고 있었으나, 에녹은 금세 제 감정을 갈무리했다.

    동시에 이네스가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네. 아무래도 라이언은 그 돈으로, 제게 선물이랍시고 건넸던 다이아몬드 팔찌를 샀었나 봐요.”

    “그건 좀 이상하군요.”

    에녹은 단박에 그렇게 말했다.

    “예전이라면 모를까, 고트 자작 영식과 제이슨 남작 영애는 지금 거의 원수나 마찬가지 아닙니까?”

    “맞아요. 아무래도 고트 자작 대부인은, 샬럿이 라이언과 재결합하기 위하여 돈을 건넨 거라고 추측하고 있는 것 같지만요.”

    “글쎄요, 제가 제이슨 남작 영애를 잘 아는 것은 아닙니다만…….”

    에녹이 미간을 좁히며 말을 이었다.

    “그래도 제가 보았던 제이슨 남작 영애는 꽤 오만방자하고 자존심이 강한 사람처럼 보였었거든요.”

    여태껏 샬럿이 보였던 행보만 봐도 그랬다.

    샬럿은 이네스를 발판 삼아 사교계에 데뷔했고, 어떻게든 사교계에서 영향력을 발휘하기 위해 애를 썼었다.

    주변의 시선을 강하게 의식하며, 인정받기 위한 욕구가 그만큼 컸던 것이다.

    “그런 사람이, 자신을 버린 상대방에게 애써 매달린다…… 라.”

    역시 어울리지 않는다.

    “흠.”

    골똘히 생각에 잠겼던 것도 잠시.

    에녹이 슬쩍 시선을 들어 올리며 이네스에게 되물었다.

    “게다가 이런 말은 좀 뭐하지만, 최근 황색 언론을 중심으로 제이슨 남작 영애를 무척 띄워 주지 않았습니까? 이네스의 고발 건으로요.”

    “네, 그랬었죠.”

    “그런 상황이라면 분명 허영심이 잔뜩 충족되어 있을 텐데, 굳이 예전 남자를 다시 만난다고요?”

    푸른 눈동자가 의심으로 가늘어졌다.

    “심지어 재결합을 위해 거액을 건네면서까지요?”

    “저도 그 부분이 미심쩍게 여겨져요.”

    “평소의 제이슨 남작 영애였더라면, 차라리 새 남자를 찾는 게 훨씬 더 자연스럽습니다.”

    에녹이 침음을 흘렸다.

    “……그렇다면 그런 거금을 건네야만 하는 이유가 있었다는 건데.”

    심지어는 샬럿이 라이언에게 돈을 건넨 후에, 라이언이 급작스럽게 사망한 정황도 있지 않은가.

    비록 물증은 없지만, 현 상황 자체가 역시 수상하다.

    때마침 이네스가 입을 열었다.

    “아 참, 다이아몬드 팔찌는 사라졌대요.”

    “사라졌다고요?”

    “네. 제가 그 팔찌를 거절하자, 라이언이 다시 그 팔찌를 챙겨 갔거든요.”

    이네스가 한숨을 섞어 말을 이었다.

    “고트 자작 영식이 사망한 후로, 자작 대부인이 유품들을 정리한 모양인데…… 팔찌는 없었다고 했어요.”

    “상황이 영 이상하게 돌아가는군요.”

    에녹은 짧게 혀를 찼다.

    그러고는 분위기를 환기하듯 새로운 화제를 꺼낸다.

    “아 참, 저도 이네스에게 전해 드릴 이야기가 있습니다.”

    전해 드릴 이야기?

    두 눈을 깜빡이는 이네스에게, 에녹이 재차 질문을 던졌다.

    “혹시 핸슨 백작을 기억하십니까?”

    “핸슨 백작이요? ……아.”

    이네스가 멈칫했다.

    핸슨 백작.

    이번에 샬럿을 매개로, 이네스에게 뇌물을 주었노라고 주장했던 귀족의 이름이었다.

    “그 사람이 왜 이네스에게 뇌물 혐의를 씌우는 데에 동조했는지, 그 이유가 좀 궁금해서 찾아봤어요.”

    “……고마워요. 이건 제 일이니, 제가 먼저 조사해 봤어야 하는데.”

    민망한 마음에, 이네스가 살짝 뺨을 붉혔다.

    처음 사건이 터지고, 이네스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던 그때.

    에녹이 발 빠르게 먼저 움직였나 보다.

    한편, 이네스의 대답을 들은 에녹이 엄정한 표정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왜 그런 식으로 말씀하십니까?”

    “네?”

    “이네스의 일은 제 일이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내 일이라며 선 긋지 마세요.”

    에녹은 정말로 진지한 얼굴이었기에, 이네스는 조금 머쓱해졌다.

    하지만 에녹이 자신을 얼마나 생각해 주는지가 느껴졌기에, 오히려 기분은 좋았다.

    “어쨌든 본론으로 돌아가자면.”

    에녹이 차근차근 말을 이었다.

    “핸슨 백작 자체는 그리 별다를 것 없는 평범한 귀족입니다. 다만 하나 특기할 점은 그의 취미인데…….”

    “취미가 무엇이기에요?”

    “도박입니다.”

    “아.”

    도박.

    저 단어 하나만으로도 이네스는 무슨 설명이 이어질지 대략 감이 잡힐 것 같았다.

    그리고 그녀의 감은 꼭 들어맞았다.

