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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그림자를 그만두었을 (99)화 (99/120)
  • 99화

    ❀ ❀ ❀

    수많은 언론에서 연일 이네스에 관련한 기사들을 쉴 새 없이 내보냈다.

    그나마 가장 중립적으로 기사를 내는 쪽은 엘튼지였지만, 그 누구도 엘튼지에게 시선을 주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재미없었으니까.

    갖가지 자극적인 기사들 속에서, 그 어느 쪽에도 편향되지 않은 기사를 싣는 엘튼지는 그저 지루하게만 느껴지는 것이다.

    ‘좋아, 오늘도 인터뷰는 잘한 것 같아.’

    인터뷰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

    샬럿은 짜릿한 승리감에 젖어 있었다.

    모두가 이네스의 저의를 의심하고, 라이언에게 질책의 눈초리를 보내는 상황.

    그 가운데에서 샬럿만큼은 완벽하게 가련한 피해자였다.

    ‘내가 드디어 이네스, 그리고 라이언에게 복수했다고!’

    샬럿을 사교계에서 매장해 버린 이네스.

    그리고 샬럿이 나락으로 떨어지자마자 가차 없이 자신을 버린 라이언.

    두 사람에게 드디어 한 방 먹여 준 것이다!

    그렇게 샬럿이 희희낙락 걸음을 옮기고 있던 그때.

    “오랜만이야, 샬럿.”

    누군가가 갑자기 샬럿에게 말을 붙였다.

    순간 샬럿은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그도 그럴 것이, 저 목소리는.

    “……라이언?”

    샬럿이 바짝 굳은 얼굴로 라이언을 돌아보았다.

    라이언이 싱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우리, 얘기해야 할 문제가 많이 있지?”

    그야말로 한 대 때리고 싶을 정도로 여유로운 미소였다.

    샬럿은 정색을 하며 몸을 돌렸다.

    “나, 너랑 할 말 없어.”

    어차피 라이언과 말을 섞어 봤자 샬럿에게 하등의 이득도 없었다.

    그러니, 최대한 라이언을 피하는 편이 나을 터.

    그러한 판단으로 샬럿을 발걸음을 빨리했으나.

    “정말로 할 말 없어?”

    비뚜름한 목소리가 샬럿의 발목을 잡아챘다.

    “왜 자꾸 귀찮게 굴어?”

    샬럿이 신경질적으로 말을 쏘아붙였다.

    “너와는 할 말 없다고, 몇 번이나 말해야 알아듣……!”

    “증여 계약서의 조작.”

    뭐?

    샬럿이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동시에 라이언의 목소리 사이로 음흉한 웃음기가 섞여 들었다.

    “정말로 대화를 나누지 않아도 괜찮아?”

    “라, 라이언!”

    “뭐 네가 괜찮다면야 나도 강요하지는 않겠지만…….”

    샬럿이 휙 몸을 돌렸다.

    사색이 되어 라이언에게 매달린다.

    “듣고 보니 이야기할 게 좀 있는 것 같아. 자리를 옮길까?”

    “왜 자리를 옮겨? 나는 여기서 이야기해도 전혀 상관없는데?”

    라이언은 보란 듯이 느긋하게 주변을 휘둘러보았다.

    그러고는 두 눈을 가늘게 뜨며 샬럿에게 되물었다.

    “아, 역시 네가 다른 사람들 눈이 신경 쓰이는 거지?”

    저 망할 자식이!

    샬럿은 두 눈에 불을 켰으나, 정곡을 찔린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여태까지 샬럿은 황색 언론에 대고 실컷 ‘나는 라이언과 이네스 사이에 낀 피해자일 뿐’이라고 주장했었으니까.

    여기서 라이언과 친밀한 모습을 보여 봤자, 불리한 쪽은 샬럿이라는 뜻이다.

    게다가 증여 계약서가 조작됐다는 저 말은…….

    ‘도대체 라이언이 어떻게 눈치를 챈 거지?’

