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의 그림자를 그만두었을 (100)화 (100/120)
  • 100화

    “내가 입은 손해가 얼마인지는 알지?”

    “그럼, 잘 알지.”

    “앞으로도 잘해야 할 거야. 알았어?!”

    “약속할게. 응?”

    샬럿은 아니꼬움을 억누르며 계속 라이언에게 굽실거렸다.

    그 후.

    한참을 떠들어 댄 후에야 라이언은 몸을 일으켰다.

    “내가 다른 마음을 먹지 않도록 알아서 잘 처신하라고.”

    “응, 물론이야.”

    그렇게 아무것도 모르는 척, 해맑은 얼굴로 라이언을 배웅한 후.

    샬럿은 초조한 얼굴로 엄지를 깨물었다.

    “……괜찮겠지?”

    하지만 샬럿 자신도 알고 있었다.

    지금 그녀가 라이언에게 한 입막음은 그저 임시방편일 뿐.

    당분간은 먹인 돈이 있으니 조용히 있겠지만, 라이언은 결국 언젠가는 터질 시한폭탄과 같은 사람이었다.

    언제까지나 라이언이 제멋대로 활개 치도록 둘 수는 없었다.

    무언가 결정적인 해결책을 찾아야만 하는데.

    “일단은…… 조금만 더 두고 보자고.”

    샬럿의 눈동자가 얼음처럼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 ❀ ❀

    고트 자작가의 문장이 걸린 마차가 기세 좋게 거리를 가로질렀다.

    라이언은 마차 시트에 편안하게 몸을 기댄 채, 흡족한 시선으로 샬럿이 건넨 수표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이건 생각 이상으로 짭짤한데?’

    아무래도 샬럿의 살림살이가 제 예상보다도 훨씬 괜찮은가 보다.

    화가 난 척 언성을 좀 높였더니 알아서 돈을 갖다 바치지 않는가.

    게다가 수표에 적힌 금액이 상상 이상이었다.

    샬럿을 마주할 때에는, 이 정도 금액으로 어딜 내 입을 막을 수 있겠느냐면서 부러 화를 냈었지만…….

    “뭐, 이만하면 조금 더 뜯어먹을 수 있겠어.”

    라이언이 킬킬 소리 내어 웃었다.

    그러던 중.

    그의 시선이 창문 너머로 스쳐 지나가는 보석점에 닿았다.

    “아, 잠깐만.”

    라이언이 손짓으로 마차를 멈추었다.

    보석점 앞에서 내린 라이언이 입술 끝을 비틀어 올렸다.

    ‘이왕 이득을 얻을 거라면, 양쪽에서 이득을 얻는 편이 좋잖아?’

    그도 그럴 것이, 라이언은 처음부터 샬럿과의 약속을 지킬 생각이 없었다.

    비밀을 지켜 주는 척, 적당히 빨아먹다가 버릴 속셈이었고.

    ‘역시 더 중요한 쪽에 큰 투자를 해야지.’

    최근 이네스가 샬럿 때문에 곤경에 처했다 한들, 그건 일시적인 일이었다.

    이네스는 랭커스터에서도 최고의 명문가로 손꼽히는 브라이어튼 백작가의 가주였으니까.

    브라이어튼의 이름으로 쌓아 올린 수많은 사업체와 그에 파생하는 재산들.

    그리고 오랜 명문가로서 자연스럽게 갖게 된 명예까지…….

    ‘이네스와 다시 재결합하기만 하면, 그 모든 것이 다시 내 손아귀로 굴러 들어온다는 소리지!’

    그러므로 라이언이 점수를 따야 할 대상은 명확했다.

    이네스 브라이어튼.

    아내로 두는 것만으로도, 부와 명예를 동시에 누리게 해 주는 그 여자.

    그녀를 어떻게든 다시 되찾아야만 했다.

    ‘좋아.’

    한때 브라이어튼 백작으로서 누렸던 수많은 혜택들을 떠올리던 라이언이, 탐욕스럽게 양손을 비볐다.