    “도박 때문에 거의 파산 직전까지 몰렸다고 하더군요.”

    귀족 가문들은 자존심 때문에라도 자신들의 치부를 드러내기 싫어했지만, 그럼에도 도박 때문에 가문이 파산했다는 이야기는 알음알음 흘러나오고는 한다.

    아무래도 핸슨 백작가도 그런 위기에 처한 듯한데.

    “핸슨 백작가의 재정 상태로는 애초부터 이네스에게 뇌물을 줄 수가 없어요. 그 돈을 구할 수가 없을 테니까요.”

    “그 정도인가요?”

    “예. 처분할 수 있는 재산들은 이미 다 처분했고, 남아 있는 것이라고는 가문에서 대대로 내려온 영지뿐입니다.”

    핸슨 백작가의 영지.

    이네스가 학교 부지로 일부를 구매하겠노라 말했다며, 증여 증명서까지 날조했던 그 영지다.

    이네스가 경계심 어린 눈빛으로 에녹에게 물었다.

    “그렇다면 그 영지는 멀쩡한가요?”

    “그럴 리가요. 도박에 눈이 돌아간 사람이 어디까지 담보로 잡을 수 있는지는, 이네스도 잘 알잖아요?”

    하기야.

    이네스가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회귀 전 라이언과 부부로 살았을 적, 이네스도 라이언의 도박 빚을 몇 번이나 갚아 준 전적이 있었다.

    물론 회귀 후에는, 아직 라이언이 브라이어튼을 완전히 장악하지 않은 시점이었기에.

    그 모든 일들이 없던 일이 되었지만…….

    “그래서 핸슨 백작의 인간관계와 채권 관계를 살펴보았는데, 의외의 인물이 드러나더군요.”

    “그 인물은……?”

    “어셔 후작입니다.”

    그 대답에, 이네스의 눈이 조금 커졌다.

    그도 그럴 것이, 어셔 후작은…….

    “왕립예술협회장 말이에요?”

    “예. 더 정확하게 설명하자면, 어셔 후작이 핸슨 백작가의 채권자더군요.”

    에녹이 사납게 미소 지었다.

    “핸슨 백작이 영지를 담보로 진 빚은, 어셔 후작이 빌려준 겁니다.”

    “……그럴 수가.”

    “더 놀라운 사실은 따로 있습니다. 핸슨 백작과 어셔 후작의 관계는 상당히 화목해요.”

    “화목하다고요?”

    이네스는 제 귀를 의심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 핸슨 백작은 빚을 갚지 못했잖아요. 그런데도 친분을 유지한다고요?”

    그리고 이네스의 당혹스러움을 에녹도 이해하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저 사실을 처음 알게 되고, 에녹도 이네스와 똑같이 당혹스러웠으니까.

    “맞습니다. 심지어 핸슨 백작만큼 어마어마한 빚을 지고 있는 상태라면, 어떻게든 그 돈을 받아 내기 위해 안달복달해야 할 텐데.”

    에녹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졌다.

    “오히려 두 사람은 함께 고급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고, 고급 호텔에서 머무르며, 도박장도 드나들더군요.”

    “그런…….

    “마치, 정말 절친한 친구처럼 말입니다.”

    에녹이 입술 끝을 비틀어 올렸다.

    “그리고 그들이 사용하는 모든 금액은 어셔 후작이 지불하고 있습니다.”

    이쯤 되자 이네스도 모를 수가 없었다.

    그녀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어셔 후작도 이번 일에 한자리 끼어 있을 수도 있겠네요.”

    핸슨 백작이 진 채무를 근거로, 핸슨 백작이 자신에게 협조하도록 요청한다.

    다만 핸슨 백작이 마음을 바꿔먹고 진실을 말하기라도 하면 곤란해지니, 백작이 허튼짓을 하지 못하도록 제 시야 안에 놓아두는 것이다.

    겉으로는 친구처럼 지내면서 말이다.

    에녹이 싸늘하게 말을 덧붙였다.

    “동기 또한 충분합니다. 이번에 이네스가 학교를 설립할 것을 선언하면서, 가장 큰 손해를 본 쪽이 왕립예술협회니까요.”

    왕립예술협회의 존재 자체가 세금 낭비다. 이기적이다…….

    최근 평민들이 왕립예술협회를 보는 시선이었다.

    이네스의 학교 설립을 반대하면서, 역으로 왕립예술협회는 자신들의 밑바닥을 내보이고 만 것이다.

    심지어는 왕립예술협회의 존속 자체에 회의적인 시각을 보내는 사람들도 있는 판이었으니.

    그러던 중.

    이네스가 눈썹을 찌푸렸다.

    ‘그런데, 무언가 놓치고 있는 기분이 드는데.’

    라이언에게 모종의 이유로 거액의 돈을 지불했던 샬럿.

    느닷없이 죽음을 맞이한 라이언.

    이네스에게 뇌물죄를 덮어씌우려 한 핸슨 백작.

    서명을 위조한 위조범.

    그리고…….

    ‘잠깐.’

    그녀의 눈이 조금 커졌다.

    ‘왕립예술협회장, 어셔 후작이라면……!’

    아주 오래전, 더 정확히는 회귀 전의 희미한 기억이 불쑥 수면 위로 튀어 올랐다.

    라이언이 술에 얼큰하게 취해서 투덜거리는 목소리가 귓가를 맴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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