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화
한편, 라이언은 어떻게든 이네스를 회유하려 들었다.
“우리 한때는 좋았잖아, 응?”
라이언이 이네스의 손등을 와락 움켜쥐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절은 너와 함께 했던 시절인 것 같아.”
소스라친 이네스가 라이언의 손을 황급히 떨쳐 냈다.
“이것 놔!”
“이런, 이네스. 그렇게 벌레를 만진 것처럼 진저리를 칠 것까지는 없잖아?”
상처받은 척 표정을 꾸며 냈던 라이언이, 이내 입꼬리를 밀어 올리며 씩 미소 지었다.
“그래도 괜찮아.”
“…….”
“내가 사랑하는 여자는 여전히 너뿐이니까.”
그렇게 말하며, 라이언은 촉촉하게 젖은 눈동자로 이네스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 애틋한 시선이 이네스는 그저 역겨웠다.
잠시 후.
“이 정도로는 내 마음을 증명하기는 어렵겠지만…….”
품 안에 손을 넣어 뒤적이던 라이언이, 손바닥만 한 상자를 꺼내어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그래도 이건 내 성의 표시야.”
달칵.
상자를 포장한 비단 리본이며, 고급스러운 외양이 딱 보아도 보석 상자였다.
이네스는 흡사 시한폭탄이라도 보는 듯한 눈빛으로 상자를 내려다보았다.
“이게 뭔데?”
“열어 봐.”
라이언이 우쭐거리며 대답했다.
이네스는 결국 내키지 않는 손길로 상자를 열었다.
그리고.
“팔찌?”
이네스는 당혹스러운 눈빛이 되었다.
벨벳으로 안을 감싼 상자 안에는, 화려하게 세공된 다이아몬드 팔찌가 놓여 있었다.
예전에 고트 자작이 선물이랍시고 가져왔던 곰 인형과는 다르게, 그럭저럭 성인 여성이 만족스럽게 선물로 받을 만한 물건이다.
하지만 이네스는 그 팔찌를 보고도 전혀 기뻐하지 않았다.
오히려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라이언을 마주 볼 뿐.
“이 팔찌, 어디서 난 거야?”
지금도 자금난으로 휘청거리는 고트 자작가의 재정에서, 이런 값비싼 팔찌를 살 돈이 나올 리가 없었다.
그 날 선 질문에, 라이언이 느긋하게 의자에 몸을 기대며 대꾸했다.
“그냥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마음이라고 생각해.”
“그래?”
탁.
소리가 나도록 상자 뚜껑을 닫은 이네스가, 상자를 라이언 앞에 밀어 주었다.
“그렇다면 이 팔찌, 더더욱 필요 없어.”
“그냥 받아 줘. 내가 당신에게 꼭 주고 싶어서 그래.”
“싫다니까?”
몇 번의 실랑이 끝에, 라이언은 못내 아쉽다는 것처럼 상자를 다시 품 안에 챙겼다.
그러고는 재차 이네스에게 신신당부를 한다.
“어쨌든 내 제안 잘 생각해 봐. 알았어?”
“확실하게 대답하겠는데, 그 제안은 거절이야.”
이네스가 단호하게 대답했다.
“내가 당신과 재결합할 일은 절대 없을 테니까.”
“글쎄, 그건 두고 봐야지.”
라이언이 유들유들하게 답했다.
그 여유로운 모습이며 목소리까지 소름 끼치게 싫어서, 이네스는 인사조차 남기지 않고 레스토랑을 빠져나갔다.
❀ ❀ ❀
그날 저녁.
샬럿은 치밀어 오르는 배신감에 양어깨를 떨고 있었다.
‘어떻게 나를 협박하자마자 곧바로 이네스와 약속을 잡을 수가 있어?!’
사실 샬럿도 알고 있었다.
라이언은 기본적으로 믿을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것쯤은.
샬럿 나름대로 쓸 수 있는 가용 자금을 모두 라이언에게 넘겼지만, 그러면서도 라이언이 오랫동안 침묵을 지켜 주리라는 기대는 처음부터 하지 않았다.
‘그래도 이렇게 곧바로 뒤통수를 후려갈길 줄이야!’
분을 이기지 못하고, 샬럿은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라이언의 행적을 조사해 본 바, 라이언은 샬럿에게 돈을 뜯어 가자마자 이네스에게 연락을 취했다고 한다.
그 와중, 샬럿이 준 돈은 이네스를 위한 다이아몬드 팔찌를 사는 데에 쓰였다고 하지 않은가!
그 사실을 떠올리자 샬럿은 다시 한번 속이 뒤집어지는 것을 느꼈다.
‘라이언에게 약점을 잡힌 것을 알게 되면…….’
초조함을 이기지 못하고, 샬럿은 엄지손톱을 마구 물어뜯었다.
‘그렇다면 어셔 후작님도 더 이상 나를 지원해주지 않을지도 몰라.’
비록 황색 언론일지언정, 언론사들과 샬럿이 접촉할 수 있었던 것도.
이네스를 궁지에 몰아넣은 증여 계약서를 만들어 준 것도.
증여 계약서에 관련하여 말을 맞춰 주었던 다른 모 귀족의 존재까지도.
모두 어셔 후작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적의 적은 동지라고, 나도 브라이어튼 백작의 행보가 꽤 마음에 들지 않아서 말일세.’
