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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그림자를 그만두었을 (102)화 (102/120)

102화

❀ ❀ ❀

고트 자작 대부인은 메리가 내어 준 차에는 손도 대지 않고, 허리를 꼿꼿이 세운 채 소파에 앉아 있었다.

새카만 상복에 감싸인 자작 대부인은, 평소 이네스에게 대거리를 하던 모습과는 달리 무척 초췌해 보였다.

응접실에 들어선 이네스가 복잡한 얼굴로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이네요, 고트 자작 대부인.”

“…….”

이네스가 먼저 말을 붙였음에도, 고트 자작 대부인은 풀이라도 바른 것처럼 입을 꾹 다문 상태였다.

하지만 그런 자작 대부인을 차마 대놓고 질책할 수 없었던 것은…….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네.’

혈색이라고는 한 톨도 없이 파리한 얼굴.

격해지는 감정 때문에 몇 번이고 물어뜯어서 피투성이가 된 입술.

그늘진 눈가와 절망에 빠진 눈동자까지.

하기야 저럴 만도 했다.

고트 자작 대부인은 자신의 두 아들을 인생의 유일한 자랑거리로 삼고 살았던 사람이었으니까.

치마폭에 폭 싸서 금이야 옥이야 키우던 아들 중 하나가, 저렇게 불의의 사고로 죽어 버렸으니.

상심이 클 수밖에 없을 터.

“너, 무언가 알고 있지?”

한참을 침묵하던 고트 자작 대부인이 불쑥 입을 열었다.

이네스가 눈썹을 굳혔다.

“알고 있다니요?”

“그렇잖아, 라이언이 내게 말했었단 말이야!”

흥분을 이기지 못하고, 고트 자작 대부인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조만간 너와 재결합할 수 있을 거라고!”

“네? 누구와 재결합을 해요?”

이네스는 제 귀를 의심했다.

그러나 고트 자작 대부인은 이미 잔뜩 열이 오른 상태였다.

이네스의 말은 전혀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는 뜻이다.

자작 대부인이 왈칵 언성을 높였다.

“너한테 주겠다며, 샬럿에게 받았던 돈까지 모두 네 선물에 투자했는데……!”

순간 이네스가 멈칫했다.

‘샬럿이라고?’

여기서 샬럿이 왜 갑자기 나오는 거지?

이네스가 미심쩍은 목소리로 물었다.

“라이언이…… 샬럿에게 돈을 받았다고요? 어째서요?”

“그걸 내가 어떻게 아니?!”

고트 자작 대부인이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샬럿 그 계집애는 라이언과 재결합하려고 안달복달하고 있었으니까, 라이언에게 잘 보이려고 그런 거겠지!”

“…….”

하지만 이네스는 오히려 그 대답을 듣는 순간, 등골이 싸해지는 것을 느꼈다.

고트 자작 대부인처럼 속 편하게, 저들 쪽에 유리한 대로 생각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도대체 샬럿이 라이언에게 돈을 줘야만 할 이유가 뭐가 있을까?’

심지어 라이언이 이네스에게 주었던 팔찌만 봐도, 샬럿이 라이언에게 건넸던 돈은 상당한 거금이었다.

하지만 사교계에서 전해 오는 소문에 따르면, 샬럿은 라이언과 사이가 무척 안 좋았다.

사실 좋을 수가 없었다.

이네스와의 일이 있은 후, 고트 자작가에서 샬럿을 잘라 냈고.

샬럿은 라이언이나마 놓치지 않으려 아등바등했으나, 라이언이 냉정하게 끊어 냈다는 소문이 파다한 것이다.

그 소문 때문에, 이번 뇌물 사건에서 역으로 샬럿이 피해자의 위치를 가져갈 수도 있었고 말이다.

그런 상황에서 라이언에게 돈을 준다고?

라이언과 재결합하기 위해?

‘……역시 이상해.’

게다가 라이언은 이네스에게 분명 제안했었다.

그녀의 서명을 위조한 위조범이 누구인지 알려 주겠다고.

그리고 그 위조범이 밝혀진다면, 분명 이네스를 고발한 고발자인 샬럿에게 불리하게 작용했을 것이다.

그건, 다시 말하자면…….

‘라이언이 샬럿의 약점을 쥐고 있었다는 소리야.’

진녹색 눈동자가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최소한 라이언의 죽음이 샬럿에게 가장 유리하게 적용된다는 건 맞아.’

애초에 라이언은 입과 행동이 가벼운 사내였다.

만약 라이언이 샬럿의 약점을 쥐었다면, 샬럿은 어쩔 수 없이 전전긍긍하게 됐을 것이다.

라이언 자체가 믿을 수 없는 남자였으니 더더욱.

게다가 라이언은 샬럿에게 거액의 돈을 받았다고 했다.

그 돈이 라이언의 입막음 값이었다면?

‘하지만 라이언은 도리어 내게 찾아와서 위조범을 말해 주겠노라고 말했었지.’

샬럿도 완전히 바보는 아니니, 이네스와 라이언이 비밀스럽게 만났다는 사실을 알게 됐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분명 샬럿은 위기감을 느꼈을 터.

이네스의 두 눈이 가늘어졌다.

‘게다가, 누군가의 입을 막을 수 있는 가장 완벽한 방법은…….’

그 사람이 세상에서 사라지는 것이지 않은가.

“…….”

이네스는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이런 부분은…… 고트 자작 대부인은 전혀 짐작조차 하지 못하겠지.’