    너무나도 혼란스러웠으나, 그렇다고 이대로 밖에서 라이언과 계속 대화를 나눌 수도 없는 노릇.

    샬럿은 입술 끝에 경련이 일어나도록 미소를 지어 보였다.

    “우, 우리 집으로 가자. 응?”

    “그래, 네가 정 그렇게 말한다면.”

    라이언은 크나큰 은혜를 베풀어 주기라도 하는 양, 고개를 끄덕였다.

    ❀ ❀ ❀

    그리하여 도착한 샬럿의 집.

    라이언을 테이블에 앉힌 샬럿이, 덜덜 떨리는 손으로 차를 내어 주었다.

    라이언은 여유롭게 차향을 음미했다.

    그러고는 한다는 말이.

    “요새 살림살이가 좀 폈나 봐? 이 찻잎, 꽤 고급으로 아는데.”

    “…….”

    느닷없이 차향을 평가해 대는 그 모습에, 샬럿은 왈칵 짜증이 일었다.

    하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 불리한 쪽은 샬럿이었기에.

    ‘참자, 일단은 참아야만 해.’

    샬럿은 치밀어 오르는 짜증을 꾹꾹 억눌렀다.

    그 후, 애써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라이언을 바라본다.

    “라이언, 아까 증여 계약서가 조작됐다는 것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게 있다고 했었지?”

    “맞아. 그랬지.”

    “그런데 나는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감이 안 잡혀서…….”

    샬럿은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순진하게 두 눈을 깜빡였다.

    하지만 머릿속으로는 이미 계산기를 한껏 두드린 상태였다.

    ‘일단 증여 계약서가 왜 조작이라는 건지 모르겠다고, 그렇게 발뺌부터 해 보는 거야.’

    하지만 아쉽게도 샬럿의 계획은 이미 초장부터 틀어진 상태였는데.

    “그래?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감을 못 잡겠다고?”

    라이언이 비뚜름하게 웃으며 그렇게 되물은 것이다.

    “참 이상하네, 그렇다면 왜 샬럿 너는 날 네 집까지 데려온 건데?”

    “그건……!”

    “샬럿 네가 증여 계약서에 대해 켕기는 것이 있지 않다면, 내가 무슨 말을 지껄이든 그냥 모른 척을 하고 있었어도 될 거 아냐?”

    그 통렬한 지적에, 샬럿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당했다!’

    라이언의 말이 맞았다.

    애초에 증여 계약서가 정말로 조작된 물건이 아니라면, 라이언이 던진 말 몇 마디에 안달복달할 필요도 없었다.

    그러므로 아까 샬럿이 할 수 있었던 가장 최적의 대처는…….

    ‘라이언이 무어라 말하건 간에, 그냥 모른 척하고 돌아오는 것이었는데!’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라이언이 음험한 눈빛으로 샬럿을 바라보았다.

    “듣기로, 이네스가 직접 증여 증명서에 서명을 했다고 하던데.”

    “그, 그건…….”

    “이네스의 서명을 위조한 거지?”

    “…….”

    샬럿은 순간 말문이 막히는 것을 느꼈다.

    ‘도대체 어떻게 안 거지?’

    허를 찔린 그녀가 멍하니 라이언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라이언이 얄밉게 샬럿에게 되물었다.

    “샬럿, 너도 거짓말은 잘 못 하는구나?”

    “그, 그게 무슨 소리야! 나는 그냥 네 말이 어이가 없어서……!”

    화들짝 놀란 샬럿은 뒤늦게야 그렇게 항변했으나,

    “그래? 나라면 그렇게 발뺌할 시간에, 어떻게든 나를 회유하려 들 텐데 말이야.”

    이미 주도권은 라이언에게 완벽하게 넘어간 상태였다.

    식은 차를 한입에 털어 넣은 라이언이, 비열한 눈빛으로 샬럿을 위아래로 뜯어보았다.

    “상황이야 뻔하지. 서명 감별사조차 제대로 확인할 수 없을 정도의 위조 서명이라니, 너 혼자 그런 위조 서명을 만들 수 있을 리 없어.”