    마침 샬럿이 준 수표 덕택에 주머니도 두둑해졌겠다, 라이언은 전혀 거칠 것이 없었다.

    라이언은 호기롭게 보석점 안으로 들어갔다.

    ❀ ❀ ❀

    며칠 후.

    이네스는 편지 한 통을 받았다.

    발신자는 라이언 고트.

    그녀의 전남편이었다.

    처음에는 내용 따위 확인하지 않고 그냥 쓰레기통에 처박아 버릴 생각이었으나…….

    <내용을 확인해 보지 않으면 후회할 거야.>

    편지 겉봉에 당당하게 쓰여 있는 문장이 눈에 밟혔다.

    이네스는 미간을 좁혔다.

    ‘……도대체 무슨 속셈이지?’

    하지만 이렇게까지 자신만만하게 말하는데 확인하지 않는 것도 좀 뭐하다.

    이네스는 미심쩍은 표정으로 편지 봉투를 뜯었다.

    <샬럿이 제시한 증여 증명서의 위조 서명, 누구의 작품인지 궁금하지 않아?>

    “이것 참…….”

    편지에 쓰여 있는 단 한 줄의 문장.

    그를 확인한 이네스가 헛웃음을 지었다.

    “뭐, 자신만만할 이유가 있기는 하네.”

    그것도 잠시.

    이네스는 칼날처럼 날카로운 시선으로 편지를 쏘아보았다.

    “그렇게 나를 만나야겠다고 말한다면, 좋아.”

    라이언이 도대체 무슨 속셈인지, 그 속을 들여다보아야만 할 것 같다.

    ❀ ❀ ❀

    제도 랭던의 고급 레스토랑.

    우아한 귀부인 한 명이, 기품 있는 걸음걸이로 레스토랑 안에 들어섰다.

    “예약이 있다고 들었는데요.”

    “예약자의 성함이 어떻게 되시죠?”

    “라이언 고트입니다.”

    그리하여 직원이 귀부인을 안내한 곳은, 소수의 사람들이 은밀하게 대화를 수 있는 레스토랑의 밀실이었다.

    먼저 레스토랑에 도착해 있던 신사 한 명이, 그녀를 발견하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네스, 오랜만이야!”

    그 사람은 바로 라이언이었다.

    샬럿을 대할 때와는 달리, 라이언의 목소리는 꽤나 살가웠다.

    “잘 지냈어? 샬럿 그 계집애 때문에 꽤 힘든 것으로 아는데…….”

    “글쎄, 우리가 서로 반갑게 안부나 물을 사이는 아닌 것 같고.”

    대번에 선을 그은 이네스가 무표정한 얼굴로 라이언을 응시했다.

    “편지의 내용은 어떻게 된 거야?”

    “이네스, 얼굴을 보자마자 다짜고짜 용건부터 묻는 거야?”

    라이언이 눈썹을 늘어뜨리며 부러 서운한 목소리를 냈다.

    “내게 너무 매정한 거 아냐?”

    “…….”

    이네스는 미간을 좁혔다.

    ‘어쩜 저렇게 행동 하나하나가 짜증스러울 수 있는지.’

    한때 라이언의 저런 모습을 보며, 안타까워하고 애달파했던 스스로가 한심하게 느껴졌다.

    라이언이 애틋하게 말을 덧붙였다.

    “난 당신이 너무나도 반가운데 말이야.”

    “…….”

    “정말 보고 싶었어, 이네스.”

    라이언의 저런 입에 발린 말을 듣고 있자니 온몸에 소름이 돋을 것 같았다.

    이네스가 질색을 하며 쏘아붙였다.

    “그런 헛소리를 들으려고 여기까지 나온 게 아니니, 용건만 말해.”

    “흠.”

    그러자 라이언의 낯빛이 싹 바뀌었다.

    방금까지의 애틋한 표정을 싹 걷어치운 라이언이 느긋하게 입을 열었다.