게다가 고트 자작가는 브라이어튼의 조력을 잃은 이래로 이빨 빠진 호랑이만도 못했다.

수상한 점을 느낀다 한들, 그를 조사할 여력조차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정리하자면 라이언이 샬럿에게 상당한 거금을 받았고, 그 돈으로 내게 주기로 한 선물까지 구매했다는 거지요?”

한참을 생각에 잠겨 있던 이네스가 입을 열었다.

“일단 고트 자작 대부인께서 아셔야 할 점은, 그 팔찌는 제가 받지 않았어요.”

“뭐라고?!”

“저는 그 팔찌를 거절했고, 그 팔찌는 고트 자작 영식이 다시 챙겨 갔죠.”

“그런…… 그렇다면 어째서 팔찌가 행방불명된 건데?!”

팔찌가 사라졌다고?

이네스의 얼굴이 미세하게 굳어졌다.

한편, 고트 자작 대부인의 눈가에는 어느새 습기가 그득히 차올라 있었다.

“라이언이 죽고 난 이후에, 집이며 그 애의 소지품을 샅샅이 찾아봤어! 하지만 아무것도 없었단 말이야!!”

“고트 자작 대부인, 진정하세요.”

“어떻게 이 상황에 진정을 해!”

“고트 자작 영식이 사망한 것은 유감이고, 자작 대부인께서 슬퍼하시는 것도 이해하지만.”

악을 지르는 자작 대부인 앞에서, 이네스는 눈썹 하나 까닥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그렇다고 자작 대부인께서 제게 찾아와 화풀이를 하실 이유는 없어요.”

자작 대부인이 두 눈을 홉떴다.

“너, 이 피도 눈물도 없는……!”

“다만 아주 만약에, 고트 자작 영식의 죽음에 대해 무언가 미심쩍은 부분이 생겨서 진상을 알아보고 싶다면.”

이네스는 허리를 곧게 세우고는, 자작 대부인의 눈동자를 똑바로 들여다보았다.

“그에 대해 도움을 줄 용의는 있어요.”

“도움을…… 주겠다고?”

“네. 명확하게 말하지만, 고트 자작 영식에 대한 애정이 남아서가 아니에요.”

이네스가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혹여나 이번 사건에 제 이름이 불미스럽게 끼어들게 되어, 브라이어튼의 명예에 누가 될까 봐 그를 염려해서예요.”

“뭐, 뭐라고?!”

“비록 전 그 팔찌를 받지 않았으나, 어쨌거나 그 팔찌를 제게 주기 위해서 샀다고 하니까요.”

게다가 라이언이 언급한 서명 위조범도 마음에 걸렸다.

굳이 고트 자작 대부인에게 언질해 줄 이유는 없었기에, 입 밖으로 내어 말하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한편 자작 대부인은 그야말로 쓰레기를 보는 듯한 시선으로 이네스를 노려보았다.

“네가 이렇게 정이 없는 아이인 줄은 몰랐다!”

자작 대부인이 치를 떨며 말했다.

“라이언을 매정하게 버릴 때 미리 알아봤어야 했는데, 널 먼저 찾아온 내가 바보였어!”

“…….”

이네스는 침묵을 지켰다.

그리고 그녀의 침묵에, 고트 자작 대부인은 더더욱 머리에 열이 오르는 것을 느꼈다.

“도움?! 됐다, 내가 너한테 도움받을 줄 알고!”

그렇게 쏘아붙인 자작 대부인이, 쿵쿵거리면서 밖으로 나가 버렸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이네스가 피로한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어쨌든 이번 일에 대해서는 좀 더 조사해 봐야 할 필요가 있을 것 같아.’

그리고.

‘에녹에게도 한 번 조언을 구해 봐야지.’

상황이 돌아가는 게 영 수상하다.

이네스는 눈살을 찌푸렸다.

❀ ❀ ❀

그날 저녁.

이네스와 에녹은 사람들의 눈을 피해 은밀하게 만남을 가졌다.

“라이언의 사망 소식, 들으셨어요?”

“물론이죠. 이래 봬도 언론사의 사주 아닙니까.”

어깨를 으쓱여 보인 에녹이 이내 쓴웃음을 지었다.

“고트 자작 가문은 완전히 뒤집어졌다고 하더군요.”

사실 ‘뒤집어졌다’라는 표현조차 지나치게 완곡했다.

지금의 고트 자작 가문은 거의 풍비박산 난 것이나 다름없었으니까.

고트 자작 대부인은 아들의 죽음을 믿지 못하고, 몇 번이나 실신했다고 했다.

이네스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실은 고트 자작 대부인이 저를 찾아왔어요.”

“……자작 대부인이요?”

에녹의 얼굴이 미세하게 굳어졌다.

“설마, 이번에도 또 억지로 트집을 잡으며 무례하게 행동한 겁니까?”

아무래도 이네스의 이혼 소송 때, 그녀의 호텔에 막무가내로 밀고 들어왔던 고트 자작 대부인의 이미지가 머릿속에 강렬하게 남은 탓이다.

“아예 그러지 않았다고 말씀드리기는 어렵겠지만…… 어쨌든 중요한 건 그게 아니고요.”

어색하게 웃어 보인 이네스가 재차 물었다.

“제가 라이언을 만났고, 라이언이 서명 위조범에 대해 알려 주겠다고 했던 거. 기억나요?”

“어떻게 모르겠습니까.”

에녹이 정색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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