    라이언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칼날처럼 귓가를 파고들었다.

    “그렇다면 분명 조력자가 있었을 텐데, 난 그 조력자가 누구인지도 대충은 감이 잡히거든?”

    “함부로 말하지 마, 라이언!”

    샬럿이 발작적으로 언성을 높였다.

    그러자 라이언이 비스듬히 시선을 기울이며 샬럿을 응시했다.

    “어셔 후작. 아니야?”

    “…….”

    정곡을 찔린 샬럿이 입을 꾹 다물었다.

    “예술협회장인 어셔 후작은 이네스를 싫어하고, 그래서 너를 도와서 이네스의 명예를 깎아내리려 한 거라고 생각했는데…… 네 표정을 보니 맞나 보네.”

    느긋한 어조로 제 추측을 이야기하던 라이언이, 보란 듯이 양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잘 생각해, 샬럿. 지금은 네 앞에서만 함부로 말하고 있지만, 네 행동 여하에 따라서 여러 사람이 모인 곳에서 함부로 말할 수도 있어.”

    “그게 무슨……!”

    “물론 내게 증거는 없어. 여태까지는 심증뿐이지.”

    라이언은 입술 위로 악동 같은 미소를 머금었다.

    “하지만 사람들의 여론을 뒤집기에는 이 정도로도 충분하지 않나?”

    “너!”

    “그렇게 소리만 꽥꽥 질러 대지 말고. 어쩔 거야?”

    그렇게 되물은 라이언이, 거만하게 의자에 몸을 기댔다.

    “내가 입을 다물기를 바라? 아니면 조금 더 멋대로 떠들어 줄까?”

    “라이언, 난…….”

    “만약 내가 멋대로 떠들게 된다면 말이지.”

    완전히 승기를 잡은 라이언은 그저 여유 만만한 낯이었다.

    “자칫 실수로, 누구의 도움을 받아 위조 서명을 만들었는지…… 술김에 내 추측을 입 밖에 낼 수도 있는데 말이야?”

    “…….”

    “만약 그 추측이 주변 사람들에게 소문이라도 나게 된다면, 그 조력자도 꽤나 불쾌해할 것 같고. 그렇지 않아?”

    샬럿은 피가 나도록 입술을 잘근거리며 라이언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샬럿이 애써 만면에 환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 라이언. 원하는 게 돈이야?”

    “돈? 뭐…… 돈도 좋지.”

    라이언은 부러 샬럿의 말에 혹하는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오히려 몸이 단 샬럿이 냉큼 수표책을 가져왔다.

    수표 위에 상당한 거금을 적어 낸 샬럿이, 얼른 그것을 라이언의 손에 쥐여 주었다.

    “일단 이것부터 받고, 응?”

    거만한 태도로 수표를 받아 든 라이언이 눈살을 찌푸렸다.

    “이것밖에 못 줘?”

    샬럿이 적어 넣은 금액은 객관적으로도 상당한 거금이었으나, 돌아오는 반응은 저 모양이었다.

    샬럿은 내심 울컥했으나, 애써 사근사근 말을 이었다.

    “나, 계속 사정이 어려웠던 거 알잖아. 라이언 당신이 조금만 이해해 주면…….”

    “이해? 이해라고?!”

    라이언이 샬럿을 향해 살벌하게 두 눈을 부라렸다.

    “네가 황색 언론에 대고 네 좋을 대로 떠들어 대는 바람에, 내 평판이 바닥을 구르게 됐는데!”

    솔직히 말하자면 네 평판은 원래부터 최악이었잖아?!

    그런 항변이 목 끝까지 치밀어 올랐으나, 샬럿은 다시 한번 입꼬리에 경련이 나도록 미소 지었다.

    “그래, 화가 난 마음은 이해해. 네 평판에 대해서는 최대한 나도 노력할게. 응?”

    “노력? 하…….”

    신경질적으로 앞머리를 쓸어 올린 라이언이 사납게 쏘아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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