자신에게 내밀어진 그 손길이 흡사 구원처럼 느껴졌다.
‘우리, 서로 도울 수 있지 않겠나?’
하지만 이네스에게 어마어마한 원한을 가진 샬럿과는 달리, 어셔 후작은 이네스의 명성에 흠집을 내는 것 정도가 목적이었다.
어셔 후작은 왕립예술협회의 존속과 더불어, 협회장 자리를 보전하는 것을 원했던 것뿐이었으니까.
비록 이네스를 깎아내릴 용도로 샬럿과 손을 잡기는 했지만, 자신이 배후로 지목당하게 된다면 가차 없이 샬럿을 버릴 게 자명했다.
……예전의 라이언처럼.
“그렇다면 난…… 다시 쓰레기처럼 살아가야만 해.”
샬럿이 멍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지금의 편안한 생활도, 모두의 주목을 받는 일도, 그녀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사람들이 귀를 기울여 주는 것도.
모조리 신기루처럼 사라져 버릴 것이다.
다시 ‘아무것도 아닌 시골 계집아이’가 되어 버리고 마는 것이다.
“더 이상 라이언이 일을 망치도록 둘 수는 없어.”
샬럿이 표정 없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렇다면 해결책은 하나.
“……강제로라도 입을 다물고 있게 만들어야겠지.”
그 스산한 목소리를 끝으로, 샬럿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미 마음을 결정했다.
샬럿에게는 해야 할 일이 생겼다.
그리고 샬럿은, 더 이상 흔들리지 않을 생각이었다.
❀ ❀ ❀
며칠 후.
모 귀족 가문의 영식이 사망하였다는 소식이 언론을 통해 대서특필되었다.
경관들의 일차 조사에 따르면, 사망 정황은 술에 취해 발을 헛디뎌서 물에 빠졌다는 것이었는데.
별것 아닌 듯한 그의 죽음에 사람들이 호기심을 가졌던 건, 그 귀족 영식이 평소 맺고 있었던 인간관계 때문이었다.
이번에 언론을 떠들썩하게 했던 샬럿 제이슨 남작 영애와 내연 관계였던 남자.
또한 제이슨 남작 영애가 뇌물 사주 혐의로 고발했던, 브라이어튼 백작의 전남편이었던 남자.
그는 바로 라이언 고트였다.
❀ ❀ ❀
이네스는 경악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세상에…….”
그녀의 손에는 오늘 자 엘튼지가 쥐어져 있었다.
그 내용은 그야말로 충격적이었다.
“……호수에서 라이언의 시체가 떠올랐다고?”
시체가 발견된 곳은 랭던 근교의 유명 공원이었다.
아이들은 물론이고 시민들도 자주 오가는 공원이어서, 그 공원에 놀러 간 적이 있던 가족 단위 관광객들이 상당히 충격을 받았다고.
<고트 자작 영식은 과음한 상태에서 밤 산책을 하다가, 실수로 호수에 발을 헛디딘 것으로 추정되며…….>
이네스는 떨리는 눈동자로 신문 기사를 읽어 내렸다.
물론 라이언이 평소 과음하던 버릇이 있는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라이언은 최근 나에게 재결합을 요청할 정도로 의욕이 넘치던 상태였는데……?’
그런 사람이 완전히 제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술을 마신다고?
물론 그건 그럴 수 있다고 쳐도, 라이언이 호수에 빠져 죽은 공원이 또 기묘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공원은 낮에는 시민에게 개방되지만 밤 열 시부터는 출입을 제한하는 곳이었으니까.
그 말은즉.
‘밤 열 시부터 공원 문이 개방되는 새벽 여섯 시까지는, 공원 안에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는 뜻인데.’
그렇게까지 취한 사람이, 일부러 담벼락으로 둘러싸진 공원에 무단으로 침입해서.
굳이 호수 주변을 산책하다가 물에 빠져 죽었다고?
이네스가 골똘히 고민에 잠겨 있던 바로 그때.
똑똑똑.
다급한 노크 소리가 울렸다.
이네스가 의아한 시선을 들어 올렸다.
“누구지?”
“메리입니다, 가주님.”
평소 침착했던 모습은 간데없이, 메리의 목소리는 무척 당혹스럽게 들렸다.
이네스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메리를 안에 들였다.
“들어와.”
방에 들어온 메리가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가주님, 고트 자작 대부인이 찾아오셨습니다.”
허를 찔렸다.
이네스가 두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나를?”
“네. 자작 대부인께서 가주님을 꼭 뵈어야만 하겠다고 계속 우기시는 바람에…….”
메리는 곤혹스러운 낯이었다.
이네스 또한 당황스러운 건 어쩔 수 없었다.
평소의 이네스였더라면 냉정하게 쳐 냈을 테지만, 지금 고트 자작 대부인은 아들을 잃은 어머니였다.
미미하게나마 그에 대한 안쓰러움을 느끼기도 했고, 더하여.
‘라이언의 죽음이 영 수상해.’
그런 의구심도 있었던 것이다.
그런저런 상황 때문에, 이네스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응접실로 모시도록 해.”
“네, 가주님.”
고개를 숙여 보인 메리가 곧장 방 밖으로 빠져나갔다.
“후우.”
이네스 또한 한숨을 내쉬며 몸을 일으켰다.
어쨌든, 고트 자작 대부인이 찾아왔으니 얼굴이라도 한 번 볼 생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