    “내가 편지에 무어라 적었더라…… 그래, 네 서명을 위조한 위조범이 누구인지 알려 준다고 했었지?”

    “맞아.”

    “그러기에 앞서, 이네스 당신이 몇 가지 알아 두어야 할 게 있어.”

    그렇게 운을 떼자, 내내 자리에 서 있던 이네스가 라이언의 맞은편에 앉았다.

    라이언의 이야기를 경청하겠다는 뜻이었다.

    내심 그 사실을 만족스러워하며, 라이언이 말을 이었다.

    “첫째, 일단 증거는 없어. 심증뿐이니, 당신이 알아서 증거를 찾아야 할 거야.”

    “알았어.”

    “둘째, 지금 당장은 위조범이 누구인지 말해 줄 수 없어.”

    라이언의 뻔뻔한 말에, 이네스가 두 눈을 가늘게 떴다.

    “그게 무슨 소리야?”

    “그렇잖아? 당신이 위조범이 누구인지만 듣고 쏙 빠져나가면, 난 닭 쫓던 개 꼴이 되는 거라고?”

    “…….”

    비록 라이언이 여유롭게 뻗대는 모습이 마음에 들지는 않았으나, 라이언이 무엇을 걱정하고 있는지 아예 짐작 가지 않는 것은 아니었기에.

    이네스는 터져 나오려는 한숨을 참으며 재차 물었다.

    “그렇다면 그 위조범이 누구인지 들으려면 내가 어떻게 해야 하지?”

    “좋아! 이 세 번째 제안이 가장 중요한데.”

    라이언이 두 눈을 반짝이며 이네스에게 제안했다.

    “위조범을 알고 싶으면 나와 재결합해.”

    “……뭐라고?”

    내내 얼음처럼 냉정했던 이네스의 얼굴 위로, 처음으로 희미한 실금이 갔다.

    라이언이 싱글싱글 웃었다.

    “위조범을 알려 줄 테니까, 그 대신 나랑 재결합하라고.”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는 소리야?”

    이네스가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고작 위조범 하나를 알겠다고 재결합을 한다고? 내가 미치지 않고서야 그럴 리가.”

    “…….”

    라이언의 얼굴이 딱딱해졌다.

    ‘정말, 콧대 높게 굴기는.’

    하지만 이네스는 샬럿과는 다르다.

    그녀는 라이언을 다시 한번 상류층의 삶으로 인도해 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으니까.

    그러므로 라이언은 부러 두 눈을 내리깔며 시무룩하게 입을 열었다.

    “뭐, 선택은 당신 몫이기는 해. 다만 이네스, 당신도 내 말을 좀 들어 주었으면 좋겠어.”

    “…….”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저렇게 거창하게 입을 여는지.

    이네스는 아니꼬운 표정을 감출 생각도 하지 않았다.

    동시에 라이언이 서글픈 목소리를 꾸며 내어 입을 열었다.

    “당신과의 결혼 생활 동안 내가 여러모로 방황했다는 건 인정해.”

    그렇게 운을 뗀 라이언이, 고개를 슬쩍 들어 올리며 이네스를 올려다보았다.

    “그래도 내게 기회를 한 번만 줄 수는 없어? 다시 재결합하면 이번에는 정말로 당신에게 충실할 생각이야.”

    “기회?”

    이네스가 기가 찬 목소리로 되물었다.

    “그런 기회는 이미 충분히 주었어.”

    이번 생은 물론이거니와, 회귀 전의 삶까지 따진다면 그야말로 수도 없었다.

    회귀 전.

    이네스를 정신 병원에 넣겠다며 뻔뻔하게 미소 짓던 라이언의 얼굴.

    그녀를 거세게 치고 가던 마차의 육중한 몸체와, 온몸을 부서뜨릴 것처럼 흔들어 대던 통증까지.

    “…….”

    그를 떠올리자 손바닥에서 축축한 식은땀이 배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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